2화. 김지훈의 빈자리 Ⅱ (2)
순간 김지훈이란 이름을 댈 뻔했다.
나직한 콧소릴 내며 바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손일석 선생에게 수술 끝나는 즉시 응급실로 내려오라고 연락해 주세요.”
간담도 파트를 겸해 일하기 때문일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런 수술은 기본적으로 확고하게 믿는 써전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만일 신뢰하지 못했다면 신현수나 이경석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전화를 끊은 이준영 교수가 처치실로 향했다.
의료진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수액대에 달린 피를 잡았다.
오하석이 힐끗 눈길을 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이내 환자에게 집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준영 교수의 등장에 움찔 놀란 응급실 인턴들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위중하고 급한 환자 앞에서는 병원장이 와도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좋은 태도다. 의사로서 갖춰야 할 자세를 잘 배웠다.
띠띠띠띠띠띠띠!
가운에 빨간 피가 묻었다.
피를 짜는 손이 은근히 저려 왔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촉에 이준영 교수가 젊은 날 치열하게 일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바이탈을 다루는 현장, 그 속에 있다는 것은 일반외과 의사의 자부심이 분명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가 무사히 회복되면 그 이상의 보상은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일석이 수술복을 입은 채로 달려 들어왔다. 떡 진 머리, 빨간 눈, 헐떡이는 숨까지 누군가를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 무슨 환자입니까?”
“간, 신장 손상이야.”
“알겠습니다. 먼저 수술 방에 올라가 계십시오. 바이탈 잡히는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손일석이 오하석과 함께 필사적으로 바이탈을 잡았다.
긴장과 불안이 뒤섞인 고함 속에 간신히 환자를 옮길 수 있었다.
띠띠띠띠띠띠!
간만에 듣는 급박한 소리.
빠르게 마취를 진행하는 마취과 의료진.
어느새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복부 소독을 하는 수술 팀.
환자의 생사가 오고 가는 자리였지만 일반외과 의사에겐 사명감과 동시에 살아 있음을 느끼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준영 교수의 집도하에 수술이 시작됐다.
이미 개복부터 라파로까지 수많은 수술을 함께한 손일석은 더할 나위 없는 퍼스트였다. 2년 차가 된 오하석은 한층 노련하게 자신의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
“마취과, 손상된 간 절제합니다.”
3분의 1 정도 파열된 간이 제거됐다.
띠띠띠띠띠띠!
급박한 심장박동은 여전했지만 서서히 혈압이 잡히며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손일석, 신장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어?”
손일석이 재빨리 바이탈과 소변량 및 소변 양상을 확인했다. 잠시 고민 끝에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보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제거하다 도리어 손상을 가중시킬 위험성만 높아질 것 같습니다.”
적절하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마무리하고 끝내자.”
드레인을 삽입한 후 배를 닫았다.
파열된 신장이 남아 있는 데다 바이탈까지 크게 흔들린 환자기에 중환자실을 면할 수 없었다. 전공의들의 끝없는 킵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손일석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혈관 수술 없어?”
“이경석 선생한테 맡겼습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가 보호자 만나 설명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들어가시죠.”
“보호자는 만났다.”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힐끗 눈길을 준 후 퇴근했다.
띠띠띠띠띠띠!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심박동 소리와 혈압 재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손일석이 갑자기 실없는 놈처럼 웃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결코 가볍게 행동한 적이 없기에 의아한 일이었다.
소변 줄에 걸려 있는 혈뇨를 제거하던 오하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으세요?”
“그럴 일이 있어. 커피를 딱 맞추는 순간 감이 왔는데 정확하네. 하석아, 환자 잘 보자.”
‘날 콕 찍어서 부르셨단 말이지. 잠 못 자고 일한 보람이 있네. 지훈아, 미안하다. 형이 벌써 끝없는 믿음을 얻었다. 2년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으하하하!’
틀린 생각 아닌 모양이었다.
노련한 써전일지라도 이런 수술을 한 날이면 은근한 불안에 잠을 설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깨진 콩팥이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몰랐다.
그런데 이준영 교수가 편안한 잠을 청했다. 김지훈이 주었던 안정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손일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중환자실을 찾은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환자는 안정을 되찾았고, 손일석은 시뻘게진 눈으로 지난밤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옆에 이경석까지 있었다.
