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40화 (940/1,329)

7화. 이리 와. 살려는 줄게 Ⅱ (1)

드르렁! 드르렁!

정신없이 꿈나라를 질주하고 있었다.

손일석의 명백한 실책이다.

술기운에 올라타 코를 골 때가 아니었다.

친구지만 가족이 모이면 형님과 아우요, 직장에서 만나면 조교수와 펠로우 관계다. 신기동 교수가 손 제대로 만들라는 엄명까지 내린 이상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야 한다.

더구나 펠로우 때 어떻게 생활하고 적응해야 하는지 진지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세상 편하게 자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이 타 본 놈이 잘 태우는 법이다.

손일석보다 교수들에게 3년을 더 탔고, 급기야 장인어른에게도 탄 김지훈의 공력을 무시했다. 군 생활 중간에 맛본 불길을 잊은 것이 분명했다.

‘어라? 지금까지 누구하고 얘기한 거야?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감히 조교수 말을 허투루 들어? 두고 보자.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라. 살려는 줄게.’

각오에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근무 시작까지 남은 한 달 즐겁게 보내길 바랐다.

김지훈의 손이 닿는 한두 달로 끝날지, 이후에도 쭉 탈지 두고 볼 일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버티고 있는 한 후자일 것이다.

역시 가족의 힘은 강했다.

현실적 도움 이상으로 정신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유학 준비, 고경아의 시험, 육아 때문에 불안했던 부분이 많이 해결됐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로운 주를 맞았다.

자! 유학 가기 전까지 달리자.

혼자 달리면 예의가 아니다.

펠로우가 오기 전 일단 눈에 걸리는 후배들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야 손일석을 본격적으로 태워야 할 때 한갓질 것이다.

호시탐탐 라파로를 노리는 송진우와 강병옥이다.

철석처럼 믿지만 한 곳에 정신이 팔리면 다른 곳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환자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행여 있을 사소한 방심까지 고려해야 했다.

더구나 시간마저 촉박했다.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

“강병옥, 이철우 환자 어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이라고 해도 한 번은 나와 환자 상태를 확인하는 김지훈이었다. 게다가 바짝 신경 쓰고 있을 환자였고, 오하석에게 김지훈의 주말 출몰을 이미 보고받은 터였다.

“주말에 시행한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범위에 있습니다. 드레인은 깨끗하고, 창상 감염도 보이지 않습니다.”

“송진우, 이상옥 환자는?”

“바이탈 안정적입니다. 거부 반응을 의심할 수 있는 소견은 관찰되지 않았고, 황달 수치가 낮아지고 있어 간이 제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둘 중 하나는 분명 오프였을 텐데 막힘이 없었다. 보고 내용도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방심할 후배들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팔짱을 끼며 송진우와 강병옥을 보았다.

이혁원과 나종진을 가르친 방식 그대로 하면 되겠지만 시간을 상당히 당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에게나 배우는 사람에게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결정했다.

진지한 기색에 다소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빠르게 진행해도 다른 문제는 없겠어.’

“송진우, 강병옥, 앞으로 라파로 들어올 상황이 되면 다 들어와. 순서대로 기구를 맡겨 볼 거야. 만약 단 하나의 과정이라도 노력 안 한 티가 나면 알지? 4월을 기대해 본다.”

강병옥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송진우는 결국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고 말았다.

이미 들었던 말이지만 구체적인 일자까지 나왔다.

앞으로 한두 달 남짓 지나면 집도의 자리에 서서 라파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불길이 타오르겠지만 지금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회진 돌자.”

강병옥과 시선을 교환하며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친 송진우가 바짝 뒤를 따랐다.

가장 먼저 들르는 병실은 정해져 있었다.

이상옥 환자다.

그 시간 강병옥도 신현수와 함께 이철우 환자 병실에 들어섰다. 꼼꼼하게 상태를 확인한 신현수가 병실을 나오며 난데없는 말을 했다.

