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김지훈의 빈자리 Ⅰ (2)
삐이이이! 삐이이이!
보비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더 위로.”
흠칫 놀란 손일석이 담낭을 밀어 올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언제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지훈이 그 자식은 도대체 어떻게 적응한 거지? 하긴 다들 칠지도만 빼면 신기동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모르는 것과 비슷하겠지.’
“손일석, 집중해.”
감각은 또 얼마나 예민한지 단 1초라도 잡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걸렸다. 그때 보내는 눈길은 그야말로 화염방사기가 따로 없었다.
수술 팀이 3명이면 시선이라도 분산됐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전공의 인원이 모자라 단둘이 수술하는 통에 고스란히 뜨거운 눈길에 흠뻑 젖어야 했다.
오전 내내 눈치 보랴, 퍼스트 서랴, 다음 환자 준비하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손일석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긴장으로 뻐근해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이다.
‘지훈이가 수술 팀을 4명에서 3명으로 줄이니까, 이준영 선생님은 그것도 모자라 2명으로 줄인다 이거지? 경석이 형 술수에 빠져 호랑이 입 속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다니 내가 미쳤구나.’
지금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지만 일반외과 의사에게 여유는 화근에 불과했다.
손일석이 여유라는 것이 뭔지, 그런 적은 있었는지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혈관 수술이야 지금도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 오후에 한다. 간이식도 일이 주에 한 건씩 벌어져 파트에 따라 일한다면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하지만 간이식 가능한 병원 많지 않다.
당장은 건수가 적다고 해도 곧 물밀듯 환자가 몰려올 것이다. 당연히 손일석에게 간담도 분야는 혈관 이상으로 중요해졌다.
이경석의 말을 못 이기는 척,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당당하게 자원한 것이 치명적인 현실로 변했다.
신기동 교수는 여전히 칼이었다.
“손일석, 힘들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괜찮아. 힘들면 줄여 줄 테니까 언제든 말해.”
가끔은 신기동 교수도 여느 사람처럼 생각과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선생님, 저에 대해 잘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열정 하나는 남부럽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공여자 수술을 하려면 그래야지.”
예외 없이 차가운 목소리 속에 흐뭇함이 가득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결과는 불행히도 꺼질 줄 모르는 화염방사기의 뜨거운 불길, 날마다 반짝반짝 예리한 날을 뽐내는 칠지도의 화려한 칼춤이었다.
‘이준영 선생님, 스위치 좀 다세요. 꺼야 할 땐 끄셔야죠. 신기동 선생님, 검은 제발 전장에서 휘두르세요. 피아를 식별하셔야죠. 어후! 이럴수록 잘 먹어야 산다.’
손일석이 우걱우걱 깍두기를 씹으며 오후 수술을 앞두고 전의를 다졌다.
그러면 뭐 할까?
공력 차이 어마어마해 미처 방어할 겨를도 없이 처참하게 한 줌 재로 날렸다.
김경수와 오성민도 혀를 빼 물었지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손일석 생각이었다.
“어후! 예전에 알던 경석이 형이 아니야. 인턴 때 들었던 경석이 형으로 변한 게 틀림없어.”
“경수야, 형한테 타면 창피하지나 않지. 난 현수한테 탄다. 그놈의 라파로에 죽어난다.”
“이 자식들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고 있네. 경석이 형이나 현수가 태우는 게 태우는 거냐? 니들 나 대신 이준영 선생님 수술 들어갈래?”
“신기동 선생님이 좋아하시겠다.”
김경수가 약점 쿡 찌르고 일어났다.
“성민아, 수술 남았지? 난 병동 올라간다. 수고해. 일석아, 넌 안 올라가?”
“어차피 혈관 수술 끝나야 회진 도는데 숨 좀 쉬자. 몸과 마음이 다 피곤하다. 아이고! 삭신이 아우성을 치네. 사우나에서 팍팍 지졌으면 좋겠다.”
“하긴 우리 중 수술을 가장 많이 들어가는데 안 피곤할 수가 없겠지. 일석아, 오이 마사지 좀 해. 눈 밑이 까만 게 그러다 영구 문신 되겠다.”
홀로 남은 손일석이 소파에 기대 눈만 멀뚱거렸다.
‘역시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진리구나. 군대 갔을 때가 제일 편하다고 했는데 확실히 맞는 말이야.’
생각해 보니 간담도 파트에 자원한 이후 거의 쉴 틈 없이 수술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스스로 천생 써전이라 여겼기에 기꺼운 마음이었다.
‘이 정도에 꺾일 내가 아니지. 성민이는 잘하고 있나?’
