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금만 같아라 Ⅱ (1)
신기동 교수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현수가 공여자 수술 퍼스트 서. 이경석, 손일석과 함께 간 처리 맡아. 수술 못지않게 중요한 과정이니까 주의할 점 확실하게 알려 줘.”
첫 번째 수술 팀과 다른 점은 오창도 대신 손일석이 간 처리를 맡았다는 것뿐이었다. 별다른 일이 아닌 것 같지만 결코 사소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환자에 관한 한 인연이나 관계에 연연하는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손일석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간이식 수술의 당당한 일원이 됐고, 머지않아 퍼스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숨은 의미가 상당히 큰 결정이었다.
김지훈이 눈길을 주었다. 자신의 일처럼 뿌듯해하고 있었다.
‘일석아, 절대 실망할 일 아니야. 나 유학 가기 전에 내가 담당했던 부분 모두 가져갔으면 좋겠다.’
혈관이나 소아 파트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간담도 파트는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밖에 안 남는다. 두 명의 교수에게 가해질 어마어마한 부담을 덜어 주길 바랐다. 어쩌면 그 때문에 신기동 교수도 손일석을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수술에 들어오게 하는지도 몰랐다.
‘고맙다. 덕분이다.’
손일석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제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오상민과 김경수 역시 동기의 도움과 교수들의 지도 편달 아래 날개를 펼 날이 멀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법이다.
이로써 후배 교육까지 사실상 두 가지 목표를 이룬 것과 다름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결코 김지훈이 대신할 수 없는 일, 사활이 걸린 남은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3월의 끝이 다가올수록 고경아의 초조함이 눈에 보였다. 두 번째 간이식 수술에도 참여해 가뜩이나 없는 시간이 더욱 촉박해졌다.
마치 고3 수험생을 둔 집처럼 김지훈 역시 매사를 조심했다. 설거지는 조용조용, 청소도 빗자루와 걸레로, 텔레비전 시청은 스스로 금지였다.
희연이는 어리니 열외다.
심하게 칭얼대면 안고 나가 달래는 수뿐.
‘부쩍 엄마를 찾네. 우리 희연이 조금만 참자.’
하루하루 힘들고 아슬아슬한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시험 날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희연이를 맡기고, 모처럼 고경아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 칭얼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고경아는 매일 이런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내색할 때가 아니었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적당한 속도로 함께 걸었다.
“경아 씨, 긴장하지 말아요.”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네요.”
“준비 열심히 했잖아요. 무조건 백 퍼센트 합격이지. 경아 씨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지 몰라?”
고경아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낼 말이 없었다. 병원이 보이는 곳까지 손 꼭 잡고 마음이 담긴 온기를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 내 시험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응시자가 도착해 있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긴장을 달래는 사람부터 중얼중얼 마지막 정리에 여념이 없는 사람까지,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시험에 대비했다.
김지훈이 힘차게 주먹을 흔들었다.
“경아 씨, 파이팅!”
“늦었어요. 걱정 말고 빨리 가 봐요.”
“시험 시작 20분 전입니다. 모두 입실하세요.”
상당히 불안하고 초조할 텐데, 도리어 활짝 웃으며 시험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웅성웅성!
이내 소란이 사라졌다.
시험장 문이 닫히며 방해해선 안 될 고요만이 남았다. 이제 4시간에 걸친 시험이 끝나면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소수만 웃게 될 것이다.
‘경아 씨, 침착하게 아는 문제만 확실하게 풀어도 될 겁니다.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 파이팅!’
두근두근!
마치 직접 시험을 보는 것처럼 오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툭하면 시험장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며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째깍! 째깍!
점심 식사 시간, 1시다.
시험이 끝났을 것이다.
배고픔도 잊고 내리 달렸다.
