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리 와. 살려는 줄게 Ⅰ (2)
고경아가 정리한 요약집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인기척도 못 느끼는지 묵묵히 자료를 넘기며 나직한 한숨만 내쉬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딸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아픔이 느껴졌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딸이다. 좋은 사위, 어여쁜 손녀를 얻는 일도 충분히 즐겁고 기쁘겠지만, 딸의 장래 또한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아픔 이상의 안타까움일 것이다.
왜 몰랐을까?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앉아.”
“예, 아버님.”
“언제 가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경아 씨 시험 결과가 3월에 나옵니다. 한두 달 준비하고 5월에서 6월 사이에 떠날 것 같습니다.”
“붙겠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반드시 합격할 겁니다. 실전과 관련된 문항이 많아 도리어 유리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길게 숨을 내쉰 고성문이 뒤돌아 앉았다.
왠지 죄스러웠다. 차마 정면으로 볼 수 없어 곁눈질을 했다.
유학은 이미 결정됐지만 고경아의 연수는 진행형이었다. 화를 내고도 남을 일과 격려가 필요한 일을 두고 똑같이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부모 없는 김지훈이다.
장인 장모는 사위를 아들과 다름없이 대했고, 사위 역시 부모처럼 생각해 왔기에 더욱 서운한 것이 당연지사다.
몇 달도 아니고 왕래조차 힘든 머나먼 타국에서 1년 넘게 머물러야 하는데, 전화 한 통 안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오 단단히 했다.
살짝 시선이 맞닿았다.
화가 나 이글거리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레짐작을 했을 뿐이었다.
장인어른의 눈에는 서운함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경아한테 얘기 들으니까 자네가 더 나서서 연수 시험 봐야 한다고 권했다고? 연락이야 지금 받으나 나중에 받으나 별일 아니지. 고맙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죄송합니다.”
“경아가 졸업 후에도 공부 욕심이 제법 있었어. 스승님과 후배들이 있어서 일단 병원이 어떤 곳인지, 간호사가 어떤 직업인지 알라고 취직부터 권유했지. 삼사 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네.”
목소리가 점점 나직해졌다.
“그런데 자넬 만난 거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반대하고 싶었는데 자넬 보는 순간 보내는 게 더 좋겠다 싶었어. 행복이란 놈이 한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 지금까지 후회할 일도 없었고, 도리어 잘 결정했다는 생각만 했네. 그런데 오늘 이 책들을 보니까 착잡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네. 부모가 돼서 자식 속을 제대로 몰랐던 거야.”
“저도 정말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르긴 뭘 몰라? 고마워. 우리 경아가 꿈을 따라갈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네.”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 때문에 자식이 선택한 길을 힘차게 밀어주고 있는 사위가 더욱 믿음직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연락 안 한 죄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몸 둘 바를 찾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장인어른의 마음이 담긴 말을 듣고 방을 나왔다. 고경아와 고경희도 장모님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서운하긴 해. 다신 이러면 안 돼.”
때론 간단한 말 한마디가 더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잔잔한 눈빛 안에서 배 아파 세상 빛을 보게 해 준 어머니가 보였다.
가뜩이나 가라앉았던 분위기 급전직하했다.
손일석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경위야 어찌 됐든 즐겁고, 축하할 일임은 틀림없었다.
고성문이 탁탁 박수를 쳤다.
“경사가 겹칠 텐데 분위기가 왜 이래? 대충 말들 나눴지? 식사하면서 못한 말 마저 하자. 손 서방, 뭘 먹을지 생각해 봐. 밥 먹다 체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그 전에…….”
헉! 속았다.
막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았던 장인어른의 눈빛이 스르르 되살아났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담긴 의미가 여러 가지일 수 있음을 간과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죽었다! 일찍 말씀드릴걸.’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전화 제때 안 한 죄 무척 컸다.
“김 서방, 최소 1년이야. 그동안 얼굴도 못 보는데 전화 한 통 미리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자네한데 그 정도로 서운하게 했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경아, 너도 그래. 연수 기회가 있으니까 망정이지, 김 서방 혼자 유학 갔으면 희연이 어떻게 키우려고 입 꾹 다물고 있어? 네 인생이 달린 일이면 부모도 알아야 돼. 그래야 뭐라도 미리미리 챙길 거 아냐?”
