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38화 (938/1,329)

6화. 이리 와. 살려는 줄게 Ⅰ (1)

이제 곧 조교수다.

병원 생활 8년 결코 짧지 않다.

칭찬받기보다 칭찬하고 살아야 하건만, 아직도 전공의 1년 차 시절을 잊지 못하는 제자인 모양이다.

더구나 빡빡하기로는 누구나 울고 갈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칭찬이었다.

진한 감동이 몰려오며 어깨가 들썩거렸다.

신현수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냉정함을 유지하며 걸릴락 말락 입가와 눈가를 떠도는 미소만 보였다.

‘밀렸다! 어후! 저런 걸 배워야 하는데. 태연하게!’

안 되는 놈은 용을 써도 안 된다.

마음과 달리 입가에 환한 미소가 절로 걸렸다.

스승이 신현수에게 보인 기대는 곧 제자에 대한 기대와 다름없었다. 열심히 했다는 말과 함께 손일석 손을 만들어 보라는 말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만큼 실력이 늘었다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언감생심, 감히 대가라 불리는 최고의 써전의 손과 비교한 것 자체가 자만이었다. 그동안 기울인 노력의 질과 양도 천양지차일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지만, 평생 눈 부릅뜨고 좇아야 할 교수들이었다.

긍정은 힘이다!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어. 스승님에게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달리자.’

이준영 교수가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무지막지한 손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이 실렸다.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신기동 교수가 웃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치켜들고 말았다.

칭찬에 인색하다 못해 짜기만 한 스승과 신기동 교수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

신기루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신현수와 함께라면, 동료들과 함께한다면.

“지훈아, 교수야, 환자 괜찮지? 잘돼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대장 이식은 안 될까? 불가능한가? 유학 가서 눈 크게 뜨고 찾아봐라. 있으면 우리도 대장 이식하자, 대장. 그래, 그거 좋다. 지훈아, 현수야, 대장 하자. 대장. 이만하면 간하고 혈관하고 위장은 됐다. 됐어.”

“지훈이하고 현수가 대장 하면 전 뭐 하죠?”

“경석아, 넌 대장 해야지. 대장. 이 대장이 그 대장이 아니다. 나이도 있는데 졸병 할래? 졸병? 우리 박 교수는 과장 쭉 하면 되겠다. 쭉!”

퇴근을 서두르던 박승준 교수와 이경석이 밝게 웃었다.

송재덕 교수는 언제나 든든한 방패막이자 인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스승이었다.

모처럼 시간이 맞아 함께 퇴근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중에도 이혁민 교수와 최철한이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상의하고 있었다. 아마도 중요한 수술을 앞뒀을 것이다.

응급실이 소란스러웠다. 지동훈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도 어제처럼 누군가 의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 그들에게 필요한 손을 내밀 것이다.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이, 직위, 경력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 한결같으시네. 그런 자세와 마음이 지금의 선생님들을 만들었겠지?’

항상 봐 왔던 모습인데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조용히 발소리 죽여 고경아를 찾았다.

당당한 수술 팀의 일원이다.

간이식 수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감흥이 제법 클 텐데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차분한 눈으로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름답기까지 했다.

또 한 번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세기적 천재라면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성취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내는 이유는 강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평생 발전을 도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 부모나 타인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한 운이란 놈은 다른 사람의 눈일 뿐이었다.

아내에게 귀중한 것을 배웠다.

이제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다.

겸손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무시했는지도 몰랐다.

나직한 한숨만 터졌다.

오늘 하루 어마어마한 수술을 함께했고,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을 엿본 덕인지 수술 팀을 보는 눈도 달라져야 했다.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했다.

최고의 써전과 수술 팀의 손을 볼 수 있었던 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시간.

이런 기회는 결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

새로운 아침 해가 밝았다.

밤새 뒤숭숭한 마음에 뒤척였던 김지훈이 어느 때보다 밝고 힘찬 얼굴로 일과를 시작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키워 줄 스승이 있는데 걱정을 끌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환자는 별개였다.

