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42화 (942/1,329)

8화. 지금만 같아라 (1)

결코 남 일 같지 않았다.

심각한 기색으로 신현수의 지적을 듣는 강병옥을 보며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아무런 대비 없이 탈 수는 없지.’

탈 때 타더라도 예방책 정도 하나 들고 있어야 난관을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지훈과 신기동 교수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때였다.

물론 실력은 기본으로 깔아야 한다.

신현수의 매서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오하석이 픽스턴과 함께 응급실 환자를 노티했다.

“비장 손상이 의심된다고? 바이탈은?”

“내원 당시 100/80이었는데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알았어. 빨리 내려가서 바이탈부터 잡아.”

강병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벌하게 탔으면 그만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한참 배워야 하는 써전에게 다른 보상은 없었고, 선배 의사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번 환자도 칼 잡아. 똑바로 하자.”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다닥 응급실로 뛰어 내려가는 강병옥이 이를 악물었다. 비장 절제술이 휙휙 머릿속을 스쳤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기회와 경험을 절대 날릴 수 없었다.

“일석아, 힘들었지? 한동안 이렇게 살아야 할 거야. 그만 퇴근해. 네 눈 보니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사실 쓰러져 죽을 지경이었다.

후배들이 준 강력한 자극이 아니었으면 벌써 대자로 누워 시원하게 코를 골았을 것이다.

병원을 나서던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성민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야?”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인지 모를 리 없었다.

“현수가 전화했어. 어쩐지 어젯밤 내내 불안하더라. 넌 완전히 날밤을 샌 몰골이다.”

“휴게실 조심해.”

뚱딴지같은 소리에 의아해하는 오성민을 뒤로한 손일석이 집으로 향했다.

‘현수하고 부딪칠 일이 있나? 당연히 있겠지? 에휴! 군대에서도 총 한번 제대로 안 잡았는데 사방이 지뢰네.’

가는 내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일반외과 의사로서 첫 근무를 시작했을 때, 첫 집도를 했을 때의 각오와 긴장과 집중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길이었다.

파이팅!

천장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고경희가 방문을 열다 말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일석이 그새 곯아떨어졌다. 언니에게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3월 2일 아침이 밝았다.

무수하게 많은 일이 벌어지는 날이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정식으로 조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단순한 종이 쪼가리 한 장이 아니었다. 의대부터 시작해 써전의 꿈을 안고 도합 14년을 달려온 결과물이었다.

오늘부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신분이 보다 안정되고, 월급봉투도 조금은 더 두둑해진다. 그만큼 권한과 책임 또한 막중하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신경 쓰게 되는 다른 사람의 시선 역시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형, 액자에 넣어서 평생 보관해야겠어요.”

“그럴 가치가 있지. 현수도 함께 임명됐으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미안해.”

신현수가 마음에 걸렸지만 모든 면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조교수라고 으스대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 할 일을 다 하면 눈총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후우! 내가 조교수라니!’

어쨌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3명 더 있다.

몰골은 제각각이었지만 손일석, 오성민, 김경수의 얼굴에 하나같이 기대와 흥분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절대 꽃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이혁민 교수에게 펠로우로서 해야 할 일을 들을 때는 상당히 심각해져야 했다. 슬슬 어깨에 걸리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응급실 보고는 펠로우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라. 김지훈, 신현수, 니들은 보고하는 날에만 일찍 출근했지?”

원장이라 일 없다고, 자청해 보고를 받은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쟤들은 맨날 같이 출근해서 보고만 번갈아 했지. 피곤했을 거야. 힘들었을 거야. 펠로우들아, 너희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마. 절대. 알았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손일석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잊고 있었던 반어법이 날카롭게 스쳤다.

‘천천히 하라는 말씀보다 더 무섭네.’

신현수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이런 일도 다 배워야 잘하는 법이다. 동기라고 뻗대지 말고 확실하게 들어야 한다. 확실하게. 펠로우들아, 알았지?”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퍼졌다.

매일 다 같이 일찍 출근하란 말이었다.