그렇다.
김지훈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지만 김지훈을 대신하는 의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노력, 열정, 실력에 눈에 띌 정도로 영향받는 병원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이 반드시 일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잘 지내고 있겠지?’
무슨 이유인지 김지훈과 이혁원이 마치 형제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고경아가 딸처럼 여겨지듯 말이다.
돌아선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움은 예상외로 무척 따뜻한 감정이었다.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김지훈에겐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시작됐다.
저마다 기억 속에 담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했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결코 서운하거나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모든 의료진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손일석을 비롯해 펠로우들이 보이는 강렬한 열정은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최철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말대로 소아 환자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여느 날처럼 수술을 끝내고 나왔을 때 컨설트 하나가 도착했고, 곧바로 환자를 보았다.
Jejunal Atresia(공장 폐쇄증).
소장 일부인 공장의 부분적 결손으로 폐쇄가 유발된 환자였다.
전신 상태가 허락하는 한 곧바로 수술해 정상적인 소장끼리 연결해 주어야 한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마취과와의 긴밀한 협의 아래 최대한 빠르게 수술 날을 잡았다.
이제 한 달밖에 안 된 아이였기에 예상되는 문제에 충분히 대비했고, 철저히 준비했다.
아이 엄마의 눈물 속에 수술이 시작됐다.
최철한이 확연한 긴장 속에 배를 열었다.
공장 부분 결손을 확인했다.
손가락 굵기도 안 되는 소장에 더욱 단단한 긴장을 유지하며 병변 부위 주변을 세심하게 확인했다.
가늘고 약한 소장을 뒤집어 반대편을 살피던 최철한이 갑자기 눈가를 찌푸렸다.
후우!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앞뒤로 막혀 맹관이 돼 마치 소시지처럼 보이는 부분이 후복막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문제는 그 밑에 바로 혈관으로 의심되는 구조물이 촉진된다는 것이었다.
몇 번을 만져 봐도 다른 구조물은 생각할 수 없었다.
최철한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대로 진행할까?’
겨우 생후 한 달 된 갓난아이다.
유리병처럼 작고 여린 몸이다.
무리한 조작으로 출혈이 발생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백 퍼센트에 수렴하는 상황에서 집도의의 욕심이나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마취과, 신현수 선생에게 연락해 주세요.”
마침 첫 번째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신현수가 바로 들어왔다. 신중하게 병변 부위를 살피고는 숨도 쉬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소아 수술 이전에 혈관 박리다. 혈관 파트에서 맡는 것이 당연해. 지금 누가 시간이 되지? 아니야. 둘 다 필요해.’
손일석과 이경석을 찾았다.
이경석은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손일석은 이준영 교수와 수술 중이었다. 신현수가 직접 사정을 설명하자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봐.”
단둘이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손일석이 퍼스트 설 전공의가 들어오자마자 부랴부랴 소아 수술실을 찾았다.
이미 수술대 앞에 선 이경석이 눈짓으로 재촉했다.
병변을 확인한 손일석이 마른침을 삼켰다.
결코 쉽지 않은 박리였다.
“간호사, 루뻬하고 미세 수술 기구 준비하세요. 마취과, 수혈해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비해 주세요.”
빠르게 준비가 끝나자 이경석이 눈가를 굳혔다.
“일석아, 시작하자.”
잠시 중단됐던 수술이 다시 시작됐다.
보호자를 만나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을 설명한 최철한이 초조한 눈길로 수술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을 맡긴 엄마, 아빠의 눈물이 아른거렸다.
“보비, 모스키토, 포셉.”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박리가 진행됐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날카로운 보비 소리와 달리 이경석은 신중했고, 손일석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박리 부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늘고 연약한 소장 조직이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점점이 묻는 핏방울이 늘어날수록 긴장도 점점 고조됐다. 혈관을 건드리는 순간 출혈은 물론 다른 장기 기능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처! 타이!”
나직한 목소리만이 들렸다.
마침내 맹관이 거의 다 떨어져 나왔다.
그때 거구의 의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수술 팀에 머물렀다.
집도 중인 이경석과 손일석.
대기 중인 최철한과 신현수.
급하지 않은 환자, 중요하지 않은 수술은 없지만 경중과 선후가 있는 법이다.
