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김지훈의 빈자리 Ⅰ (1)
김지훈이 유학길에 올랐다.
한 사람의 부재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정에 맞춰 많은 부분을 미리 대비했지만 막상 김지훈이 떠나자 여기저기 미진한 부분이 눈에 보였다.
결국 이경석 이하 모든 교수들이 모였다.
이경석이 신현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펠로우 세 명이 근무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었다.
특별한 문제 없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교수 자원이 늘어난 덕에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부담까지 줄어 지적할 사항조차 없었다.
하지만 도리어 이때 전후로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 긴장의 끈이 풀리거나, 혹은 점점 다양하고 많은 환자들을 보며 보다 위중한 환자와 맞닥뜨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학을 떠난 사람이 김지훈이다.
매일매일 마치 철인 3종 경기를 치르듯 숨 가쁘게 보낸 바로 그 김지훈이 무려 2년이나 자리를 비운 것이다.
단 한 명이 자리를 비웠을 뿐이지만 워낙 많은 일을 맡아 해 왔다.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려면 남은 사람들의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지훈이 하나 없는데 서넛은 없는 것 같네.’
“다들 쉬어야 하는 일요일에 모이자고 해서 미안하다. 오늘 보자고 한 건 업무 분담 때문이야. 긴장이 필요한 때라는 건 말 안 해도 잘 알 테니 생략하고 간담도 파트, 이식 센터와 혈관 파트 지원, 소아 환자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것 같아.”
김경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에 진료, 응급실도 모자라 논문과 학회 발표까지 정말 일 많이 했네. 아! 이혁민 선생님 파트도 일부 맡았다고 했지? 아이고! 무쇠다, 무쇠. 능력자라고 해야 하나?’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현수가 손을 들었다.
“먼저 소아 환자부터 결정합시다.”
단순히 몸만 작은 것이 아니라 성인과 모든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소아 환자가 주는 중압감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웠다.
모두들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참석자, 최철한이 선수를 쳤다.
“이경석 선생님, 상대적으로 제일 일이 적고, 소아 환자 수도 많지 않으니까 내가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신현수 선생, 괜찮겠지?”
이혁민 교수 밑에서 유방과 갑상선 파트를 맡고 있다고 해도 아직 폭 넓은 경험이 더 필요한 참이었다. 펠로우들과의 자리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서울 병원 근무를 시작한 최철한이 자청해 참석한 이유기도 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신현수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나섰다.
‘어떤 수술보다 정교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바짝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아직 경험이 더 필요한 내게 꼭 필요한 수술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혼자 맡다 보면 소아과 컨설트를 바로 보기 힘들 수가 있습니다. 같이 보시죠.”
김지훈 혼자 맡았던 부분이었다.
극히 드물 예외적인 수술을 제외하면 최철한이 감당 못할 리 없었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 줄 이혁민 교수도 있지만 신현수의 내심을 알기에 고집 부릴 일이 아니었다.
‘수술 욕심은 여전하네.’
뛰어난 후배는 선배를 긴장시킨다. 하물며 김지훈과 쌍벽을 이뤘던 신현수의 강한 열정이었다. 은근한 긴장에 어깨를 휘휘 돌린 최철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면이 있겠네. 대신 내가 시간 없을 때 신현수 선생이 보는 것으로 하자. 위장관 파트 수술 결코 적지 않잖아.”
신현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유방 파트도 점점 바빠질 테니까 상관없겠지.’
“알겠습니다. 오성민 선생, 신경 씁시다.”
자연스럽게 위장관 펠로우인 오성민의 일에 소아 환자가 포함됐다. 개복 수술은 몰라도 라파로를 배워야 하는 입장에선 무조건 따라야 할 일이었다.
흔쾌히 대답하는 신현수를 보던 이경석이 입맛을 다셨다.
‘나한테도 꼭 필요한 부분인데 하필이면 현수 저 자식도 똑같은 생각을 하냐. 몇 년을 보면서도 고집이 황소 힘줄일 줄은 몰랐네.’
인생 욕심대로 살 수 없는 일이었다.
“좋습니다. 소아 환자는 두 분이 알아서 보시고, 혈관 파트 지원은 어떻게 할까요?”
눈길을 주기도 전에 손일석이 눈을 부릅떴다.
‘흐르는 물처럼 잘 굴러가고 있구만, 왜 갑자기 모래를 파고 둑을 쌓으시나. 안 되지. 이건 배신이야, 배신.’
지원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남았다.
확실하게 막아야 했다.
