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김지훈의 빈자리 Ⅱ (1)
다음 날 이른 아침, 응급실 부장인 지동훈 교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손일석 선생, 밤샜어?”
“예. 이놈의 일복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지훈 교수하고 제일 친했다며? 오창도 선생님 일복도 김지훈 선생과 비슷한 데다 박승준 선생님도 예전의 박승준 선생님이 아니야. 당직 표에 이준영 선생님 이름 있는 날도 유난히 많고.”
이름은 3개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유난히 김지훈과 인연이 깊은 교수들이다.
“아! 선생님도 역시 그 자식… 아니, 김지훈 교수 여파 같죠? 손은 확실하게 풀어서 좋은데 몸이 버틸지 걱정이 많습니다.”
“오프일 때 푹 쉬어. 아니면 김 교수한테 어떻게 버텼냐고 연락해 보든지. 지금 생각해도 김지훈 선생 일복과 체력은 정말 미스터리야.”
손일석이 새빨개진 눈으로 웃었다.
그때 동네 아저씨 너털웃음이 들렸다.
“허허! 일석이가 밤새 고생했구나. 힘들지? 번갈아 가며 적당히 수술해. 욕심내면 사고 난다, 사고. 천천히 하자, 천천히. 지훈이도 내 말 듣고 버텼다.”
이런 말에 현혹되면 절대 안 된다.
“예. 빠릿빠릿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열심히 사는 사람 못 이긴다. 그래도 몸 생각 하면서 천천히 해, 천천히. 혹시 지훈이한테 연락 없었니? 미국 가서 재미 좋은가 봐. 전화 한 통 하고 소식이 없어요, 소식이. 나쁜 놈.”
“정말 한 통밖에 안 했습니까? 원장님께 그러면 안 되죠. 제가 전화해서 단단히 말해 놓겠습니다. 아주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낼까요?”
“흠흠! 한 통은 아니다. 이 교수하고 통화할 때 몇 번 같이 하긴 했어. 전화하지 마라. 하지 마.”
당사자는 미국에 있는데 김지훈이란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렸다. 들고 난 자리가 티 나면 날수록 잘 살았다는 말일 것이다.
‘자식! 이런 점은 정말 부럽네. 김지훈, 지금은 힘들어도 열심히 해서 네 자리 반드시 내가 차지하고 만다. 내가 있는데 감히 유학 간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불끈 주먹을 쥐고 각오를 다졌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간담도에는 어마어마한 일복을 가진 또 한 명의 복병, 오창도 교수가 있다. 오늘 역시 하루 종일 수술이 이어질 테고, 신기동 교수의 칠지도가 건재한 한 밤샜다는 것은 핑계조차 되지 않았다.
“손일석 선생, 오늘 스케줄 봤지? 빨리 움직여야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 거야.”
“예. 다음 환자 바로 내리라고 했습니다.”
“잘했어. 금요일에 예약된 환자 중에 손일석 선생이 집도하는 환자 있지? 신경 써. 라파로 하다 개복하면 원망이 이만저만 아니야.”
집도가 주는 설렘도 순간이었다.
펠로우가 돼서 도리어 매일매일 조각 잠을 자야 했다. 점심시간에는 아예 까무러친 것처럼 쓰러져 잤다.
김지훈의 빈자리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리였다.
그뿐일까?
사람에겐 모두 신경 바짝 써야 하는 자기 자신만의 자리가 있다.
이혁민 교수의 말에 강한 자극을 받았는지 신기동 교수가 정식으로 혈관 수술을 들어왔다.
집도가 아닌 퍼스트를 섰기에 오히려 긴장 백배다.
온몸을 옥죄는 긴장 속에 첫 번째 수술을 끝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의 수술이기에 도리어 마음에 찰 리 없었다. 칠지도가 번뜩이려는 순간 살아야 한다는 손일석의 본능이 작동됐다.
‘이럴 때 찔리면 더 많이 아프다.’
손일석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선생님, 어제 LG 게임 있지 않았습니까?”
“LG? 있었지. 어제는 공수가 완벽했어. 그렇게만 하면 포스트 시즌에 나가는 건 일도 아닌데 투수진이 문제야.”
희한하게도 야구 얘기만 나오면 모든 관심을 돌리는 신기동 교수였다. 게임을 평가하며 가히 감독 저리 가랄 정도로 풍부한 식견을 뽐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타자들은 어떻습니까?”
맞장구 몇 번 치는 사이 두 번째 환자가 내려왔다.
하마터면 휴게실로 직행할 뻔했는데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야구 얘기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질 리 없었다. 불행히도 비장의 무기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칠지도가 춤을 췄다.
