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32화 (932/1,329)

3화. 다 같이 복창! (1)

온갖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마음 편하게 쉬었던 주말도 하루 종일 땀을 흘려야 했지만 미래를 위해 흘리는 땀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시험 준비로 상당히 버거워했던 고경아도 이젠 다소나마 여유를 찾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희연이가 큰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지훈 씨, 고마워요.’

‘경아 씨, 열심히 준비해 줘서 나도 정말 고마워요.’

때론 말없이 조용히 눈빛만 주고받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더욱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하며 2월 첫 주를 맞이했다.

유학 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탓인지, 해가 바뀐 것만큼이나 달 바뀜도 유난하게 다가왔다.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에 콱 박혀 카운트다운만 세던 그것!

회진 전, 커피 한잔하며 교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확실하게 알았다. 특별히 찾아올 사람이 없는 그 시각, 문이 열리는 순간 한 줄기 찬바람이 불었다.

강렬한 자극에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은테 너머로 번쩍이는 날카로운 눈빛.

마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함.

신기동 교수다.

딱 3명만 빼고 일제히 기립이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오창도마저 어정쩡한 얼굴로 따라 일어서다 이어진 말에 흠칫 놀랐다.

“송재덕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시차 적응하느라 며칠 늦게 나왔습니다.”

“야! 밤낮이 바뀌었다면서 얼굴은 좋다. 좋아. 신 교수야말로 잘 지냈구나. 앉아라. 앉아. 커피라도 한잔할까?”

“그래. 커피 한잔하자.”

“괜찮습니다. 이 과장, 올해 내놓는다더니 아직도 과장 하고 있어?”

“보자마자 과장 타령은! 신 교수 니가 할래?”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농담이 오고 가며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 딱 이혁민 교수까지였다. 앉아 있는 자세는 박승준 교수도 전임과 다름이 없었다.

간간이 고개를 돌리며 희미한 미소를 보냈지만 희한할 정도로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물 먹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신기동 교수라는 사실 및 저절로 간이식과 혈관이 떠오른 탓일 것이다.

자신을 소개한 오창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부보다 간이식을 먼저 꺼냈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내가 보낸 자료 숙지했지? 곧 주말이라고 어디 놀러 가지 말고 정리 잘해. 다음 주에 확인하자. 김지훈, 혈관은 몇 개 잡혔어?”

“예. 세 개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나하고 환자 보러 가자.”

신현수와 이경석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마치 그동안 혈관 수술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보자는 눈빛이었다. 성에 안 차면 근 1년 동안 갈고닦았을 칼을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교수라고 피할 수 있을까?

이준영 교수와 더불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결과가 보였다.

“오창도 선생, 간담도 파트지? 간이식 수술에서 맡아야 할 부분이 있을 거야. 라파로에만 신경 쓰지 말고 혈관 수술 확실하게 배워. 간이식 자료 검토는 기본이야.”

“예,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요구하며 부담 팍팍 주었다.

말로만 넘긴다면 병원을 옮긴 사실과 정식 조교수가 된다는 사실을 후회할 정도로 묵사발이 될 것이다. 경험상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찬바람은 괜히 분 것이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긴장 속에 오전 수술을 마쳤다. 채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신기동 교수와 함께 병동으로 올라갔다. 부리나케 달려온 송진우의 어깨가 딱딱했다.

“환자분, 혈관 파트를 맡고 있는 신기동입니다. 어디 불편하신 점 없으십니까? 이미 한쪽을 다 사용하셔서 불안하시겠지만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우리 선생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할 겁니다.”

환자에겐 더 친절해졌다.

“김지훈, 그동안 수술받고 불평한 환자 없었지? 이제 곧 조교수니까 더 확실하게 해야 돼. 믿는다.”

말은 길어도 송곳 같은 날카로움이 물씬물씬 풍겼다. 제대로 못하면 유학마저 막을 수 있다는 눈빛까지 보였다.

긴장에 긴장이 또 올라탔다.

