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43화 (943/1,329)

8화. 지금만 같아라 (2)

위압적일 정도로 두툼한 자료가 눈을 꽉 메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뒤통수를 잡아끌던 간이식 자료가 분명했다. 육체적 피로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으로 시간이 없어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열흘 후에 간이식 수술 예정된 거 알지?”

당분간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에휴! 이건 또 언제 검토하지?’

김지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지금은 한 페이지 넘길 시간도 없겠지.’

슬며시 또 다른 자료집을 내밀었다.

“요약집이야. 신기동 선생님 성격을 볼 때 이론이 따라 주지 않으면 일석이 너라고 해도 간이식 수술에 참가시키지 않을 거야. 핵심만 정리했으니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독수리 타법이 열 손 타법이 됐을 리 없다. 요약이라고 해도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주말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겠네.’

김지훈이 첫 번째 간이식 수술 팀과 각자의 역할에 대해 세세히 설명했다. 빠를 수 있지만 자신이 맡았던 신기동 교수 팀의 퍼스트를 섰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곁들였다.

“덕분에 내가 스승님과 한 팀이 되면 더 좋고.”

손일석이 머리만 긁적였다.

조금이라도 피로를 덜기 위해 내심 잔머리 많이 굴렸다. 정작 김지훈이 왜 자신을 그토록 밀어붙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고맙다.”

결국 본전도 못 찾았다.

자신을 위해 잠도 마다한 김지훈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눈앞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기에 전념하며 무안함을 감췄다.

‘지훈아! 내가 깜박이 꼭 켜고 들어오라고 했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니까 싱숭생숭하잖아. 눈물 젖은 밥을 먹을 줄은 몰랐네. 근데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다들 배가 두둑해질 무렵, 손일석이 맥주 몇 병을 시켰다.

“2차는 내가 거하게 사고 싶은데, 내일 일도 해야 하니까 오늘은 요걸로 끝냅시다.”

마침 희연이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곤히 자고 있었다.

마다할 일이 아니기에 가볍게 한 모금 하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유학에 수반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김지훈의 로망이었던 새 차 처리까지!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이다 눈가를 좁혔다. 불현듯 깜박이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설마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차를 중고로 넘기진 않겠지? 분위기 전환 좀 해야겠다. 어차피 해결하고 가야 할 문제잖아.’

“김 교수, 그래서 차는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문제야. 아무 생각 없이 차는 샀는데 팔 수도 없고, 어디 보관하기도 만만치…….”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막연한 불안을 유발했던 생각, 그 생각이 손일석의 눈 속에 있었다. 가족이라는 점, 고경아와 고경희는 자매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자! 일단 한잔하시고.”

일단 맥주잔은 경쾌하게 부딪쳤다.

손일석이 낯짝에 두툼한 납을 깔았다.

일은 일이고, 차는 차다.

절친한 친구끼리 못할 말은 없다.

“비싼 돈 주고 산 차가 애물단지가 됐네. 지금 팔면 산 지 얼마 안 됐어도 완전 똥값이야. 선택은 세 가지! 하나, 똥값으로 눈물을 머금고 판다. 둘, 모진 비바람 속에 새 차를 똥차로 만든다. 셋,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

마지막 말에 힘 팍팍 주었다.

“오빠, 우리 차는 어떻게 하고? 바꿀 때도 안 됐어.”

고경희의 말에 손일석이 쿡쿡 옆구리를 찔렀다.

아무리 애지중지해도 설마 차 때문에 감정 가질 김지훈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나저러나 근무 상황은 바뀔 것이 없었다.

김지훈은 유학 기간 동안 차 관리를 맡기고, 손일석은 공짜로 새것과 다름없는 차를 몰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물론 손일석 관점이었지만 김지훈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세 번째 선택이 가장 적절한 것이 빤한데, 손에 쥔 떡 정말 놓기 힘들었다.

고민할 일이 아니건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지훈 씨, 생각해 보니까 제부 말이 맞네요. 파는 건 답이 아닌 것 같아요.”

고경아가 동의했다.

“그, 그게 좋을까요?”

아내가 결정하면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다.

손일석이 점잔을 떨며 말했다.

“김 교수, 새 차처럼 반짝반짝 잘 보관하고 있을게. SM 좋다는 소리 자자하니까, 관리만 잘하면 돌아왔을 때 똑같은 차를 보게 될 거야.”

의외로 꼼꼼한 구석이 있는 손일석이었다. 자신의 차처럼 관리할 것이 분명했고, 유학에서 돌아와 또 차를 산다고 돈 낭비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김지훈이 눈을 번쩍였다.

