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리 와. 살려는 줄게 Ⅱ (2)
픽스턴의 등장은 가뜩이나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 해마다 신임 1년 차가 들어오지만 그로 인해 분위기가 일신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평생 배우면서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바로 의사다.
모두가 스승이자 제자다.
도제 교육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단 일 년 위라도 스승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근거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 소리를 들어도 무방할 고성문은 아직도 젊은 시절 이상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대가라는 소리를 듣는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는 여전히 교수실 불을 환하게 밝히는 날이 적지 않았다. 김지훈을 살벌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였다.
살 떨리는 교육을 받은 김지훈은 아직도 계단을 달리고 있다. 환자와 동료에 관한 일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함께 고민하고, 해결했다.
그것이 바로 송진우와 강병옥을 비롯해 모든 후배들을 혹독하게 수련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로.
“김지훈, 오늘 수고했다.”
“송진우, 강병옥, 내일은 다음 과정 진행하자.”
“병옥이는 내일 안 돼. 비만 수술 들어와야 돼.”
“상수야, 하석아, 픽스턴 교육 확실히 시켜. 우리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니잖아. 자식들이 잘할 수 있으면서 왜 이래?”
일과가 끝난 후 듣는 마지막 한마디에 담긴 마음이 아니었으면 누구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일을 후배에게 미루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에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것이다.
유학은 확실히 특혜였다.
김지훈에겐 유난히 행복한 나날이었다.
사실 수술, 진료, 교육, 당직에 외조까지 몸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수고했다는 스승의 말 한마디, 고맙다는 고경아의 눈빛,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후배들을 보면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경아 씨, 오늘 공부할 거 많아요?”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네요. 불안해 죽겠어요.”
“남들도 똑같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야! 노트 보니까 복습이네. 역시 우리 와이프야.”
고경아가 힐끗 눈길을 주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은 반쪽인데 뭐가 이렇게 좋아요? 난 미안해 죽겠는데.”
“하하하! 그런 일이 있지요. 스승님과 신기동 선생님이 툭하면 격려의 말씀을 던지시는데 어떻게 힘이 안 나겠어요?”
“툭하면?”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이삼 일에 한 번인가? 어쨌든 한 달도 더 남았으니까 초조해하지 말고 힘내요. 파이팅!”
간만에 마주 앉아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고경아도 잠시 쉴 요량인지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요즘 들어 머리를 뻗대던 희연이가 옹알거렸다.
“아, 아- 구.”
“어머! 어머! 희연아!”
헉! 드디어 뭔가 말을 했다.
분명히 ‘아’로 시작하는 소리였다.
이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경아 씨, 지금 아빠라고 한 거 들었죠? 희연아, 아빠다, 아빠. 다시 해 봐, 다시.”
난리법석을 쳤지만 희연이는 끝끝내 이어져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교육은 병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감동은 잠시 접어 두고 자식 교육에 들어갔다.
고경아가 연신 고개를 뺐지만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희연이의 집중을 위해서도 얼굴이 두 개면 안 된다.
“희연아, 아빠다. 아빠! 아빠! 아빠!”
“꺄르르르! 브브브브!”
하라는 말은 안 하고 침만 튀겼다. 그도 잠시, 아빠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하품을 하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부터 자장가는 아빠 소리다.
벅찬 감동과 함께 아빠라는 단어만으로 가락을 만들어 흥얼거렸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모든 걱정과 시름이 사라졌다.
‘벌써 6개월이 됐네. 희연아, 아빠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아빠 소리부터 해야 한다. 경아 씨, 꼭 붙어야 합니다. 희연이하고 경아 씨 없는 유학은 생각도 못하겠네요.’
함께 있을 때는 모르지만 떨어져 지내면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때론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모양이다.
***
출근길이 즐겁다.
이철우가 퇴원했고, 이상옥은 거부 반응 없이 차근차근 회복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과 함께 낚시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만 같아라. 3월에 예약된 두 번째 간이식 수술도 잘되겠지? 유학 떠나기 전에 두세 건만 더 했으면 좋겠다.’
좋은 일, 기쁜 일, 벅찬 일이 모두 더해져 덩실덩실 어깨춤이 날 지경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냈고, 드디어 2월 마지막 날도 끝을 보였다.
당직이다.
환자가 없을 수 없다.
요란한 경광등 소리와 함께 외상 환자가 실려 왔다. 땀을 뚝뚝 흘리며 응급 처치를 하는 송진우를 보던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짓다 말고 흠칫 놀랐다.
펠로우 시작할 친구들이다!
손일석, 김경수, 오성민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언제 왔어? 아! 내일부터 근무 시작이구나.”