“경석이 형, 대장 파트 일 많잖아요. 내가 펠로우긴 하지만 혈관 파트는 전적으로 맡겨 줬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고, 신기동 선생님도 지적 사항이 없으십니다. 그 모든 일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핵심이 있습니다.”
모든 일반외과 의사가 혈관 수술에 정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숙련되면 다른 수술에서 상당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파트이기도 했다.
눈독들이던 소아 환자를 놓친 이경석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지훈이가 있었을 때 얘기고, 경수가 있어서 힘들 것도 없어. 펠로우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면 우리에겐 책임 방기일 수도 있고, 경험도 현수나 내가 더 많아.”
수련 동기라지만 조교수의 말이다.
군대 3년 공백 동안 이경석이 쌓은 공력 역시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최철한은 물론 전임 강사인 신현수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지원 사격을 했다.
이미 파트 일이 하나 더 늘어난 오성민에겐 강 건너 불구경이었고, 김경수에겐 또 하나의 일 추가였다.
손일석이 다급해졌다.
“경석이 형, 왜 이러세요? 혈관 파트를 확실하게 마스터하지 않으면 이식수술에 참가하기도 힘듭니다. 신기동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잖아요?”
“말 잘했어. 신장은 몰라도 간이식 수술을 하려면 간담도 파트에 바짝 신경 써야 하지 않겠어? 이준영 선생님과 오창도 선생님 수술이 무지막지하게 많지만,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스스로 발목 잡으며 구덩이에 빠졌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이식 관련이 있으니 혈관에서 간담도로 건너뛰는 것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숨은 의도는 쉽게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열정이나 노력이 아니라 바로 체력이었다.
철인처럼 일한 김지훈과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에 맞게 일해야 모든 일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탈도 안 생기는 법이다.
“잠깐, 오창도 선생님이라니요? 설마 나 혼자 간담도를 전담하라는 거예요?”
“그럼 누가 해? 경수도 혈관 배워야 하잖아?”
오성민에 이어 김경수의 일도 자연스럽게 추가됐다.
손일석의 입이 딱 막혔다.
김지훈을 대신해 간담도를 맡을 사람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누가 맡는지였다. 펠로우가 3명이나 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경수 위로 송재덕 교수, 박승준 교수, 이경석이 있다. 대장만이 아니라 항문 수술까지 많아져 정신없을 것이다.
오성민은 지동훈 교수와 신현수만 있지만, 둘 다 라파로라는 또 하나의 벽을 넘어야 한다.
게다가 각각 소아 환자, 혈관 추가다.
“라파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신기동 선생님이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요구 사항이 적지 않을 거다.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잖아? 이왕 해 온 김에 잔소리하지 말고 깔끔하게 몽땅 맡아.”
‘몽땅’이라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일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신기동 교수를 언급하는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거미줄을 치겠다?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간담도를 맡아야 무리가 없지, 너무 일이 많아지면 도리어 혈관과 이식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지?’
사실 이미 맡아 온 일도 있고 해서 간담도 파트를 자청할 생각이었다.
다만 펠로우들과 적당히 분담하고 싶었다.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인 이준영 교수 파트를 자신이 맡는다고 하면 모두 다 기쁜 마음으로 합의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예 김지훈 대신이라니!
‘지훈이처럼 일하다간 제명에 못 산다.’
“그러면 반의반이라도······.”
이경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손일석,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오창도 선생님은 몰라도 이준영 선생님께 우린 돌아가면서 할 테니까 나머지는 혼자 알아서 하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 원하는 부분만 빼먹으려고 하다간 다 놓친다.”
가히 일하다 죽으라는 선고와 다름없었다.
‘살 떨리는 선생님 둘에 일복 터진 선생님까지 모두 내가 감당하라 이거네. 야! 펠로우 서럽다. 좋아. 거미줄에 걸려 주지. 일 년 후에 보자고. 다들 후회할 거야.’
손일석이 눈빛을 굳혔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이왕 맡는 일 깔끔한 정리가 필요했다.
“좋습니다. 경석이 형, 혈관 나눠 맡는 대신 간담도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아요. 우리 신현수 교수나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펠로우 친구들까지 나 잘나간다고 방해 공작 뭐 이런 거 하면 알지? 하오문 총동원이야.”
“걱정도 팔자다. 그럼 마지막으로 당직 문제 확실하게 결정하자. 박승준 선생님부터 현수까지는 돌아가면서 서고, 펠로우 선생들은 사흘마다 섭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지만 찍소리 못하게 도장 한 번 더 찍었다.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수술 기회를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손일석이 돌연 눈을 쫙 찢었다.