“좋아. 단, 조건이 있어.”

“조건? 무슨 조건?”

“유학 가기 전에 일석이 네가 혈관 파트 담당하는 모습을 봐야 해. 신기동 선생님께 확실하게 인정받으라는 말이야.”

두 달도 채 안 남았다.

신기동 교수는 이준영 교수와 상당히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제자라 여기는 손일석을 어여삐 보는 만큼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조건이다.

하지만 손일석이 반드시 돌파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달하면 전임, 조교수로 가는 길이 뻥 뚫릴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손일석이 눈가를 굳혔다.

결코 차와 맞바꾸는 조건이 아니었다. 써전 대 써전으로서 바라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손일석 자신이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네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잡은 일차 목표야. 혈관 파트만 보고 살았는데, 그 정도도 못하면 펠로우 할 자격 자체가 없을 거야. 두고 봐.”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결의를 다졌다.

결국 잔머리 굴리며 짐을 덜고자 했던 손일석이 차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이런 모습은 정말 즐겁다.

다들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데다 새 차 냄새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속 쓰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어깨가 축 처진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석아, 당직도 일주일에 한 번꼴이라 한결 여유가 있으니까 나하고 함께 노력하자.”

뭔가 싸한 느낌에 손일석이 부르르 어깨를 떨면서도 SM520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억울하긴 하지만 이것도 유학 가기 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긴 했다. 하필이면 이제 막 펠로우 시작한 동서, 손일석이 관련됐을 뿐이다.

***

봄날 초반의 쌀쌀함이 서서히 사라지며 포근한 날이 이어졌다.

다들 각자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지훈에게도 3월 중 이뤄야 할 목표가 여럿 있었다.

일단 송진우와 강병옥이 라파로 집도를 할 정도의 실력과 기본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고지가 멀지 않아 더욱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진우야, 담낭관 박리를 못하면 담낭 동맥 박리는 시도조차 할 수 없어. 의욕만 앞세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기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길은 노력밖에 없다. 이제 곧 4월이야. 확실하게 하자.”

강병옥은 신현수가 눈에 불을 켜고 가르쳐 굳이 휴게실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리틀 이준영이란 별명까지 얻었는데 다행이었다.

펠로우로서 확실하게 나갈 수 있도록 손일석의 손을 풀어 주는 일 또한 중요했다. 스스로 방심하지 않고 자신을 다잡을 손일석이었지만, 하루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간이식 수술을 앞뒀다.

전공의와 달라 무척 고민스러웠는데, 신기동 교수가 월요일 아침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금상첨화, 일까지 줄여 주었다.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김지훈, 앞으로 혈관 수술은 일석이하고 진행할 테니까 이틀에 한 번씩 들어와. 대신 이준영 선생님과 네 정규 수술에 빠짐없이 참가하게 하고, 당직 때 신경 바짝 써.”

“알겠습니다.”

숨은 의도가 명백하게 보였다.

두 눈 속에서 7개의 날이 번쩍이고 있었다. 신기동 교수는 혈관 수술만이 아니라 간이식까지 하루라도 빨리 손일석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손일석 앞날 정말 험난하게 생겼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신기동 교수가 직접 실전을 관장한다면 이론을 무장시켜야 한다. 겸사겸사 간이식에 대한 지식을 한층 심화시킬 기회기도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손일석이 강한 긴장을 내보이며 이를 악물었다. 스승의 의도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겠지만 실망을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오늘 내 당직인 거 알지? 경아 씨도 이해해 주는 날이니까 수술 중간중간 간이식에 대해 토론해 보자. 준비해.”

자료를 받은 지 하루도 안 지났다.

하루 종일 수술 방에서 살아야 하는데 언제 준비하라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결론은 하나, 식사 시간을 줄여서라도 공부하라는 말이었다.

김지훈과 동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마지막 목표가 남았다.

유학과 관련돼 사활을 걸어야 할 일이었다.

기본을 깔아야 할 영어 회화가 아니다.

바로 고경아의 선발 시험 합격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민감하게 다가왔다. 만일 원치 않는 결과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아 씨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것밖에 없네. 경아 씨, 당직 날만 이해해 줘요. 파이팅!’

시험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고경아가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닐 텐데 걱정한답시고 이것저것 물어봐야 부담만 줄 것이다. 조용히 지켜보며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적절한 처신일 것이다.

