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30화 (930/1,329)

2화. 유학은 유학이고 (1)

고경아는 시험 준비로, 김지훈은 간이식 준비와 가사 일로 정신없는데 영어 회화까지 겹쳤다. 더구나 암기로 정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랴부랴 마이마이를 산 후 집으로 향했다.

회화 테이프는 구할 시간도, 살 가게도 없었다.

시작부터 반쪽에다 반쪽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큰일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고경아 역시 걱정이 태산이었다.

“영어 회화는 언제 또 하죠?”

뚝딱 속성으로 익힐 방법이 없는 문제였다.

궁리 끝에 신현수에게 연락했다.

“현수야, 주말인데 미안하다. 나 좀 살려 줘. 사실 저번에 유학 문제까지 결정이 났어. 무얼 준비해야 할지 깜깜한데 회화까지 문제네. 그래서 말인데, 영어 학원이라도 가야 할까? 테이프가 도움이 될까?”

(유학 간다고? 다들 언제 말할지 궁금해하는데 빨리도 말한다.)

“어? 다들 알고 있었어?”

(너만 모르는 것 같다.)

감쪽같이 속은 놈, 확실하게 비밀을 지켰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놈이었다. 맹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맹한 김지훈이었다.

“눈치 하나는 백단이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하다. 자식들! 어떻게 한마디도 안 묻고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지? 연기 잘하네. 그건 그렇고, 회화는 어떻게 하냐?”

(학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테이프도 큰 도움이 안 되지만, 전화로 원어민이나 교포 2세에게 회화 배우는 길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저렴하고, 효과도 훨씬 좋아. 내일 적당한 사람 있는지 알아보고 자세히 알려 줄게.)

전화로 회화를 배우다니 세상 많이 좋아졌다.

나름 효과까지 좋다니 한시름 놓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순간 이런저런 문제로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공식적으로나마 조교수 임용 통보를 받을 시간이 됐다.

믿어 의심치 않고 물었다.

“참! 임용 결과 나왔나? 전임 때 언제 통보해 줬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깔끔한 대답을 기대했다.

원하는 답이 들렸다.

(경석이 형도 조교수로 임용 됐어. 끊는다.)

말만 잘하던 신현수가 툭 전화를 끊었다.

‘자식이, 잊을 만하면 옛날 성질을 기억나게 하네.’

서둘러 끊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경석이 됐다면 신현수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무조건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 줄 일이었다.

드디어 무지개가 뜬다는 즐거움을 안고 전화했다.

생각도 못한 말을 들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임용이 안 됐다고요?”

(티오가 두 개뿐이었어. 우리보다 근무 기간 모자란다는 이유로 현수가 스스로 임용을 거부한 것 같아.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송재덕 선생님께 들었어.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라며 너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현수에게 미안해 죽겠다. 지훈아, 어떻게 하면 좋겠냐?)

기뻐하기는커녕 미안함만 뚝뚝 묻어났다.

순간 휙휙 돌아가던 머릿속이 그대로 멈췄다.

과정을 잘 모르고 결과만 알았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갈 이경석이기에 심난하기까지 했다.

애써 이유를 찾았다.

가장 냉정하고 이성적인 신현수의 판단과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이유가 합당하기에 인사 위원회와 교수들도 동의했을 것이다.

‘현수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적절한 판단을 내렸을 거야. 자식! 그래도 그렇지. 이걸 멋지다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내색하면 가뜩이나 부담스러울 이경석이 더욱 힘들어할 것이다.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유학이며 조교수 임용이며 남들 다 아는 것을 끙끙대며 감췄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형,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형이 부담 가질 일은 아니에요. 현수가 생각 없이 말할 놈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수용할 선생님들이 아니잖아요. 형만큼 자격이 충분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 될 사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난 오늘 전화도 안 한 겁니다.”

한숨 소리만 들렸다.

한동안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과 미안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현수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말이다.

이상스럽게 주변이 고요했다.

불현듯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동료, 친구를 떠나 어떤 사람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행동이 분명했다. 오랫동안 함께했건만 신현수의 진면목을 이제야 엿본 지도 몰랐다.

‘현수가 조교수 임용을 스스로 포기했어? 입장 곤란해질까 봐 전화도 서둘러 끊었구나.’

신현수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도 안 쓰고, 들떠 지낸 한 주가 속상할 지경이었다.

결국 신현수에게 다시 전화를 하고 말았다.

목소리가 차분하기만 했다.

(내가 말한다고 통할 일이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너만…….”

(내 의지하고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야. 나도 속상하니까 그만해. 하여튼 부교수 임용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고,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에 넘어가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내가 병원 경영에 참여할 때 욕을 안 먹지.)