오후 수술이 끝나고 혈관 수술이 시작됐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신현수, 이경석, 오창도가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수술 내내 얼굴을 굳힌 채 입도 열지 못했다. 앞으로 쭈욱 신기동 교수와 얼굴을 맞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모든 수술이 끝났다.

비수는 아니더라도 몇 마디 말은 들을 줄 알았는데 딱 한마디만 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전임들과 오창도에게 눈길 한 번 주고 퇴근했다.

“써전은 자신이 잡은 칼에 책임을 져야 해.”

때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말이 편할 때가 있다.

번쩍이는 눈빛은 소리 없는 비수였다.

확실히 유학의 힘은 무서웠다.

존재 자체로 무기가 돼 돌아왔다.

연구실로 돌아온 전임 3명이 동시에 넥타이를 풀며 쓰러지다시피 소파에 몸을 던졌다.

오창도는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이 다행히 금요일이네. 신현수 선생, 이번 주 주말 당직이 누구지?”

“김지훈입니다.”

오창도가 눈가를 찡그리며 김지훈을 보았다.

“왜 그러세요?”

“김지훈 선생님, 손 딸리면 바로 연락 주세요.”

“예? 주말인데 안 쉬세요?”

“어째 손을 놀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혈관 수술할 때 가능하면 퍼스트 부탁드립니다.”

이제 완전히 적응했다 싶었던 오창도가 새로운 각오를 보였다. 백번 잘 생각했다. 처음 봤다고 배려해 줄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오창도 선생님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시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준영 선생님 화염방사기만큼 아픈 게 신기동 선생님 칼입니다. 그렇다고 일을 자청하시면…….’

그 순간 한마디 말이 훅 뇌리를 강타했다.

‘써전은 자신이 잡은 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써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기에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그런 원칙을 일성으로 날렸으니 오창도의 긴장도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부르르 어깨를 떨던 김지훈이 허겁지겁 퇴근을 서둘렀다. 신기동 교수가 왔다고 외조를 안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 하루 만에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보여 준 신기동 교수 탓인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별생각 없이 밤을 보내고 뼈저리게 책임져야 한 날을 스스로 맞이했다.

일복 넘치는 사람이 일복 터지는 사람에게 수술 부탁을 했다. 그것도 온 동네 환자가 몰리는 주말 당직이다.

결정적인 요인이 분명했다.

토요일 일과를 마치자마자 응급실 콜을 받았다.

고경아에게 급히 연락을 하자 언젠 달랐냐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과 병원을 오갔다.

그야말로 폭탄이 터졌다.

교수 두 명이 소파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당직 전공의들은 헉헉대며 월요일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강력한 일복의 여파가 오프인 송진우에게도 미쳤다. 이미 김지훈에게 한 말이 있어 모처럼 맞이한 오하석과의 데이트마저 수술실에서 해야 했다.

“오빠, 우리 언제 마음 놓고 커피 한잔하죠?”

“신임 1년 차 들어와서 너 2년 차 되고, 나 전문의 시험 준비할 때면 시간이 나지 않을까?”

“차상수 선생님도 오프 얼마 못 가는데 될까요?”

“후우! 내가 맞출게.”

매일매일 얼굴 보지만 단둘만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전공의와 전공의가 만난다는 것, 다른 과도 아닌 둘 다 써전이라는 사실은 데이트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송진우가 시간을 낸다고 해도 메이저 과 1년 차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시작했기에 감수해야 했다. 연인이기 이전에 의사라는 직업을 우선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몰랐다.

송진우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한 모금 한 모금 넘긴 오하석이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펴며 두 눈에 걸린 졸음과 피곤을 덜어 냈다.

새벽 5시 30분.

곧 일과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7시까지 환자 변동 상황을 파악하고, 수술 부위 치료를 마쳐야 치프 회진을 문제없이 돌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가장 먼저 출근하는 김지훈과 신현수의 얼굴을 본다.

오하석이 부리나케 병동으로 향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힘들었던 한 주가 지났고, 누구나 바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꺼져 가는 생명을 살리고, 악착같이 달라붙은 질병을 떼고 나면 생기를 되찾은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버틸 수 있다.

