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유학은 유학이고 (2)
강병옥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라파로도 가급적 많이 배워야 하고, 예전에 마지막 텀이 되면 라파로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아차! 내가 그랬지.”
머리를 톡톡 두드리던 김지훈이 눈을 찢었다.
“병옥아, 진우야,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이준영 선생님하고 오창도 선생님도 계시고, 아니면 신현수 선생이나 이경석 선생님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선생님, 아시면서 왜 이러세요?”
강병옥이 슬며시 어깨를 밀며 엉겨 붙었다.
서서히 본연의 벌건 얼굴색을 보이던 송진우도 팔을 잡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알긴 뭘 알아? 이 자식들이 감히 조교수에게 들이밀다니, 곧 4년 차 치프 된다고 간덩이가 부었네. 이런 행동은 펠로우 때나 통하는 거야.”
농담이기도 했지만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송진우가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선생님은 이준영 선생님께 라파로 달라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저희에겐 오창도 선생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현수하고 경석이 형은?”
“설마 비만이나 조기 대장암을 받으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생님이 우리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단히 붙잡힌 두 팔에 가해지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어떻게든 김지훈이 유학 가기 전 라파로를 통째로 해 보고 싶다는 결의 비슷한 느낌까지 받았다.
어찌 됐든 맞는 말이지만 라파로는 쉽게 줄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기본 자체가 담낭 절제술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분야였다.
당장 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적당한 핑계로 상황을 모면하려던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혁원이하고 종진이처럼 교육시키면 라파로를 줄 시간이 없겠네. 오창도 선생님이 대신 하시겠지만 간이식이 걸리면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 한 명 귀하지 않은 후배가 없다.
결국 평소와 똑같이 근무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 주변 및 신변 정리 역시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나 몰라라 하고 떠날 것이 아니면 말이다.
‘후배들 일도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야 되는데 생각이 짧았어. 8월까지 잡았던 교육을 4~5개월 안에 끝내야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는 거겠지?’
하마터면 놓칠 뻔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병옥과 송진우를 보던 김지훈의 눈빛이 돌연 으스스해졌다.
다행히 이미 알고 가르치는 사람은 배워야 하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덜 힘들다. 반면 배우는 입장에서 시간까지 촉박하다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것이다.
“각오는 됐겠지?”
중간을 쏙 빼먹은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송진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강병옥은 빠릿빠릿하게 알아듣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가르쳐만 주십시오.”
“내일부터 내 수술 들어올 수 있으면 번갈아 들어오고, 수술 기록지 직접 작성해. 하석이나 일이 년 차 기록하고는 차원이 달라야 할 거야.”
조금 있으면 4년 차 치프가 되고, 수술을 달라고 먼저 말했는데 1년 차와 같은 수준이면 말이 안 된다. 집도의 혹은 퍼스트 입장에서 작성하고, 느껴야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내친김이었다.
“또 원하는 거 있어?”
늘어나는 일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송진우가 불타는 고구마로 변신했다. 기다렸다는 듯 요구 사항을 말했다.
“이왕이면 다른 수술도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집도 기회를 더 달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단, 터지는 일복에 일복을 또 추가해야 한다.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었다.
“진우야, 병옥아, 내 눈 보이지?”
“예. 보입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지금 내 눈 감기는 거 안 보여? 이런 상황에서 나보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힘들게 일하라는 거잖아. 너희들 가르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알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그럼 내가 준 수술 모두 똑같이 기록 작성해. 아! 집도한 수술 모두 리포트 작성하라는 말을 빼먹었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는다.”
하얗고 빨간 얼굴이 대비를 이뤘다.
씨익 웃음 한 번 날려 주고 퇴근을 서둘렀다.
치프라고 해도 가뜩이나 일이 많은데 어마어마한 부담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고생 없이 날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지식과 수술이었다.
‘자식들! 힘들어 죽겠는데 내 소중한 시간까지 달라고 해? 좋아. 내일부터 떠나는 날까지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가자. 죽었어.’
자그마하게 남아 있던 들뜸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분 좋은 감정이 차지했다.