부부가 쌍으로 열심히 탔다.
주말 집담회를 비롯해 수시로 타왔건만, 장인어른의 불길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예전에도 호랑이처럼 무서웠을 이준영 교수마저 태운 의사의 공력 조금도 줄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무조건 잘못한 일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소나기 피할 방법이 없으면 흠뻑 젖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법이다. 무릎 꿇은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지만 자세를 바꾸지도 못했다.
끝이 아니었다.
“간이식 수술은 왜 연락 안 했어? 의사는 평생 배워야 하고, 써전에겐 참관도 의미가 얼마나 큰지 몰라? 라파로 좀 한다고, 나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야?”
시간이 갈수록 열정이 점점 더 끓어오르는 장인어른이었다. 잘잘못을 떠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후! 유학 말씀 안 드린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난감하네.’
그때 할머니 품에 잘 안겨 있던 희연이가 울먹울먹 칭얼거렸다. 급기야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울어 댔다.
무척이나 서럽게.
마치 우리 아빠 엄마 혼내지 말라는 것처럼.
역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다.
최문옥 여사가 희연이를 달래며 모처럼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가 혼나니까 우리 희연이도 슬퍼? 여보,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다 생각이 있어서 늦게 연락한 건데 이제 그만해요.”
나이 먹을수록 아내 말 잘 들어야 한다.
게다가 희연이가 할아버지의 눈길마저 외면했다.
딸자식, 손녀딸 이길 장사 없는 법이다.
눈앞에서 펄펄 화염을 뿌리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희연이를 어르고 달래며 입가에 환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희연아,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 혼낸 거 아니에요. 그냥 타일렀을 뿐이에요. 그만 울고 할아버지한테 와. 응?”
말 못하는 아이들이 도리어 눈치 귀신이다. 목소리 높인 사람한테 재롱 떨 리가 없었다. 몸이 단 고성문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결국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아버님, 희연이도 달랠 겸 식사하러 가시죠.”
고경아가 시험 준비하는 동안 물고 빨며 살았다. 그동안 아빠 품이 꽤 좋았는지 눈물이 가득한 희연이가 덥석 김지훈의 품에 안겼다.
‘기분 째지네.’
식당으로 가는 동안 슬슬 마음이 진정됐다. 타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일단 먹고 보자.’
그놈의 밥은 술술 잘도 넘어갔다.
고성문이 혀를 차면서 피식 웃었다.
유학과 연수에 집중됐던 화제가 희연이에게 옮겨 갔다.
미국에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를 걱정, 어려서 도리어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말, 영어를 더 잘하면 어떻게 하냐는 농담까지 할 말도 참 많았다.
어느덧 식사가 거의 끝났다. 고성문이 갑자기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김 서방, 미국 가기 전에 준비할 게 많을 거야. 필요한 데 보태 써.”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손사래를 칠 일이었다.
“아버님, 병원에서 기본 경비는 전액 나오기 때문에 따로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부모가 주는 돈은 잔말 말고 받는 거야.”
부모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봉투가 하나 더 있다.
“손 서방, 언제부터 근무야?”
“제대하는 대로 곧 정식 발령이 납니다.”
“집은 구했어?”
“이 근처에 구하려고 하는데 만만치 않습니다.”
“전세도 싸진 않겠지. 이거 받아.”
손일석이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도와주셔서 필요 없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경희가 찌릿찌릿 날카로운 눈빛을 날렸다.
살림 맡은 사람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한두 푼이 아닌 전세금에, 군대에서 받는 대위 월급 빤한데 10원 한 장이 아쉬울 것이다.
고성문이 고경희를 보며 웃었다.
“딸자식 키워야 다 소용 없다더니. 손 서방, 자네 때문에 주는 거 아니다. 우리 경희 잘살라고 주는 거야.”
손일석 앞에 있던 봉투가 휘리릭 방향을 바꿔 고경희의 손에 안착했다. 어차피 넘어갈 돈인데 손일석이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 튕긴 건데 바로 반응하시네. 아우! 중간에 살짝 만져서 비자금 만들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깝다.’
속으로 투덜투덜 후회막급인데 한 방 더 맞았다.
“김 서방, 신 교수가 와서 혈관에서 손 놓나?”
저절로 손일석에게 눈이 갔다.