“강병옥, 펠로우 지원할 거야?”

“예. 지원할 생각입니다.”

“어느 파트?”

그동안 이혁민 교수에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두말할 것도 없었다. 최철한이 유방과 갑상선 교수로 부임하는 순간 확실하게 알았다.

“위장관 파트 지원할 생각입니다.”

“3월까지 한 달도 안 남았지?”

날짜를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갑자기 무슨 말일까?

강병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이혁민 선생님께 많이 배웠겠지만, 4년 차 치프는 모든 면에서 3년 차 치프하고 달라. 특히 펠로우 지원할 의사가 있다면 더 중요한 시기야.”

펠로우란 말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게다가 오성민 선생이 1년 먼저 시작하니까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병옥이 너보다 더 유리하겠지? 우리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고 말이야.”

전임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펠로우 보강이 필요한 파트가 많아 임용 자체가 안 될지도 몰랐다.

강병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은 없어. 다들 그렇게 말해. 결과는 4년 차 치프가 끝난 후 네 손이 알려 줄 거야. 참고로 오성민 선생은 천안 병원에서 칼바람으로 유명했던 선생이란 사실을 잊지 마. 무슨 뜻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긴장 팍팍 치솟았다. 마치 1년 차를 보는 것 같았다.

뒤돌아서는 신현수의 입가가 스윽 말렸다.

‘성민이는 지동훈 선생님과 함께 전통적 수술을 담당하고, 넌 내 뒤를 따라 라파로까지 집중하면 좋겠다. 최종 선택은 너희들이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해.’

전임 3명이 허구한 날 머리를 맞대면서 시시덕 노닥거리기만 했을 리 없었다. 김지훈의 유학으로 후배 교육에 차질이 불가피하기도 했다.

몇 번 얘기가 오갔고, 마침 응급실 보고가 끝나자마자 김지훈이 라파로 얘기를 꺼냈다.

내친김에 바로 결정했다.

최고의 써전은 우리만의 목표가 아니다.

혹독하게 교육시키고,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수 없다.

손일석, 김경수, 오성민은 근무도 시작하기 전에 명확한 표적이 됐다. 예비역이기에 전문의가 되면 바로 지원할 수 있는 송진우와 강병옥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갈고닦아야 할 사람은 다섯, 직접적으로 가르칠 사람은 세 명에서 곧 둘로 줄어든다.

결의를 다졌다.

“동기라고 봐주지 말고 확실하게 하자.”

불같이 태워 확실한 써전 만들어 보자고 파이팅까지 외쳤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전공의 3년 차였고, 오늘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진우는 간담도 지원이 확실하니까 경쟁도 없는데 지훈이가 어떤 식으로 말했을까? 경석이 형은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어서 걱정이네.’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신현수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송진우가 벌게진 얼굴로 오하석과 함께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누가 1년 차고 누가 3년 차인지 모를 정도였다.

“상수야, 환자 아직 안 내려왔어? 오늘 수술 밀렸는데 처음부터 늦으면 안 돼. 빨리 전화해 봐.”

강병옥도 수술 스케줄을 보며 전에 없이 강한 열의를 보였다. 머릿속은 이미 환자와 수술에 대한 정보로 확실하게 차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 자식들!’

씨익 으스스한 미소가 수술실 복도를 떠돌았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는 전임 3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단순히 전공의 교육을 넘어 후배 교육을 나누어야 할 펠로우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체감 자체가 다를 것이다.

월요일 첫 수술부터 지독한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결의를 내보였다.

‘살려는 줄게.’

공통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였다.

“송진우, 따라와.”

“강병옥, 너도 따라와.”

“지훈아, 진우 간만에 대장 수술 들어왔는데 나도 얘기 좀 하자. 자식이 라파로에만 눈이 팔린 것 같다.”

수시로 휴게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돌변하다시피 변한 분위기에 오하석과 차상수가 눈만 껌벅거렸다.

송진우와 강병옥은 얼굴을 굳힌 채 자신들이 작성한 수술 기록지만 보았다.