부우웅! 상쾌한 엔진 소리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환하게 웃다 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후배를 조이는 것 이상으로 더 압박할 존재가 떠오른 것이다.
서둘러 밥 차려 먹고 간이식 자료를 잡았다.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다.
하나뿐인 책상은 고경아 차지였고, 하나뿐인 딸은 김지훈 차지였다. 오늘도 애타게 아빠를 부르짖으며 등짝이 땀범벅이 되도록 업었다.
브브브브!
어깨는 침 범벅이다.
***
뚝딱 눈 감고 뜨면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고경아는 매일 밤늦도록 시험 준비에 정신없었다.
김지훈은 자신의 일과 유학 이후를 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이 너무 몰릴 때는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몸무게까지 빠졌다.
‘어후! 이러다 유학 가기 전에 쓰러지겠네.’
시간 참 빨리 갔다.
오늘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주말 집담회가 반복됐다.
흠씬 두드려 맞은 후 후배들에게 묵직한 어퍼컷과 제법 틀을 갖춘 화염방사기를 날렸다.
라파로에 타고, 응급 수술에 새우등이 된 강병옥과 송진우가 비틀비틀 혼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불길이 점점 강해지시네.’
긴장만 이어진다면 아무리 강인한 사람도 지쳐 쓰러진다. 축축해진 등짝을 커피 한 잔으로 달래며 일말의 여유를 즐길 시간 역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집담회가 끝난 후에도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들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고, 김지훈 역시 두리번거리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뭔가 있어. 오늘은 또 뭐지?’
신현수와 이경석이 눈짓을 했다.
전임 두 명이 모르는 일을 알 리 없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젓는 순간 삐거덕!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반가움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이혁원과 나종진이었다.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일일이 인사를 하고는 이혁민 교수 앞에 섰다. 두 어깨에 자부심과 자신감이 팍팍 실려 있었다.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 순간을 누릴 자격은 충분했다.
“과장님, 전문의 최종 합격 발표가 났습니다. 4년 동안 부족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문의가 되더니 더욱 의젓해진 것 같았다.
“축하한다. 니들 둘 다 군대 가지?”
“예. 곧 신검받고, 훈련소 들어갑니다.”
“그래. 선배들에게 들었겠지만, 의사 돼서 쉬고 놀 시간은 군대밖에 없다. 군대 가기 전에 들르고, 몸 건강히 잘 다녀와라.”
송재덕 교수가 동네 아저씨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혁원이하고 종진이가 벌써 전문의가 됐구나. 세월 참 빠르다, 빨라. 3년 후에 보자, 3년 후에. 펠로우 꼭 지원해서 교수도 되고, 과장도 되자.”
이준영 교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지훈은 알 수 있었다.
평탄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이혁원이 다가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상한 일이다.
할 말이 무척 많았고, 지금도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데 정작 어깨만 두드려야 했다.
스승의 아들, 가장 아끼는 후배가 아니라 그냥 사람과 사람으로서 고마웠다.
“축하한다.”
한마디 말에 불과했지만 이혁원은 김지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보낸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쁜 일과를 잠시 잊고 서로가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주말인 데다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 식사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밥이라도 한 끼 사 줘야 하는데 종진이가 집에 일이 있다고? 아쉽네. 군대 가기 전에 꼭 와라.”
“예. 감사합니다.”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라 속에 있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돌아서는 모습이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를 일이었다. 군대 3년과 유학 1년 때문에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혁원이 저 자식은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뒤도 안 돌아보네.’
은근히, 아니 상당히 서운했다.
착잡한 가운데 토요일 일과를 마쳤다.
퇴근하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준영 교수였다.
정말 어지간한 일 아니고는 연락하지 않는 스승이라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같이 점심 먹자. 경아한테도 말했으니까 함께 나와.)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는 툭 끊었다.
갑자기 밥 먹자고 하는 이유야 빤했다. 더구나 고경아까지 불렀다면 희연이도 데리고 나와야 한다. 스승과 제자를 넘어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서운했던 감정이 싹 사라지며 입꼬리가 절로 말렸다.