‘손 만들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해 드릴까? 아니다. 어차피 펠로우 시작하면 내 손이 아니라 신기동 선생님 손에 죽을 텐데 남은 시간이라도 푹 즐겨라.’
“아닙니다. 간이식 수술을 시작하셔서 떠나기 전까지 혈관 파트 일을 해야 합니다.”
“잘됐네. 손 서방하고 친구이긴 하지만 엄연히 손윗사람이고, 병원에서는 상급자야. 확실하게 가르쳐. 손 서방, 자네 실력 좋다는 소리가 들려서 마음은 놓이네만 대학 병원은 다른 거 알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였다고 서운한 일, 조금 갑갑한 일 내뱉지 말고 확실하게 배워. 우리 때는 조교수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엄격했어. 펠로우도 다르지 않을 거야.”
정말 확실하게 교통정리 했다.
마음 놓고 태워도 후환은 없을 것이다. 물론 손일석은 결코 만만치 않은 친구이자 전문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자리가 정리될 상황이 아니었다.
뒤늦게 고경순, 서정호 부부와 정훈철, 한수임 부부가 도착했다. 어떤 말을 들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검사의 추궁은 엄했고, 방송인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식은땀 흘리며 술자리 하기는 처음이었다.
“김 교수, 유학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예, 형님. 꼭 자리 만들겠습니다.”
눈빛이 으스스했다.
‘오늘은 살려 줄 테니까 꼭 만들어.’
장인어른도 똑같은 눈빛을 보냈다.
“동서, 그런데 왜 안 마셔? 이런 날은 한잔해야지.”
“간이식 수술한 환자가 있어서 참아야 합니다.”
“조교수가 돼도 여전하네. 환자는 좋겠지만 자네 밑에 있는 전공의들 참 힘들겠어.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하여튼 난 어디 아프면 자네부터 찾을 거야.”
윗사람이 빡세게 일하면 아랫사람 몸 고달프기 마련이다. 병원, 검찰청, 방송국을 망라해 직장 생활 다 거기서 거기였다.
간신히 자리 정리했다.
손일석과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어지간히 먹었는지 대자로 뻗어 게슴츠레한 눈에 혀는 이미 꼬였다.
“지훈아, 간이식 수술 어땠어?”
“대단했지. 신기동 선생님 보니까 유학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배울 게 무척 많을 것 같아.”
“난 이제 시작인데 부럽다. 군대 3년이 얼마나 큰 벽인지 알지? 어떻게 하면 니들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제길! 시간 많아서 띵가띵가 놀고 다닐 때는 좋았는데, 펠로우 생각을 하니까 바로 후회가 되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인생이라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눈 풀릴 정도로 술 취한 놈이 말은 잘했다.
“빨리 따라잡고 싶어?”
“그걸 말이라고 해?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현수하고 경석이 형이 많이 도와주겠지? 그래야 돼. 그게 강호의 도의야.”
천하의 손일석인데 상당한 걱정과 불안이 느껴졌다.
스트레스 제법 받은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펠로우 근무가 눈앞인 상태다.
마음은 급할 텐데 혈관 수술은 전공의를 끝으로 정체된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김지훈과 신현수는 간이식 수술까지 참가했다. 손일석의 귀라면 이미 수술 결과와 수술 팀의 실력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몇 발 앞서 달리는 동기들을 보며 천하태평일 써전이 아니다.
엎친 데 덮쳐 스승으로 모시는 신기동 교수까지 왔다.
한마디로 비상이다.
‘자식! 많이 초조한 모양이네.’
다른 방법은 없다.
한동안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부어야 한다. 무척이나 아플 신기동 교수의 가르침을 달게 받고, 동기들의 살벌한 도움을 마다하면 안 된다.
“일석아, 내가 신기동 선생님께 혈관 수술 집도를 최대한 보장해 달라고 말해 볼게. 물론 그 전에 통과부터 해야겠지? 그러려면…….”
한참 동안 열심히 향후 계획을 말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손일석이 온다는데 고민하지 않았으면 김지훈이 아니었다. 이경석은 김경수에게, 신현수는 오성민에게 똑같이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알았지? 힘들더라도…….”
‘왜 계속 대답이 없어?’
눈을 돌리는 순간.
김지훈의 눈이 가공할 빛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