공여자나 수혜자가 다를 수 없었다.

이철우의 수술 후 감염과 출혈 여부에 바짝 신경 써야 했다. 단 하나의 징후도 놓치지 않고 적절히 대처하는 신현수가 있지만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손보다 두 손이 강한 법이니 말이다.

이상옥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세 개의 혈관과 담도를 연결했고, 간 기능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간부전에 빠진 상태였다. 이식된 간이 제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점이기도 했다. 그 탓에 일반적인 합병증 발생 확률까지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뿐인가?

핵심적인 문제는 거부 반응이었다.

이식 후 수 분 안에 나타나는 초급성 거부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일에서 수개월 혹은 수년 후에도 발생하는 급성 거부 반응이 남았다.

면역 억제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앞으로 며칠이 큰 고비가 될 것이다. 심각한 혈액 응고와 조직 괴사의 징후를 예의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특별한 징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초기에는 발열, 복통, 복수, 간 효소 수치 이상 등 일반적인 증상만 보일 것이다. 만일 거부 반응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해 적절한 대처가 늦어진다면 치명적인 일이 벌어진다.

자칫 거부 반응으로 손상된 이식된 간을 방치하면 환자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일이었다.

신현수와 함께 이철우를 본 후 중환자실로 향했다.

“환자분, 어떠세요?”

“전 괜찮습니다. 우리 철우는 어떤가요?”

아들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쇠도 씹어 먹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실 일이 없습니다. 수술 부위가 안정되는 대로 식사도 하게 될 겁니다.”

“정말 별일 없는 거죠?”

“그럼요.”

이상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까만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지금은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지만 아들의 간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드라마틱하게 변할 수 있었다. 그 전에 먼저 온갖 난관을 무사히 넘겨야 할 것이다.

바이탈과 각종 검사 결과를 보며 마음을 졸였다. 수술 후 흔히 볼 수 있는 미열과 염증 반응조차 원인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현수야, 검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별다른 징후는 없는데 병실로 올려도 될까?”

“판단하기 참 어렵네.”

고민하는 사이 신기동 교수가 들어왔다. 신중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하며 물었다.

“김지훈, 신현수, 환자분 올라가도 되겠어?”

대답 잘해야 한다.

현재 상태로 보면 병실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분명한데 간이식이 발목을 잡았다. 자료에 나와 있는 정보나 원칙은 이론일 뿐이기에 무턱대고 실전에 적용할 일이 아니었다.

신현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현수야, 괜찮겠지?’

‘괜찮을 것 같아.’

동시에 대답했다.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신기동 교수가 눈길도 주지 않고 환자를 보았다.

“환자분, 오늘 검사 결과를 보니까 안심하긴 일러도 거부 반응을 의심할 만한 조짐이 없습니다. 아드님 회복 속도도 좋으니까 마음 편히 가지세요. 김지훈 선생, 점심때까지 지켜본 후 별문제 없으면 병실로 올려.”

단호했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도 최소한 이식 후 병실 이동이 가능한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어야 했다. 현재 검사 결과와 환자 상태를 머리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간을 받은 아버지와 간을 준 아들에게 최대한 집중하며 금요일 하루를 보냈다. 예약된 수술 역시 처음 한다는 기분으로 최선을 다했다.

‘오늘따라 수술이 잘되네. 마음에 들어.’

이상옥 환자도 예정대로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말없이 환자만 바라보는 아내의 눈과 누구보다 기뻐하는 아들의 얼굴에 희망이 가득했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면 그만큼 위험 요소가 줄고, 회복도 보일 것이다.

기분 탓인지 은근히 뿌듯한 하루였다.

쏼라쏼라 영어 회화 공부 열심히 하고, 희연이와 노닥거리며 주스 한 잔의 외조도 잊지 않았다.

공통 분야가 나올 때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고경아의 표정 역시 상당히 밝았다.

공부도 함께하면 덜 힘든 모양이다.