‘혁원이 이 자식이 스승님을 닮아 가네.’
피곤도 잊고 휘파람을 불며 가족 모두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예약된 방을 찾아 문을 여는 순간 왠지 모를 울컥거림이 다가왔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원만이 아니라 사모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김지훈을 본 사모가 일어나 반길 때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두 분 다 와 줘서 고마워요. 앉으세요. 어머! 딸이 벌써 이렇게 컸네요. 백일 때 가 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슬며시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맞을지 몰라서 조금 큰 옷으로 샀어요.”
희연이 옷이었다.
고경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모님, 이러시면……. 감사합니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으레 오갈 수 있는 선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새삼 어떤 관계를 쌓아 왔는지 생각이 많아졌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희연이가 아니라 이혁원이다.
“스승님, 사모님, 축하드립니다. 혁원아, 축하한다.”
“남들 다 합격하는 시험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 눈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떨어지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흐음! 노력 안 하는 놈들이나 그렇지. 전공의 생활만 제대로 했으면 떨어질 일이 없다.”
이혁원에게 따끈따끈한 첫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김지훈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던 이혁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숨도 쉬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경아야, 공부하기 쉽지 않지? 지훈이가 많이 도와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예. 덕분에 준비 잘하고 있어요.”
“다행이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오늘 하루는 긴장 풀고 푹 쉬었으면 좋겠다. 어서 먹자. 여보! 식사합시다.”
식사가 시작됐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예상한 대로 이준영 교수는 아들의 전문의 합격, 제자의 유학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밥상머리 내내 고경아의 시험에만 관심을 보였다.
“면접은 인성과 근무 평가 등을 보니까 걱정할 것 없다. 아버님에겐 말씀드렸지? 뭐라고 하셔?”
김지훈의 유학만 걸려 있으면 벌써 말했겠지만, 고경아의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결과를 떠나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말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담이 적지 않구나. 그래도 빨리 말씀드려. 고성문 선생님도 많이 좋아하실 거야.”
“경아 씨, 부모 마음은 안 그래. 자식이 무얼 하든, 밉든 곱든 배 아파 낳은 자식일 뿐이야.”
사모는 이준영 교수에게 완전히 적응이 됐는지, 아니면 고경아가 딸 같은지 몰라도 식사 내내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너무 즐거웠다.
장인어른처럼 스승도 아버지 같았고, 장모님처럼 사모도 어머니 같았다. 희연이를 안아 보며 쩔쩔매는 이혁원은 동생이었다.
‘좋다. 스승님이 안 계셨으면 난 어떤 의사가 됐을까? 혁원이가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린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툭하면 떠오르는 지난날의 추억이었지만 전문의가 된 이혁원을 보자 새삼 큰 의미로 다가왔다.
어떤 인연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모양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가볍게 맥주 한 잔까지 곁들였다.
‘야! 맥주 한 잔에 술기운이 느껴지네.’
“선생님, 예전보다 더 힘드신가 봐요.”
“이리저리 일이 많아. 그리고 신기동 선생님 곧 오시는 거 알지? 간이식 하신단다. 준비가 미흡하면.”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자 이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이 신기동 교수니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다.
시간이 꽤 흘렀다.
점점 배가 차며 슬슬 눈이 감겨 왔다.
스승이 주는 위압감도 피곤을 막진 못했다.
고경아 역시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계속 자세를 바꾸었다.
이를 모를 스승이 아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경아야,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하면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자고, 내일 다시 열심히 해. 김지훈, 넌 확실하게 도와.”
“예, 선생님.”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죽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어나자.”
“사모님,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혁원아, 축하한다.”
“선생님도 잘 다녀오십시오. 축하드립니다.”
이제야 서로 축하하고 자리를 파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힘들다 해도 좋은 일만 이어지면 바랄 것이 없었다.
조심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했다.
음주 운전이다.
맥주 한 잔은 괜찮다고 해도 이렇게 피곤할 때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아예 운전대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