하기에 내일을 볼 수 있다.

하기에 희망을 꿈꾸어도 좋다.

내일? 희망?

김지훈에겐 당장 눈앞이 문제였다.

주말의 피로는 점심시간을 이용한 조각 잠으로 풀릴 성질이 아니었다. 찬물에 샤워를 해도 수술 하나 끝나면 어김없이 몸이 무거워졌다.

‘체력이 예전만 못하네.’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타고난 체력 아직 죽지 않았다. 오창도는 오전 수술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솔직히 나이는 못 속인다.

어쨌든 거대한 벽 하나가 남아 있다.

같은 혈관 수술이라고 해도 금요일과 월요일은 다르다. 근 1년 만에 돌아왔으니 분위기 파악 및 맛보기 정도로 지나갔을 신기동 교수였다.

혈관 수술 환자를 앞에 두고 교수 한 명, 전임 세 명, 전공의 한 명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수술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수술실 냉기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신기동 교수가 돌아온 후 두 번째 혈관 수술이다. 김지훈의 실력을 충분히 파악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 오늘의 결과가 남은 기간을 좌우할 것이다.

“메스! 보비! 타이!”

퍼스트를 서는 신현수, 세컨을 서는 강병옥, 참관을 하는 이경석과 오창도까지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벌떡벌떡 뛰는 동맥이 노출됐다.

아주 쉽게 찢어질 것 같은 정맥을 찾았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얇은 바늘과 실로 두 개의 혈관을 이었다.

무수하게 반복한 과정이다.

전임들, 심지어 오창도까지 가르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뛰어난 실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스승도 있지만 대체할 사람이 없어 스승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매의 눈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수술이 이어진 덕에 중간 평가는 없었다.

“다음 수술은 신현수가 하나?”

“예. 제가 합니다.”

“보자. 김지훈, 퍼스트 서라.”

오창도가 퍼스트를 설 기회는 저절로 사라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 두 번째 수술이 진행됐다.

육체적으로 몹시 힘든 데다 정신적 피로까지 겹친 상태인데, 운 좋게 오늘의 수술은 이것으로 끝났다.

무사히 통과할까?

언감생심이다.

눈짓을 따라 차례차례 휴게실로 향했다.

수없이 불길을 뿌린 곳이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고양이 앞 쥐처럼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일말의 기대와 달리 미국 물 먹은 신무기까지 봤다.

칠지도처럼 수많은 갈래 날이 달린 비수를.

“5월 아니면 6월에 유학 간다고?”

마지막 말이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김지훈이 허물어지듯 휴게실을 나왔다.

‘예정대로 유학 갈 수 있을까?’

신현수의 얼굴은 표백제로 씻어 냈다.

‘난 일 년 더 전임이라고 말해야 하나?’

오창도와 송진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수술에 참여 안 한 것이, 세컨만 선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김지훈, 수요일 수술은 내가 할 테니까 참관만 해. 오창도 선생, 첫 수술. 이경석 선생은 두 번째 수술 퍼스트 서. 송진우, 너도 4년 차 치프 되는데 손 좀 보자.”

헉! 소리가 절로 터졌다.

집도의가 신기동 교수라면 김지훈과 비교 불가다. 제대로 따라가는 것만도 힘에 부칠지 몰랐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우리는 잘 넘어갔네. 어후!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질 않는 게 수술이라더니, 그동안 무사히 넘어온 게 다행이다.’

끝이 아니었다.

“김지훈, 신현수, 다음 주에 간이식 환자 한 명 입원할 거야. 수술 예정일은 그다음 주 목요일이니까 외래 진료 조정해.”

헉!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벌써 간이식 수술을 한단 말인가?

초비상이다.

해야 할 일, 준비해야 할 것이 주르륵 눈앞을 스쳤다. 나름 열심히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이 캄캄했다. 실전을 떠나 이론을 겸비하지 못하면 죽음이었다.

깜짝 놀라 서로를 보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갑자기 주먹을 쥐며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쳤다.

날이 7개 달린 칠지도처럼 가공할 신무기에 온몸을 찔렸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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