낯선 응시자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은 채 우르르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극소수만 웃을 뿐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더 불안하겠지.’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겨를도,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곁을 스쳐 갈 동안 고경아가 보이지 않아 왠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고경아가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혹시 시험을 망친 걸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럴 리 없어. 그동안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절대 그럴 리 없어.’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고경아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돼서 왔어요?”
“걱정은 무슨! 점심 같이 먹으려고 왔어요.”
“얼굴은 아닌데요?”
감정을 잘 속이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아내 일인데 얼굴에 쓰여 있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재수 없는 말은 내뱉을 이유가 없었다.
“내 얼굴이 어때서요? 오창도 선생님이 잠깐 진료 맡아 주기로 하셨으니까 밥 먹으러 갑시다.”
“병원 밖으로요?”
“이런 날 구내식당 찾으면 이상하지 않아요?”
점심 식사로 적당한 메뉴 빤하다.
설렁탕집을 찾았다.
고경아가 몇 숟갈 뜨고는 수저를 놓았다.
결과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한 번 기회를 놓친 탓에 묻기 힘들었다. 평소 왕성했던 식욕까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결국 숟가락을 함께 놓고 말았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웠어요?”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준비한 부분에서 많이 출제되어서 성적이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어? 그럼 잘 봤다는 말이잖아?’
하마터면 소리 높여 타박을 할 뻔했다.
“어후! 괜한 걱정을 했네. 그런데 아까부터 얼굴이 왜 그래요? 꼭 죽 쑨 사람 같네.”
“고마워서요. 그동안 고생한 지훈 씨한테 너무 고맙고, 갑자기 내 길을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져서 그래요. 결과를 떠나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기쁘고 행복할 때 눈물이 나는 것처럼 고경아도 그런 감정에 빠진 것 같았다.
문득 시험을 준비하던 첫날 모습과 고성문의 말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 경아 씨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유인지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너무 사랑스럽게 보였다. 항상 침착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윽한 눈빛을 보내던 김지훈이 어깨를 흔들었다.
결과를 떠나 축하해야 할 날이었다.
분위기 띄워야 했다.
“이따 저녁에 근사한 데서 식사합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렁탕은 어울리지가 않네. 양수리는 멀고, 미사리?”
고경아가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도 면접이 남았다. 성적이 비등하다면 당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평소 고경아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이고, 그동안 꿈꿔 왔던 미래에 대한 소신을 당당히 밝힌다면 당연히 합격될 것이라 믿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어디선가 들을 것 같은 말을 되새겼다.
다소 마음이 진정된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초조해졌다. 시험 결과가 어서 발표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준영 교수 역시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아직 발표 안 났어? 언제라고 했지?”
“이번 주 금요일에 발표 나고, 면접은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잘 봤다고 하는데 은근히 걱정됩니다.”
“경아가 그렇게 말했으면 믿어. 유학 갈 병원은?”
“간호사 연수 병원이 합격자 발표와 동시에 발표된답니다. 가능하면 같은 병원으로 가거나, 최대한 가까운 병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나쁘지 않네.”
굳이 널리 알려져 익숙한 병원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일반외과 부분에 강점을 가진 병원은 곳곳에 있었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도 무방했다.
초조한 가운데 합격자 발표 날을 맞았다.
하필이면 수술하는 날이다.
게다가 수술이 몰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술에 집중했다.
고경아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속은 꽤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간간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보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술이 끝을 보일 무렵.
손일석이 슬그머니 앞을 가로막았다.
“김 교수, 아직 소식 못 들었어?”
“경아 씨도 지금까지 수술 방을 못 벗어났어. 어후! 궁금해 죽겠네. 공지라도 하면 좋겠는데.”
손일석이 거드름을 피웠다.
“김 교수, 내가 누구지?”
“손일석이지 누구야? 이 판국에 농담이 나와? 상황 판단이나 잘하셔.”
“상황 판단 잘해야지. 펠로우라고 하오문주 공력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판단 잘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친구를 위해 개고생한 사람은 핀잔이나 받고. 세상 참 묘해.”