목표를 각인시키며 하루하루 치열한 생활을 이어 갔다.

어느새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이 가시권 내에 들어왔다. 더 이상 수술 팀 구성을 미룰 수 없었다.

동기 6명이 모두 모였다.

손일석이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근무 시작하고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게 처음이네. 뭔 놈의 일이 이렇게 많은지 펠로우 하다 과로사로 가겠다. 역시 칼이 난무하는 강호는 험난해. 특히 나의 우상 신기동 선생님 때문에 더 험난해.”

오성민과 김경수가 웃기만 했다. 자신들도 힘들어 죽겠지만 손일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가장 살벌한 교수 두 명에 일복 터진 교수 두 명과 매일 얼굴을 맞대니,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신현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힘든 거 알지만 교수 인원이 늘어서 전보다 일이 적어졌다는 사실 잊지 마. 지훈아, 간이식 수술 팀은 어떻게 정하실 것 같아?”

“나라고 정보가 있겠어? 확실한 사람은 이준영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밖에 없잖아.”

이경석이 힐끗 손일석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냉정한 말이지만 수술 팀 구성이 크게 달라질 리가 없어. 신기동 선생님 성격을 생각하면 절제된 간 처리조차 신중하게 결정하실 거야.”

모든 시선이 손일석에게 집중됐다.

과연 3주도 안 된 시점에 정식으로 간이식 수술 팀의 일원이 될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손일석도 자못 기대가 컸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왜 다들 날 봐?”

“몰라서 물어?”

“나야 간 처리만 맡아도 감지덕지지, 뭐. 지훈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손일석과 가장 많이 부대낀 김지훈이었다.

확실한 사람은 둘뿐이라고 했지만 내심은 달랐다.

혈관 수술을 함께하고, 은연중 손일석이 간이식 이론을 잘 준비하고 있는지 시시때때로 묻고 있는 신기동 교수였다. 손일석 또한 눈이 시뻘게질 정도로 각고의 노력을 기하고 있었다.

김지훈 이상으로 손일석의 생활을 잘 알고 있는 동기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단단해지고 있었다.

‘당직 때 수술하는 손을 보면 솔직히 성민이나 경수와는 달라 보여. 스승님이나 신기동 선생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만일 내가 집도한다면…….’

교수들의 결정을 알 수 없지만 수술 팀을 직접 꾸려야 한다면 결론은 자명했다. 동기들 중에서는 단연 신현수, 이경석, 손일석을 꼽을 수 있었다.

굳이 희망 섞인 전망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불평할 손일석이 아니었다. 도리어 더욱 강한 각오로 덤벼들 것이다.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야. 지금까지 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아마 이번 주 마지막 혈관 수술을 보고 결정하실 것 같아.”

이경석이 상당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혈관 수술이라면 일석이가 퍼스트를 설 수도 있다는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냥 내 추측이에요. 하지만 가능성은 있죠. 일석아, 오늘 혈관 수술 내가 하는데 집중하자.”

신현수의 입장이 묘해졌다.

일단 김지훈은 무조건 퍼스트 예약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다.

언젠가는 손일석이 간이식과 혈관 수술의 핵심적 역할을 하겠지만, 이제 펠로우가 됐기에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동기지만 라이벌이기도 했다.

애매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손일석에게 몰렸던 시선이 신현수에게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손일석, 난 파트가 다르다고 해서 양보하지 않아. 경쟁이나 승부를 원한다면 언제든 받아 줄게.”

전임이 펠로우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손일석의 눈이 전에 없이 진지해졌다.

“전임에 경험까지 있다 이거야? 좋아. 나도 내 밥은 확실하게 챙기는 사람이야. 계급장 떼고 정정당당하게 붙어 보자.”

각오만 갖고 될 일이 아니었다.

손일석이 혈관 수술 내내 김지훈에게 매달렸다. 어느 부분이 미진한지 묻고 또 물었다.

역시 의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동기 둘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휴게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마침내 간이식 수술에 관련된 의료진이 모두 모이는 날이 다가왔다.

신기동 교수가 오전 회진을 앞두고 김지훈을 비롯해 동기 4명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었다. 오성민과 김경수도 무척 궁금한지 귀를 바짝 열었다.

“김지훈, 수혜자 수술 퍼스트 서.”

예상대로 일순위로 결정됐다.

“공여자 수술 퍼스트와 간 처리 담당은…….”

매서운 눈길을 따라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손일석은 물론 김지훈도 은근한 기대에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과연 누가 공여자 수술 퍼스트를 서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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