“다음 주 간이식 수술 준비는 잘하고 있어?”
“예. 확실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머리만 따라오면 뭐 해? 써전에겐 손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몰라? 오창도 선생부터 신현수까지 다들 공여자 수술 노리고 있는데, 이래서 간이식 수술에 참가할 수나 있겠어?”
헉! 소리가 절로 나올 일이었다.
신기동 교수는 결코 개인적인 친분이나 관계 때문에 수술을 맡길 사람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라는 거대한 벽도 모자라 다음 타자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강타자다.
정신 바짝 차릴 일이었다.
‘후우! 병원이 아니라 정글이야.’
힘내기 위해 일단 자고, 먹어야 한다.
하루 반 만에 퇴근한 손일석이 고경희와 눈만 마주치고 곯아떨어졌다. 숟가락에 힘을 주긴 했지만 까칠한 입맛에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다.
대신 잠은 푹 잘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내일을 위해!
“지훈아, 비법 있으면 알려 줘. 정말 체력뿐이야? 으헉! 스승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다 말고 잠꼬대까지 하며 고민하는 모양이다.
신기동 교수가 맥주 한잔하며 활짝 웃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어. 얼마 안 가 쓸 만해지겠어.”
말과는 달리 칠지도 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쓱! 쓱! 쓱!
파르라니 빛나는 날이 누군가를 겨누었다.
당사자도 아닌 고경희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
오늘도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은 생각과 감정에 따라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고, 단순히 어제의 연장일 수도 있다.
이젠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가운으로 갈아입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과를 시작한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년, 매일 보던 얼굴이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허전함이었다.
한참 민감한 나이 때조차 곁을 지키지 못했건만 못난 아비의 뒤를 이어 일반외과 의사가 된 아들, 이혁원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군 생활 잘하고 있겠지.’
챙길 사람 없어 한갓져 좋다는 아내는 툭하면 아들 방에 들어가 옷을 정리하고, 침대를 정돈했다. 사람 손도 안 타는데 무얼 그리 할 게 많은지 들어가면 나올 줄 몰랐다.
어미의 마음만큼은 아니겠지만 자식이 차지했던 자리는 아비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날은 유난히 커피가 그리웠다.
‘다 큰 놈인데 왜 이렇게 보고 싶은지 모르겠네. 혁원이에게 네 덕분이란 말 들었다. 고맙다.’
자신을 다시 일반외과 의사로 돌아오게 만든 제자, 아버지와 아들을 다시 이어 준 제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거둔 제자가 타 주는 커피 말이다.
‘녀석! 연수 중에 집도까지 할 수 있을까?’
분주한 오전 진료를 마치고 시간 되는 교수들과 마주 앉았다. 여느 때처럼 송재덕 교수와 오창도 교수가 맞은편 소파를 채웠다.
“이 교수, 진료 부장 할 만하지? 그치?”
“회의를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회의도 하고 그럴 나이다. 그래야 나도 편해지고, 모두가 편해지지. 이놈의 원장 자리는 누가 안 가져가나? 매출만 떨어지면 득달같이 불러 대서 힘들다. 힘들어.”
오창도 교수가 웃었다.
“원장님 아니면 누가 병원을 이끌겠습니까?”
“아니다, 아니야. 할 사람 많다. 눈독 들이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래서 더 힘들어. 오 교수, 자기도 힘들지? 다른 파트는 다 펠로우에 교수까지 보강됐는데, 둘이 하려니까 힘들지?”
“손일석 선생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준영 선생님이 힘드실까 봐 걱정입니다. 김 교수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놈 빈자리가 크긴 커. 가끔 계단 뛰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돌아보게 돼. 잘 뛰었지. 정말 잘 뛰었어. 대장 해야 하는데, 대장.”
이준영 교수가 입술을 모았다.
아침부터 싱숭생숭했다.
대장 하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 붉히며 곤란해하던 김지훈이 보고 싶었다. 말은 안 했지만 꿋꿋하게 간담도를 고집해 고맙기도 했다.
‘송재덕 선생님도 그렇고 이 교수와 신 교수도 눈독 들이며 자기 파트를 권했는데, 왜 내 파트를 택했을까?’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자신도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공연히 쑥스러워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송재덕 교수의 눈이 쭉 찢어졌다.
“아직도 저러네, 아직도. 지훈이하고 대장 소리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요. 이 교수,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다. 혼자 먹으면 체한다. 아암! 그렇고말고. 오 교수, 내 말이 맞지? 그치?”
오창도 교수가 슬며시 딴청을 부리자 한바탕 더 쏟아 낼 기색이었다.
그때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기동 교수와 손일석이었다.