파트부터 당직까지 조교수와 전임 강사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후련하다는 듯 손뼉을 딱딱 치며 문을 여는 이경석과 신현수의 홀가분한 표정, 잔말 말라는 것 같은 진한 미소가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찢어진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들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툭하면 외로운 밤을 지새워야 할 우리 경희는 어떻게 하지? 미안하다, 경희야. 오빠가 펠로우 딱지 벗을 때까지만 기다려 줘.’
김경수나 오성민도 다르지 않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어.”
아니나 다를까?
손일석이 간담도를 모두 맡겠다고 자청하자 이준영 교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잘했다는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열심히 똑바로 하자.”
대신 엄청 무서운 말이 돌아왔다.
오창도 교수의 웃음까지 왠지 살벌하게 보였다.
“손일석 선생, 잘해 봅시다.”
혈관을 나눠 수술하겠다는 말에 신기동 교수는 한술 더 떴다. 매섭고 예리한 눈빛만 번쩍였다.
“이경석 선생이 혈관 수술 한다고 농땡이 부리면 알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사유가 없는 한 다 들어가. 오창도 선생 수술도 마찬가지야.”
확실하게 확인 사살을 당한 손일석이 눈가를 좁혔다.
소아 환자만 빠졌을 뿐 김지훈이 한 일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앞날이 무시무시하게 보였지만 여기서 불평하고 주저앉으면 결과는 빤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일이었다.
‘역시 교수님들도 날 인정하시네. 아무나 지훈이 일을 대신 할 수는 없지. 나니까 가능한 일이야. 설마 2년을 못 버티고 쓰러지진 않겠지.’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똑바로 확실하게 일하겠습니다.”
왜 눈가를 훔치고 있을까?
터지는 일복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그걸 즐기는 놈이 있긴 했지만, 별종이거나 일중독이거나 미친놈이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손일석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몰려드는 피곤과 친해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아! 힘드네. 도와주는 놈은 없고, 일은 몰려들고, 선생님들이 주는 스트레스는 하늘을 찌르고. 이걸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경수야, 퇴근하는 거야? 나쁜 놈. 성민아, 난 당직도 아닌데 퇴근 기약이 없다. 죽일 놈.”
업무량의 차이는 있지만 몰골은 별다를 것이 없는 김경수와 오성민이 힘없이 웃었다. 윗사람이 첩첩산중이니 산은 높고 덩달아 골까지 깊은 탓이었다.
어쩌면 모두들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툭하면 투덜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끝은 항상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휑한 얼굴로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말이다.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입 역시 결코 죽지 않았다.
물론 펠로우들 간의 대화였고, 그중에서도 손일석의 입은 여전히 막강했다. 분위기 좋으면 동기인 신현수와 이경석은 물론 교수들 앞에서도 빼어난 입담을 뽐냈다.
“어후! 오늘은 두 몫 정도 한 것 같네. 세 몫 정도는 해야 뿌듯한데, 집에 가는 발에 힘이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아. 경수야, 당직 잘 서고, 힘든 환자 오면 연락해.”
“너한테?”
“자식이! 힘들지도 않으면서 정신줄 놓으면 안 되지. 누가 백(Back) 당직인지 당직 표 확실하게 확인하세요. 환자 많이 봐. 우리 밥값은 하자.”
“밥값은 충분히 하고 있어. 이놈의 라파로 올해 내에 반드시 마스터하고 만다. 성민아, 파이팅 하자.”
힘찬 목소리와 함께 오늘도 어김없는 일이 벌어졌다.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돌연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친절하게 전화를 대신 받았다.
“경수야, 응급실인가 보다.”
“여보세요? 일반외과 연구실입니다.”
(일석아, 나야. 수술 들어와야겠다.)
“경석이 형, 오늘 나 당직 아니에요. 어? 형도 당직 아니잖아요.”
(양방이야. 너 피곤한 것 같아서 준비 다 해 놓고 연락하는 거니까 바로 수술실로 내려와. 성민이는 어제 당직 섰으니까 퇴근하라고 해.)
그렇다. 밥값 확실하게 해야 한다.
지그시 어금니를 문 손일석이 김경수와 사이좋게 수술실로 향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이겨 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지훈이 그 자식이 고스란히 남겨 놓은 일복이 나한테 집중된다 이 말이지? 좋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아주 박살을 내 버린다.’
한 건의 수술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온몸을 활활 태웠다.
하지만 그런 손일석도 절대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