으샤으샤 파이팅을 외친 손일석이 화염방사기만 아니면 편안하면서도 언제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술실로 향했다.
신현수와 오성민이 마지막 수술을 하고 있었다.
“오성민 선생, 여기서 그렇게 하면 안 돼. 저번 수술에서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벌써 까먹은 거야?”
연이어 지적이 이어졌다.
‘아! 태울 때는 더 냉정하구나.’
천안 병원에서 칼바람 날렸다는 오성민이었지만 신현수 앞에서는 고양이 앞 쥐에 불과했다. 스스로 조교수를 반납한 전임 강사와 이제 막 펠로우를 시작한 의사의 차이를 이겨 낼 장사 없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오성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틀린 말 하나 없기에 찍소리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완벽을 추구하는 놈답게 사소한 것도 지나치질 않네. 성민아, 현수한테 타는 널 보니 왠지 형 마음이 포근해진다. 동기한테 타야 제맛이지.’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에 뜨거운 동지 의식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던 손일석이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수술 있으세요?”
“내 과장 아니다.”
“한 번 과장님은 영원한 과장님이시죠! 과장님!”
아부성 멘트 날리며 나름 만족스러워하는 손일석을 보던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다른 놈이 하면 비위 상할 텐데, 일석이 이노마한테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
“지금 수술 없나?”
“예. 혈관 수술이 있는데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최철한 선생은 수술 중이고, 하석이까지 일이 있어서 누구하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잘됐다. 가자.”
손일석이 눈만 껌벅거렸다.
“예? 제가 퍼스트 서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유방 파트는 나 몰라라 하는 니가 수술할래?”
이혁민 교수의 눈가가 날카로워졌다.
재빠른 태세 전환이 필요한 때였다.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연히 퍼스트 서야죠. 몇 번 방에서 수술하십니까?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역시 여유는 화근이 분명했다.
졸지에 이혁민 교수의 유방 종물 수술을 들어간 손일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마 위에 올려졌다.
탁탁탁탁! 빠르고 정교한 논리의 칼에 잘근잘근 다져지는 참사를 피하지 못했다.
“이거 안 되겠다. 신 교수한테 얘기할 테니 당분간 내 수술도 들어와라.”
“예? 선생님, 제가 들어가야 할 수술이 한두 개…….”
“니 소아과 컨설트 받나?”
“소아과는 신현수 선생이 맡고 있습니다.”
“지훈이는 소아과까지 봤다. 혈관도 반 토막이잖아. 아! 경수가 있으니까 반도 안 되겠구나.”
인생의 라이벌 김지훈이 나오는 순간 손일석의 입이 콱 막혔다.
무언은 긍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혁민 교수가 곧바로 신기동 교수를 찾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결론은 빤했다.
혈관 수술까지 끝낸 손일석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오늘도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 넘어서까지 내내 수술실에서 살았다.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김지훈, 너 나 없는 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미국으로 날아 버린 거야? 이 상황에서 이혁민 선생님 수술까지 들어가면 거의 죽으라는 말인데, 완전히 새 됐다. 내가 로봇을 사람으로 착각한 게 틀림없어. 친구라 여겼던 김지훈, 그 자식은 기계였어.’
투덜투덜 병동으로 올라가 가장 늦게 회진을 끝낸 손일석이 화들짝 놀랐다. 신기동 교수가 매서운 눈빛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단둘이 보자.”
“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 교수에게 얘기 들었다. 너 똑바로 안 할래.”
수술실도 아닌데 칠지도가 빛을 뿌렸다.
“간이식을 한다는 놈이 가장 기본적인 술기에서 지적을 받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이준영 선생님 수술 들어가서 도대체 뭐 한 거야?”
“죄송합니다.”
“손일석, 난 절대 그 꼴 못 본다. 열심히 하자.”
마치 자존심까지 상한다는 투였다.
고양이 앞 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손일석이 신기동 교수가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제자에게 거는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후우! 스승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이걸 어떻게 만회하지?’
방법은 하나다.
신기동 교수의 요구대로 파트를 가리지 않고 다재다능한 써전이 되는 것뿐이었다. 일반외과 의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말이다.
세상도 더 열심히 살라는 모양이다.
가운도 벗기 전에 오하석이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쪼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회진 다 도셨어요? 응급실에 낙상으로 발생한 빤뻬리 하나 있습니다.”
“어디가 터진 것 같아?”
“증상이 꽤 심해서 다발성 손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손일석이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의료진의 발길은 바쁘기만 했다.
환자 상태를 알리는 온갖 기계음이 섬뜩하게 피곤한 정신을 일깨웠다.