손일석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김 교수님, 내일은 3.1절입니다. 하루 쉬고 모레부터 근무 시작합니다. 언제나 환자를 몰고 다니시는군요. 오늘도 밤새 쭈우욱?”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휴일도 챙기고 좋겠다.”
“마지막 휴일일지도 모르는데 좋긴 뭐가 좋아. 남은 하루 잘 쉬고, 우리 김 교수님 말씀을 금과옥조 삼아 열심히 살아야지.”
마지막 휴일과 금과옥조?
코를 골면서 듣긴 들은 모양이었다.
펠로우 근무 빡세게 할 각오가 보였다.
생각 잘했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신기동 교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얼마 안 남은 두 번째 간이식 수술이 뒤통수를 때렸다.
‘살려는 줄게.’
뜬금없이 왜 떠오르는지 모르지만 가장 관계가 깊은 손일석이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분명했다.
때마침 수술 준비가 다 끝났다.
송진우가 꾸벅 인사를 하며 노티했다.
“여어! 4년 차 치프! 잘 부탁한다.”
손일석이 김지훈 속도 모르고 너스레를 떨었다.
“경수야, 성민아, 모레 보자. 근무 시작하자마자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할 텐데 스케줄은 확인했어?”
“과장님이 이번 주는 참관부터 하라고 하셔서 이론 준비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렇구나. 위장관하고 대장 파트는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니까 현수하고 경석이 형과 잘 상의하셔. 일석아, 넌 따라 들어와.”
“나?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싫어?”
“오늘 짐도 정리해야 하고, 군복에 땀도 안 말랐어. 며칠은 숨 좀 돌리면서 쉬는 게 인지상정 아냐? 정식 근무 시작 전인데 오늘 하루만 봐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3월, 4월, 5월.
채 3개월도 남지 않았다.
김경수나 오성민과 달리 혈관 파트를 책임져야 할 수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손을 풀어야 하고, 이미 들은 말도 있었다.
‘처제가 정리 다 했다고 했는데 어디서 뻥을 쳐?’
“그래? 짐 정리해야 하는구나. 마음대로 해.”
툭 한마디만 던지고 송진우와 함께 수술 방으로 향했다.
멀뚱멀뚱 뒷모습을 보던 손일석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발을 뗐다.
‘지훈이가 유학 가기 전까지 계속 혈관 파트를 맡는다고 했지? 수틀리면 수술도 안 줄 자식인데 머리 숙이는 수밖에 없나? 대장부라면 일어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경수야, 성민아, 미안하다. 술은 다음에 하자.”
“너 빠지면 무슨 재미로 먹어? 할 얘기도 많잖아.”
“맨정신에 하자. 너희들도 지훈이 잘 알잖아. 환자와 수술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손아래 동서인 건 하늘이 내린 저주야.”
홀로 수술 방행이다.
‘처형하고 경희가 아삼육이니까, 지훈이 저 자식이 할 일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어후!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고 하얗게 불태우려고 했는데 망했네.’
어느새 마취가 시작되고 있었다.
허겁지겁 손 씻고 들어간 손일석이 입맛만 다셨다.
‘인사하러 들른 사람 잡아 놓고 참관만 시켜? 김지훈, 친구이자 가족인 나한테 이러면 천벌받는다.’
째려보던 눈길도 잠시, 이내 수술에 집중했다.
띠띠띠띠띠띠!
급박하게 울리는 심박동 소리와 흔들리는 심전도.
삐이이이! 삐이이이이!
날카로운 보비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풍기는 사람 특유의 피 냄새.
바닥에 쌓이는 피에 젖은 거즈.
따르륵! 따가각!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한 기구 조작 소리.
“수처! 타이! 거즈!”
묵직하게 전해지는 수술 팀의 긴장.
손일석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서서히 써전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
수술실에 두 발을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고향 땅을 밟은 것처럼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급박하게 흔들렸던 바이탈이 잡히고, 마침내 눈을 뜬 환자는 흥분과 경이였다.
‘앞으로 평생 내가 가야 할 길!’
너무 멀리 봤다. 일단 오늘 밤에 눈은 붙여야 내일도 있을 것이다.
허망한 바람이었다.
김지훈과 함께 응급실과 수술실을 오가는 사이 3.1절 아침이 밝았다. 우두둑우두둑! 돌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목을 주무르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9시였다.
밤새 수술했는데 아직도 침대에 환자 한 명이 누워 있다. 빠른 수술이 필요한 복막염 환자였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었다. 무작정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훈이 저 자식 일복은 도대체 언제 사라지는 거야? 아니다. 혈관 환자는 팍팍 몰고 와라. 설마 수술하다 죽겠어?’