눈 한 번 떴다 감은 사이 주말이 왔다.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간이식은 거대한 덫이자 치밀한 거미줄이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한 발을 내디뎠지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먼저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처분만 기다렸다.

도마 위에 올라타 망치에 치도곤을 당했다.

날카로운 칠지도 날이 피부를 저몄다.

“김지훈, 이래서야 다음 간이식 수술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겠어? 손 기술만으로 하는 수술이 아니다. 자료 다시 살피고, 확실하게 네 것으로 만들어. 송재덕 선생님, 이래서야 유학 보낼 수 있겠습니까?”

“취소해도 된다. 할까? 그럴까?”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화염방사기에 한 줌 재로 날렸다.

“열심히 하자.”

역시 묵직하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이내 역경을 이기고 웃을 수 있었다.

이젠 적응이 됐거나 슬기롭게 대처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지가 너무 많아서였다.

수술 팀 전체에 이경석과 오창도까지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다. 무려 8명이 단체로 덫에 걸리고, 거미줄에 포획됐다. 역시 혼자 맞는 것보다 떼로 맞는 것이 확실히 덜 아프다.

“신현수, 조교수 날로 된 거야? 이름 대신 신 교수라고 불릴 수 있겠어? 위장관은 열심히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어디 보자. 이번 주 무슨 수술을 했지?”

간을 만지는 혈관 전문의가 위를 모를 리 없다.

칠지도를 들고 화려한 칼춤을 추었다.

‘미국에서 태우는 법까지 배우고 오셨나? 현수에 비하면 난 양반이었네.’

어쨌든 조교수라니 신기동 교수도 실수할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미 전임 실력을 넘어섰다고 인정했는지 몰라도 뼈아픈 지적임은 틀림없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은 신현수만의 것이 아니었다. 조교수가 될 이경석과 이미 조교수인 오창도가 헛기침만 했다. 절제된 간 처리만 맡았다고 해도 엄연한 수술 팀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넥타이 절로 고쳐 매는 순간이었다.

교수들의 정성 어린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주말 집담회를 마쳤다.

오창도 이하로 싸그리 탄 날 분위기가 붕붕 뜰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병옥, 당직이지? 이철우 환자 잘 봐.”

“진우야, 오프라고 마음 놓지 마라. 상수나 하석이에게 단단히 확인하는지 중간중간 확인해.”

전공의들은 이중고였다.

토요일다운 일과를 마치고 퇴근했다.

신발 네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가 온 거지? 이 신발은 설마?’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온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가공할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장인어른!’

눈길 한 번 주고는 휙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유학과 고경아의 연수가 떠올랐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손일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손일석 역시 서운한 듯, 화가 난 듯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훈아, 형수 연수 시험 붙으면 미국 같이 간다며? 나는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어머님 아버님께 전화 한 통 안 했어? 화 많이 나셨다.”

짐작 정확하게 맞았다.

“어머님도 화 많이 나셨어?”

“정말 웬만해서는 화를 내는 분이 아니잖아. 다행인 줄 알아. 모시고 오는 동안 걱정만 하시더라. 지금 형수하고 말씀 나누시는 중이니까, 넌 발등에 불이나 꺼.”

손가락 끝이 작은 방으로 향해 있었다.

침실 방 문틈을 따라 희연이 칭얼대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대화가 새어 나왔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혀 차는 소리, 한숨 소리가 뒤섞여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간이식 수술 끝나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좋은 일도 나쁜 일로 만들 수 있네.’

아무리 후회해 본들 늦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긴장에 훅 숨을 내뱉으며 도움을 청했지만 손일석은 딴청만 피웠다. 하긴 된통 한 소리 들을 자리를 함께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아니다. 손일석 역시 장인어른 못지않게 서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서운함을 토로하면 맞장구치는 꼴이다. 장인어른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었다.

이럴 때 역시 떼거리 매가 낫지만 고경아는 장모님과 면담 중이다.

함께 무릎 꿇을 수 있다고 해도 소중한 아내다. 차라리 혼자 매 맞는 편이 나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고성문이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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