“둘이 함께 오고 무슨 일이야? 신 교수, 이리 앉자. 앉자.”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커피나 한잔하러 왔습니다.”
“커피? 신 교수, 자기는 심장 뛴다고 하루 한 잔이잖아? 아침에 먹고 또 먹어?”
“두 잔까진 괜찮습니다. 손일석, 뭐 해? 네가 먹자고 했으면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애먼 소리였다.
손일석이 이미 취향에 따라 커피를 타 탁자에 놓았다.
한 모금 넘기며 슬며시 이준영 교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유일하게 믹스 커피였다.
‘오늘은 물을 잘 맞췄나?’
“선생님, 어떠십니까?”
“맛있네. 잘 탔다.”
“김 교수가 말한 대로 물을 조금만 넣으시네요.”
“지훈이?”
“예. 어제 간만에 통화하다가 우연히 커피 얘기가 나왔습니다. 믹스 커피도 잘 타야 맛있다는 말이 나와서 신경 좀 썼습니다.”
하필이면 또 김지훈이다.
눈치 빠른 손일석도 오늘따라 이준영 교수의 감정이 복잡 미묘하다는 사실을 알진 못했다. 하긴 무뚝뚝함의 대명사인 사람의 기분을 알려면 김지훈처럼 이준영 해바라기가 돼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녀석! 믹스 커피가 그게 그거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생각과 달리 음성 병원에서 맛본 믹스 커피의 달달하고, 고소한 향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만 넣으면 되는 커피가 그토록 맛있을 줄 생각도 못했다.
송재덕 교수의 눈이 또 찢어졌다.
척 하면 착이다.
분명 김지훈은 스승의 커피를 먼저 신경 썼을 테고, 간간이 커피 자리를 만들었던 손일석도 이준영 교수의 취향을 물어보았을 것이다.
“일석아, 지훈이가 우리 취향을 가장 잘 아는데 내 취향도 물어본 거지? 그치?”
자신의 손을 거치면 모두 제자요, 제자는 자식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하면 난리 난다. 몇 날 며칠은 하루 종일 커피 얘기만 할 송재덕 교수였다.
손일석이 정색했다.
“당연하죠. 선생님이 어떤 커피를 좋아하시는지 제일 먼저 물어봤습니다. 지훈이도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데요. 선생님, 오늘 커피 정말 입에 착착 붙지 않으십니까? 두 번 세 번 고심 끝에 탄 커피입니다.”
“음! 그래, 그래. 착착 붙는다, 착착.”
“하하하!”
신기동 교수가 웃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오고 가는 말이나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손일석의 마음 때문이었다.
입만 살아 말만 번지르르하면 다시는 마시고 싶지 않은 커피일 것이다. 게다가 손일석은 김지훈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냉철한 신현수, 나이가 있어 도리어 애매모호한 위치의 이경석, 아직은 어려움을 지우지 못한 펠로우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일할 때는 치열하게 일하고, 놀 때는 정말 열심히 노는 사람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김지훈과는 또 다른 열정이었다.
일상이 주는 단조로움, 환자가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깰 수 있는 웃음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손일석을 믿고 좋아할 것이다.
이준영 교수도 다르지 않았다.
‘지훈이가 탄 커피만큼 맛있다.’
잠깐의 휴식으로 충전한 교수들이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이준영 교수 역시 진료에 열중했고,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났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 한 명 있다고 연락 왔어요. 시간 되는 교수님들이 없으시데요.)
이젠 펠로우를 비롯해 주간에도 응급실을 담당할 교수들 천지다. 웬만해선 있을 수 없는 가물에 콩 나듯 드문드문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어쩌면 잠시 쉴라 치면 어김없이 환자를 봐야 할 정도로 일복 넘쳐 났던 김지훈의 부재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학 가지 않았다면 응급실 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응급실이라! 얼마 만이지?’
이준영 교수가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응급실로 향했다.
처치실의 급박함이 밝은 해가 주는 한가로움을 뚫고 의료진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띠띠띠띠띠!
“간호사, 피 더 가져와요. 인턴 선생, 더 세게 짜.”
오하석이 정신없이 바이탈을 잡고 있었다.
CT를 본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간과 우측 신장이 모두 파열됐다. 손상이 상당히 심해 복강 내가 이미 피로 가득했다. 자칫 손도 쓰지 못하고 응급실에서 생을 달리할 수 있는 상태였다.
바로 배를 열어야 했다.
전공의는 2년 차인 오하석 한 명뿐이었다.
실력이 있다고 해도 2년 차의 한계는 명확했고, 환자에겐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수술 팀이 필요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전화를 들어 수술 방에 연락했다.
(다들 수술 중이신데 누굴 찾으세요?)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려다 말고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