생사가 걸린 한 달배기 아이의 목숨을 살리고자 4명의 써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들 자신의 수술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직위를 떠나 최고의 수술 팀이 분명했다.
‘지훈이가 없어도, 원했던 팀은 꾸려지는구나.’
결코 다른 수술 팀이 아니었다.
신현수가 김지훈의 역할을 대신했을 뿐 더욱 확장되고 정교해지며, 날로 질적 양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의사가 된 이후 평생 원하고 바랐던 모습이었다.
그 때문일까?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도 그 시절인 것처럼 생생한 기억이.
이제 20대 중반의 젊은 의사 두 명.
이혁민과 신기동.
교수들 모두 눈독 들였던 두 명의 인턴이 마침내 일반외과 구성원이 됐다. 일주일에 한 번도 집에 가기 힘들다는 악명 자자한 호랑이 굴 속으로 자진해 뛰어든 것이다.
4년 차 치프가 된 고성문이 감개무량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일반외과 의국이 온전하게 완성됐다. 일반외과 첫 전공의로 지원해 홀로 1년 차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 혼자 전공의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6명이나 됐네. 이렇게만 가자.’
3년 차 송재덕은 표정 관리 하느라 책상만 두드렸다.
고성문과 함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앞으로도 힘들겠지만 모든 연차가 정원을 채운 이상 확실하게 체계를 잡아 갈 것이라 여겼다.
‘혁민아, 기동아, 1년 차라는 생각만 하면 안 된다. 병원 전체로 보면 4기 전공의니까 너희들도 선배나 다름없어.’
2년 차 이준영과 금경태는 신임 1년 차를 보며 지독하게 힘들었던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있었다.
개원한 지 몇 년 안 된 병원이지만 큰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태부족인 탓에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들었다. 전공의조차 연차당 한둘에 불과해,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일이었다.
이젠 다소 나아질 것이다.
고성문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재덕아, 모두 여섯 명인데 앞으로 사흘에 한 번씩 당직 설까?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 왜 이러세요? 왜? 허경발 선생님께 맞아 죽고 싶으세요? 몸은 힘들어도 종전처럼 이틀에 한 번씩 서야 마음이 편할 겁니다. 마음이.”
“그렇겠지? 근데 너 요새 점점 말이 반복된다.”
“툭하면 깜빡하시는 통에 없던 버릇이 생겨서 그래요. 잊지 마시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강조.”
고성문이 슬그머니 인상을 쓰자 송재덕이 딴청을 부렸다.
“3년 차 되더니 점점 덤비네. 에이! 꼴 보기 싫었는데 이제부터 당직 같이 설 일이 없어 천만다행이다.”
송재덕이 입을 쭉 내밀었다.
“근데 왜 툭하면 찾으세요. 나도 힘듭니다. 힘들어요. 하여튼 당직부터 나누죠. 누구하고 서실래요?”
고성문이 눈길을 주었다.
이준영은 말없이 처분만 기다렸고, 금경태는 은근히 송재덕을 보고 있었다.
1년 차들이야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경태 저 자식은 실력이나 노력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부담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피하려는 게 눈에 보여서 탈이야. 하긴 가뜩이나 힘든데 치프하고 일하고 싶은 놈은 없겠지. 그럼 1년 차는 누가 좋을까? 머리 아프겠지만 매서운 놈보다 논리적인 놈이 낫겠다.’
“준영이, 혁민이하고 설게.”
“전 자동으로 경태, 기동이네요. 경태야, 작년처럼 올해도 잘해 보자. 기동이 넌 날 좀 죽이고 부드럽게 일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그게 좋잖아.”
“재덕이 말이 맞아. 우리만이 아니라 다들 힘든 상황이란 걸 명심하고 나가서 일 봐. 이혁민, 신기동, 이젠 인턴이 아니라 바이탈을 다루는 일반외과 전공의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지자 4년 차 치프가 가진 힘과 일반외과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흘러넘쳤다. 하기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작은 체격의 송재덕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눈빛을 보였다. 인턴들 입에서 고성문과 더불어 가장 무서운 선배라는 말이 공연히 도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웃는다고 방심하면 죽음이다!
자신의 일에 태만하거나 환자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3, 4년 차에 국한된 경우가 아니었다.
가장 살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