손일석 감 많이 떨어졌다.
그 이후에 닥칠 후폭풍이 문제지, 수술하다 피곤해서 죽는 의사는 없다.
물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의사 대부분 자신의 건강에 무관심한 면이 있다.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평균 수명이 짧은 경향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한 가닥 기대를 했다.
이제 곧 당직이 바뀔 시간이다.
“우리 신 교수는 왜 안 오시나? 진우야, 너도 병옥이가 기다려지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현수가 들어섰다.
벌게진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석이 너는 백 퍼센트 붙잡힐 줄 알았어. 지훈이 당직인데 인사는 나중에 하라고 말해 줄 걸 그랬나?’
신현수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만 하고는 곧바로 환자를 진찰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김지훈이 옆을 지켰고, 송진우는 자동적으로 붙잡혔다. 어느 틈엔가 강병옥이 신현수 옆을 바짝 지키고 있었다.
진찰이 끝났다.
“현수야, 수고해. 휴일인데 고생이다.”
김지훈이 가운을 벗으며 눈을 비볐다.
이로써 송진우도 치열했던 당직에서 해방됐다.
슬그머니 기지개를 펴며 가운 단추를 풀던 손일석이 화들짝 놀랐다.
“가려고?”
어째 억양이 수상쩍었다.
“응? 나는 아직 근무 시작도 하기 전인데…….”
“피곤하다! 지훈이하고 당직을 섰으니까 피곤하겠지. 그래도 몸이 피곤한 게 낫지 않아? 펠로우 생활 평탄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손일석의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오성민이 위장관 펠로우인데, 왜 신현수까지 혈관 파트 펠로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그것도 김지훈과 쌍으로 말이다.
“선생님, 환자 올리라는 연락 왔습니다.”
“알았어. 지훈아, 아직도 안 갔어? 피곤할 텐데 빨리 퇴근해. 잠 좀 푹 자. 눈이 시뻘겋다.”
‘이 자식들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손일석의 의문도 잠시.
신현수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강병옥과 수술 방으로 향했고, 김지훈은 무슨 일인지 조용히 눈길만 주고 있었다.
‘살려는 줄게.’
무언의 무시무시한 압박이었다.
몸이 피곤한 것이 낫다는 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주춤주춤 망설이며 끝까지 저항하던 손일석이 결국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복막염 수술 끝나고 자면 되겠다. 난 간다.”
‘똑같이 밤샜는데 나는 수술 들어가고 너는 자겠다, 이 말이지. 나쁜 놈! 무정한 놈! 이기적인 놈! 강호의 도리를 저버린 놈!’
투덜투덜 이를 갈며 수술실로 들어간 손일석이 눈가를 찡그리며 수술을 지켜보았다. 먹구름처럼 몰려오던 졸음이 한 걸음 살짝 비켜서기 시작했다.
‘병옥이가 칼을 받았네. 어제 진우도 수술 무지하게 잘하던데 병옥이는 또 어떨까? 동기, 후배 할 것 없이 너무 빨리 발전해.’
4년 차 치프의 복막염 수술이다.
단순 위궤양 천공이 원인이었다.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어젯밤에 이어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수술을 진행하는 손이 송진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제 갓 4년 차 된 전공의 손이 아니었다.
강병옥과 송진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교수들은 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동작 하나하나에 다 담겨 있었다. 후배들이 던진 연이은 강타에 확연한 긴장이 느껴질 정도였다.
‘춥다, 추워. 이러다 후배들한테도 추월당하겠네.’
눈 껌벅거리는 사이 수술이 끝났다.
신현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강병옥이 까딱까딱 손가락을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모른 척하고 뒤따라 들어간 손일석이 입술만 오물거렸다. 휴게실에 감춰진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휴게실 표시 떼어야 하는 거 아냐?’
“강병옥, 김지훈 선생이 너하고 진우한테 라파로 준다고 했다며?”
“예. 4월쯤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손일석이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뭐? 4년 차 초반에 라파로를 준다고? 어후! 얘들 실력이 그 정도였어?’
“이래서 받을 수 있겠어? 수술의 기본은 라파로가 아니라 개복이야, 개복. 진우만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 파트 펠로우 한다는 놈이 위도 정확하게 다루지 못하면 어떻게 해?”
찬바람이 휙휙 불었다.
김지훈은 송진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더니 신현수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강병옥의 반응을 봐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지훈이나 현수나 교수님들이 태우는 기술까지 고스란히 배웠네. 점점 추워진다. 앞날이 정말 험해.’
손일석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