손일석을 본 송진우가 재빨리 달려와 환자 상태를 설명했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즉시 수술 준비하라는 오더를 낸 손일석이 전화기를 잡았다.
앞으로 2년간 펠로우다.
과장이 된 박승준 교수와 같은 날 당직을 서기에 노티는 의무였다.
“과장님, 46세 남자 환자가 빤뻬리로 내원했습니다. 바로 수술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수술실에서 살았잖아? 마침 일이 있어서 병원에 있으니까 급하지 않으면 내가 할게.)
아닌 게 아니라, 지난주 주말 당직까지 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본능적인 휴식이 아니라 본능적인 수술 욕심이 앞섰다.
‘이 시간까지 퇴근은 왜 안 하신 거야?’
“아닙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굉장히 급합니다. 제가 깔끔하게 수술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급한 빤뻬리도 있었나? 어쨌든 우리 손일석 선생 몸이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피곤한 와중에도 언제나 즐겁게 일해서 참 마음에 들어. 그럼 부탁할게.)
“하하하! 일은 즐겁게 하자는 게 제 모토입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손일석에게 수술은 즐거움이 맞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한계에 몰리기 직전까지 해당되는 일이었다.
과장의 위엄을 갖춘 탓인지 박승준 교수 일복도 만만치 않게 늘어나고 있었다.
손일석이 막 수술을 시작한 그 시간.
박승준 교수가 크게 웃었다.
지동훈 교수, 신현수, 이경석도 함께한 자리였다.
“하여튼 우리 선생들 수술 욕심은 못 말린다니까. 일 분도 못 기다리는 빤뻬리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어.”
“그래서 항상 마음이 편안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하던 말씀 계속하시죠.”
지동훈 교수의 말에 박승준 교수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번 과장 회의에서 나온 마지막 안건이야. 우리 과 운영에도 참조해야 할 것 같아. 확인해 보고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 줘.”
서류를 읽던 신현수가 슬그머니 웃었다.
박승준 교수가 과장으로 결정되는 순간 내심 불안했지만 완벽한 기우에 불과했다. 도리어 모든 일을 함께 상의하고 결정하는 모습에 감명까지 받았다.
오늘도 안건 몇 개를 들고 와 4명이 머리를 맞댔다. 박승준 교수는 여느 때처럼 어떤 의견이든 귀 기울였고, 논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하자. 역시 젊은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많아. 아! 이경석 선생은 우리하고 같이 늙어 가는 처지구나. 그럼 신현수 선생만 남나? 하하하!”
웃음도 많아졌고, 농담은 필수였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송재덕 선생님 너무 닮아 가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여? 좋은 일이네. 기분 좋다. 시간 있으면 수술실 들렀다 나가면서 맥주 한잔하자. 마른안주에 일인당 딱 한 잔씩이다.”
가끔 피곤한 하루를 기분 좋은 농담과 가벼운 술 한 잔으로 마무리 짓는 일은 일종의 활력이었다. 술값 대신 택시비가 제법 나가겠지만 말이다.
수술실에 들렀다.
손일석이 고개도 들지 않고 수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송진우가 믿음직스럽게 퍼스트를 섰고, 오하석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1년 차는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1년 차부터 펠로우까지 하나하나 거쳐 온 과정이었다. 무수한 나날을 그렇게 살아왔건만 때론 그립기도 해 추억에 잠기게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수술실에 눈길을 준 후 모두들 밤늦게까지 이어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신현수 선생, 김지훈 선생이 없어서 그런지 요새 휴게실 분위기 무척 좋다며?”
“저희가 직접 말할 시기가 지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펠로우들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석이도 복병입니다. 진우 얼굴 붉어진 거 보면 목소리 좀 높아질 겁니다.”
“휴게실이 휴게실다운 것도 나쁘지 않아. 참! 둘이 사귄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맞아?”
“저도 얼핏 들었는데, 맞는다면 언젠가 꼬리가 잡히겠죠. 일석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하네요.”
지동훈 교수가 쓰윽 끼어들었다.
“손일석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건데. 둘이 사귀는 거 맞네. 없는 시간 쪼개서 데이트하려면 힘들겠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맥주 한 잔 마셨다.
한때는 생각지도 못한 여유였기에 도리어 교수진 추가 보강이 절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오늘은 훌륭한 술안주까지 곁들였다.
“둘이 결혼하면 축의금은 어떻게 내야 하지?”
“두 배죠, 뭐.”
“전임 월급 얼마 안 되는데.”
송진우와 오하석과의 관계, 수술 내내 열심히 인사하고 있는 1년 차를 오하석이 어떻게 응징할지 예측해 보는 즐거움 이상의 안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