말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또 지나며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신임 1년 차가 결정됐다.

가장 뛰어난 성적을 보인 인턴 두 명이 3주 이른 근무를 시작했다.

앞으로 일반외과를 떠받칠 새로운 기둥이 김지훈과 신현수가 걸었던 픽스턴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하하하!

사실은 두 명 지원에 두 명 합격이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일반외과 환경이 최대 문제였다.

가뜩이나 힘든데 지원까지 줄어 전공의 근무 조건 자체가 최악이었다. 개고생을 하고 전문의를 딴다고 해도 돈과 무관한 과라는 사실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의사 역시 직업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수직을 지향하지 않는 한 당연할 일이었다. 그 와중에 두 명이나 지원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상당히 씁쓸한 일이었다.

픽스턴 근무 첫날, 전임 셋이 의국에 모였다.

“이젠 두 명 지원도 고마워해야 할 판이네. 이러다 한 명도 지원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비관적인 말이 아니었다.

몇몇 과는 전공의 없이 환자 볼 날이 곧 올 것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마당이었다. 실제 그런 날이 오면 외국에서 의사를 수입해야 할 것이다.

득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이경석이 입맛을 다시다 말고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지훈아, 후배들 교육시킬 때 눈에 힘 좀 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 별명 많은 건 아냐?”

본인이 알 정도면 후배들이 붙인 별명이 아니다.

“모르겠지. 다 떠나서 리틀 이준영이란 별명까지 있어. 그러니 애들이 지원을 하겠어?”

이건 좋은 별명이다!

반색하던 김지훈이 이내 콧등을 찡그렸다.

솔직히 평생 어렵고, 무서울 스승이었다.

제자도 이럴진대 정말 리틀 이준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면 후배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내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어떤 놈이 그런 말을 해요?”

“다 그래, 다. 앞으로 학생하고 인턴 볼 때 최대한 눈에 힘 빼고 활짝 웃어. 나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광고하란 말이야.”

‘경철이 이 자식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농담인 줄 빤히 알면서도 고작 두 명 지원이란 사실에 얼굴을 펼 수 없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까지 들었다.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농담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여. 이럴 때 보면 앞뒤로 꽉 막힌 것 같아. 별명이 리틀 이준영이란 걸 영광으로 알아. 무섭다고 아무한테나 붙이겠어?”

생각해 보니 또 그렇다.

은근 좋으면서도 은근 걱정이 됐다.

아마도 여러 의미가 섞인 양날의 검일 것이다.

이경석이 크게 웃었다.

“얼굴 풀어, 인마. 절대 나쁜 별명 아니야. 현수 말대로 영광이다, 영광. 픽스턴 보니까 그 시절이 은근히 그립다. 병옥이하고 진우가 잘 교육시키겠지?”

“상수하고 하석이도 있잖아요.”

“그래. 인원 부족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더 있어.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나가자.”

의국 문을 열고 나갔다.

스테이션에서 대기하고 있던 픽스턴 두 명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까마득한 선배이자 조교수를 보고 어려워하지 않을 후배는 없는 법이다.

인사를 받으며 눈길을 준 김지훈이 쩝쩝 입맛만 다셨다. 이경석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별명에 어떤 의미가 가장 강하게 담겼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경석에겐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던 픽스턴 두 명이 부동자세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리틀 이준영, 김지훈 선생님이다!’

‘내가 정말 무서운 거야? 후배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왜 이제야 보이지?’

속을 알 길이 없었지만 취할 반응은 하나였다.

김지훈이 최대한 활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다.”

픽스턴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써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지만 몸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밖에서 피상적으로 보면 오해하기 쉬운 법이긴 하다.

유학 가기 전 짧은 시간만이라도, 아니면 김지훈이 유학을 마친 후 단 한 달이라도 함께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선배 전공의들 역시 김지훈을 가장 어렵게 대하지만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한다는 사실을.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려는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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