일도 없는데 공연하게 던진 말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정시 출근을 고집하면 의외로 많은 일이 꼬이게 된다. 진료와 수술만 하면 되는 입장이 아니니 말이다.

“응급실 보고는 그렇게 하고, 근무는 각 파트에서 정한 대로 따르면 된다. 당직은 어떻게 할까?”

이번에는 김지훈이 나섰다.

“오성민 선생은 지동훈 선생님, 신현수 선생 당직 때 서고, 김경수 선생은 박승준 선생님, 이경석 선생 때 서면 사흘에 한 번씩 딱 맞습니다. 손일석 선생이 혈관 파트라 문제지만, 오창도 선생님과 제가 설 때 서면 될 것 같습니다.”

“주말 당직은?”

“당분간 3주마다 한 번씩 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빨리 궤도에 올라서려면 그게 좋겠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수술 욕심이야 다들 왕성하지만 당직은 상황이 다르다. 각자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앞날을 예측했다. 김경수의 얼굴이 편안해지고, 오성민은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남은 한 명의 얼굴색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 하오문주를 자처하며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입수했던 손일석은 그야말로 폭탄 맞은 얼굴이었다.

‘지훈이에 오창도 선생님?’

최악의 조합이었다.

당직 날은 무조건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말과 평일 당직이 제대로 겹치면 나흘이나 서야 한다. 가빠지는 숨과 시뻘게지는 눈가를 감추느라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판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가장 친하다는 죄 하나로 일복이란 놈도 전염되는 모양이었다.

“손일석, 혈관 수술은 주로 오후나 저녁에 있으니까 오전에는 내 수술 들어와.”

“예? 예, 알겠습니다.”

“김지훈, 소아 수술은 어떻게 할 거야?”

“정규 일과 중에 가장 시간이 많고, 정교함 등을 고려할 때 혈관하고 통하는 면까지 있어서 손일석 선생이 적임자로 생각됩니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눈빛, 신기동 교수의 만족스러운 표정, 밝게 웃는 김지훈의 친절한 얼굴은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손일석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칠지도에 리틀 이준영도 모자라 가공할 화염방사기까지 매일매일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네 쌍의 시선이 손일석에게 집중됐다.

이준영 교수, 신기동 교수, 김지훈, 오창도.

웃고는 있었지만.

‘살려는 줄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소리 없는 절규가 퍼졌다.

누구는 온몸에 힘이 쫙 빠졌는데, 병동 분위기는 예상치 못한 생기로 활력이 넘쳤다.

1년 차의 부담과 긴장에서 해방이라도 된 것처럼 밝은 미소를 머금은 단발머리, 오하석의 웃음이 신임 1년 차들과 미묘한 대비를 이뤘다.

4년 차 치프들의 위엄은 또 다른 묘미였다.

날고 뛰어 봐야 전공의다.

송재덕 교수의 말 몇 마디면 족했다.

“이제 진짜 치프구나, 치프. 우리 하석이도 2년 차가 됐어? 세월 참 빠르다, 빨라. 천천히 하자, 천천히. 우리 1년 차들도 한 달 후면 집도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하자. 천천히.”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허허허!”

반어법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통하는 전매특허였다.

교수, 신임 펠로우부터 전공의 1년 차에 인턴까지 수많은 의사가 마치 해가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어제와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는 생활이지만 마음만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달리자!

이제부터 조교수다!

카르페 디엠!

***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입장과 위치가 고만고만하면 모두 힘들다. 김지훈 이하 조교수 입에서 단내가 났고, 펠로우들은 죽어났다.

손일석은 하루가 다르게 망가졌다. 겉모습에 국한된 일이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손일석, 내일 간 절제 있다. 확실하게 준비해.”

“손일석, 오늘 혈관은 나하고 들어가자.”

“일석아, 소아과 컨설트 났어. 오후 회진 돌기 전에 들를 거니까 잊지 마.”

엎친 데 덮친다고, 간신히 쉴 시간이 난다 싶으면 꼭 폭탄 하나가 더 터졌다.

“손일석 선생, 혈관 수술 있나?”

“무슨 일인지 오늘은 없습니다.”