번뜩 손일석이 다시 보였다.
“결과 알아냈구나.”
“흥분하긴! 목소리 가라앉히셔. 알아냈다기보다 내 정보망이 아직 녹슬지 않았더라고. 총무과장 그 양반이 꽤 깐깐하지만, 내가 빈틈을 절묘하게…….”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말해 봐. 어떻게 됐어?”
손일석이 스윽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지훈아, 믿음이 부족하구나. 처형은 내가 너보다 더 믿는 사람이야. 난 이미 시험 정도는 우습다고 확신했지.”
시험 통과다.
부르르!
온몸이 떨렸다.
당장 고경아에게 알려 주고 싶었지만 가장 큰 기쁨을 누려야 할 사람이었다. 기를 쓰고 표정 관리 하며 고경아의 미소만 기다렸다.
일과가 끝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퇴근했다.
고경아가 가벼운 웃음기를 보이며 맞이했다.
모른 척하고 물었다.
“경아 씨, 결과 나왔죠?”
아무 말 없이 가슴에 안겨 왔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고 있었다.
“지훈 씨, 고마워요. 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이젠 정말 욕심이 나요. 꼭 합격해서 함께 가고 싶어요.”
“당연하죠.”
브브브브! 침을 튀기던 희연이가 ‘아구! 아~’ 거리며 아빠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무릎 사이에 눕히고, 따스한 분위기를 즐겼다.
“면접은 어떨 것 같아요?”
“경쟁률이 2 대 1이에요. 자기 소개서 제출하고, 향후 계획만이 아니라 실무에 관한 면접까지 진행한대요. 나 잘할 수 있겠죠?”
“그럼요.”
최종 관문인 면접 역시 훌륭하게 통과할 것이라 믿었다. 누가 면접관일지 모르지만 시험 직전까지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은 고경아의 열정과 노력을 알아줄 것이다.
시간은 잘도 흘렀다.
4월로 들어서며 봄날이 만개했다.
화창한 날씨 속에 고경아의 면접이 시작됐다.
상당히 오랜 시간 진행됐고, 면접장을 나온 고경아의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분위기가 어땠는지, 면접은 잘 봤는지 물었지만 마지막 관문인 탓인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언제 최종 결과가 나오죠?”
“토요일 1시에 발표한대요.”
“사흘 후네. 경아 씨,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요. 제대로 잠도 못 잤는데 며칠 푹 쉬고 주말에 바람이나 쐬러 갑시다. 겸사겸사 희연이 코에 봄바람도 묻혀 주고요.”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시험 준비를 시작한 이후 지금이 가장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사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조바심을 낼지도 몰랐다.
뚝딱 토요일 일과가 끝을 보였다.
이제 한 시간 후면 결과가 발표된다.
따르르릉! 따르르르!
‘혹시 결과가?’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연구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김지훈이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고경아 전화였으면 휴대폰이 울렸을 텐데 말이다.
이혁민 교수의 호출이었다.
무슨 일인지 펠로우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내심 미리 결과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건만, 눈치를 보니 별개의 일이었다.
손일석이 미리 정보를 못 빼내 미안하다는 듯 의자를 내밀며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초조해하지 마. 내가 처형을 잘 알잖아. 당연히 합격이다. 경희도 안 불안해하는데, 김 교수가 이러면 어떻게 해?”
“그래도 너무 떨려. 꼭 내가 시험 본 것 같아.”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라. 오늘 최종 발표가 나지? 어째 김지훈, 니가 더 안달이 난 얼굴이다.”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예. 1시에 발표합니다.”
“그래. 좋은 결과 있을 거다. 준비는 잘하고 있나?”
“현수에게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마취과 윤서연 선생도 와이프에게 해 줄 말이 많다고 해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서로 돕고 살아야지.”
결과는 문제없을 테고, 꼼꼼한 고경아가 있어 유학 준비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김지훈만 좌불안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