“잘됐네. 내가 당직인 거 알지? 내과에서 전과된 환자 수술 있어. 회진 끝나고 바로 이어서 하자.”

오창도 일복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육신의 피로는 풀 방법이나 찾을 수 있겠지만, 정신적 피로와 부담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날마다 들르는 휴게실.

‘우욱! 스승님은 도대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신 걸까? 감당이 안 되네.’

쌍코피 터지는 주말 집담회.

‘이준영 선생님은 아직도 배가 고프신가? 지훈아, 너까지 왜 이래? 나 좀 살려 줘.’

맞은 곳 또 맞는 고통을 누가 알까?

당분간이겠지만 펠로우에게 집도와 퍼스트 기회를 뺏길 수밖에 없는 전공의들의 살벌한 눈초리까지.

그러나 이를 악물고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교수들의 실력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 열외다.

문제는 동기들이었다.

실력을 인정한 지 오래였지만, 막상 수술이 지속되자 얼마나 뒤처졌는지 뼛속 깊이 실감했다. 김지훈은 가히 발군이었고, 신현수와 이경석도 몇 발 훌쩍 앞서 있었다. 솔직히 무섭게 치고 올라온 후배들을 걱정할 처지였다.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점점 다크서클에 침식돼 가는 얼굴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하소연 들어 줄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

“경희야!”

“어떡해. 이제 일주일 지났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어.”

“경희야, 우리 결혼 전에 지훈이 집에 얹혀살 때 지훈이 얼굴 봤지? 이 정도는 아니었지?”

“오빠보다는 형부 얼굴이 한결 나았죠.”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김지훈 몰골이 어땠는지 싹 잊은 모양이었다.

하긴 기억한다고 해도 손일석의 변화가 훨씬 눈에 크게 보이고, 마음 아플 것이다.

두 손 맞잡고 눈물 줄줄 흘렸다.

주말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잠자기였다.

일요일 저녁.

첫 주 근무를 무사히 마쳤다고 김지훈, 고경아가 밥 사 준다는 연락을 해 왔다.

만사가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손일석이 무슨 생각인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이렇게 일하다간 제명에 못 산다. 신기동 선생님에 대한 대비책을 지금 썼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야. 일단 미뤄 두고 지훈이부터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자.’

부부가 마주 앉았다.

손일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가만히 보니 김지훈도 자신의 몰골과 다르지 않았고, 고경아 역시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고경희만 멀쩡했다. 희연이가 재롱을 떨지 않았다면 넷 중 셋은 밥 먹다 말고 졸았을 것이다.

“처형,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시험 준비가 만만치 않네요.”

“일석아, 말도 마. 우리 경아 씨 요새 거의 잠도 못 자고 시험 준비하고 있어. 오늘도 사실 나는 한 시간이라도 더 자라고 반대했는데, 경아 씨가 세상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나왔어. 나보다 널 더 챙긴다.”

‘마음은 고맙지만 초장부터 불리해지네.’

“김 교수, 당직도 아닌데 꽤 피곤해 보인다. 사람 피곤하면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문제가 많지. 내가 예전에 김 교수 볼 때마다 걱정 무지하게 했잖아. 기억나지?”

‘네가 언제 걱정을 했어?’

‘지훈아, 말만 안 한 거야. 나 강호의 도의를 아는 손일석이야. 우리 조금만 서로 양보하자.’

팽팽한 눈빛이 오고 갔다.

왠지 점점 불리해지는 분위기에 손일석이 말을 돌렸다.

“근데 제대로 못 쉬었어? 무슨 일 있어?”

“일이 있을 게 뭐 있어. 집안일 조금 했지. 그것도 그거지만, 너 빨리 확실한 펠로우 돼야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조금 바빴어.”

“아! 날 위해서.”

‘일부러 준비 안 해도 돼, 인마.’

‘1년 내내 탈래?’

“경수하고 성민이 엄청 열심히 하니까 방심하지 마. 유학 가기 전에 신기동 선생님께 칭찬받아 웃는 모습 보고 싶다. 그래야 혈관 파트가 빨리 네 것이 되지.”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어제오늘 잠 푹 잤지?”

손일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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