순간 날카로운 화살 한 발이 뇌리에 박혔다.

신현수는 먼 미래까지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젠 써전으로서 최고의 라이벌이 아니라 인생의 라이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서늘한 느낌이 들었을 텐데 지금은 입조차 열기 힘들었다.

대단하다, 혹은 멋있다는 말이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몰랐다. 어떤 말로도 신현수를 칭찬할 수 없었고, 마음을 전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했다.

남들이 가기 때문에 가는 유학이 아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면서도 유학 갈 생각만 했지 정작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전화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경석이 형만이 아니라 나도 입장 곤란해지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유학 준비나 열심히 해.)

냉정하게 들린 목소리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고맙다.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계약이나 확실히 지켜.)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손에 들린 간이식 자료에 눈이 갔지만 여러 생각으로 머리만 복잡해졌다. 두서없이 머릿속에 박혀 있던 목표를 하나둘 정리해야 했다.

간담도와 라파로.

기본을 중시하는 의료 체계와 환자 관리.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뚜렷하고도 확고한 목표에 집중하지 않으면 몇 년을 있어도 허송세월에 불과할지 몰랐다.

‘국내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만 익히고 온다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주말 내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고경아를 보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든 것을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지 않으면 유학은 쓸데없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까르르! 브브브브!

희연이만 천하태평이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변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창도 선생님 일복 참 대단하네. 도대체 주말에 수술을 몇 건이나 한 거야?”

“새벽에 간신히 집에 가신 모양인데, 오늘 수술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러다 전처럼 두 명이 당직 서야 하는 거 아냐? 하긴 네가 없으면 일복 터진 사람이 한 명뿐이긴 하네.”

말을 건넨 김지훈이나, 응급실 보고를 준비하는 신현수나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뜨거운 눈빛은 별개였다.

“어이구! 일찍 출발했는데 늦었네.”

“형이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너 유학 가고 나면 내가 현수하고 응급실 보고를 맡아야 하잖아. 미리 습관 들여야지. 과장님이 일석이나 펠로우에게 넘기시면 다행인데 말이야.”

신현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경석도 나름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좋은 아침이다. 좋은 아침. 경석이 너는 웬일이냐? 아! 일하러 나왔구나. 한꺼번에 보니까 좋다. 좋아. 너희들 얼굴이 좋아서 더 좋은 아침이다.”

좋다는 말만 여섯 번을 들었다.

싱글벙글 웃는 송재덕 교수와 무뚝뚝한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온 이준영 교수의 어깨에 즐거움이 잔뜩 걸려 있었다.

가끔 신현수와 이경석에게 눈길을 주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즐거워할 뿐이었다.

다들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이경석이 유난할 정도로 신현수와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과장인 이혁민 교수조차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펠로우 임용이 정식으로 발표되면 놀라는 사람이 많겠지만 2~3개월 후의 일이다.

자연스럽게 묻힐지도 몰랐다.

그것이 서로에게 편할 것이다. 신현수의 결정과 마음을 존중한다면 말이다.

조교수 임용 문제가 조용히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의국 전체의 관심이 김지훈의 유학에 쏠린 것도 한몫했다. 경험자인 신현수는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교수들은 더욱 철저한 준비를 강조했다.

“김지훈, 시간 후딱 간다. 5개월도 짧을 수 있어. 차질 없도록 준비에 만반을 기해.”

“지훈아, 교수야, 유명한 병원 많은데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어디로. 대장 잘하는 병원 소개해 줄까? 그래. 그게 좋겠다. 유학 다녀와서 대장 하자, 대장. 경석이가 바로 이어 가면 완벽하다. 완벽해.”

이준영 교수도 한마디 던졌다.

“신 교수 오면 잘 묻고 다시 한 번 점검해.”

물론 말만이 아니었다.

‘General’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람 잡기 시작했다. 수술 참가 내지 참관은 말 안 해도 필수였다. 갑자기 논문을 내밀며 검토하라는 말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 죽어라 죽어라 하시네.’

남은 기간이 짧다면 짧지만, 또한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해 왔던 일을 정리하며 후배들의 부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집에서도 쉬지 못해 피곤한데, 우왕좌왕하다가는 유학 가기 전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철저하게 근무 시간을 지키는 미국.

하고 싶다고 해도 초과근무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

그렇게 하고도 충분히 먹고사는 사회!

보수는 없지만 기대해 볼 일이었다.

바쁜 나날이 지났다.

주경야독!

많은 부분을 도맡아 했던 고경아의 손에 책이 잡힌 이후 낮에는 병원 일로, 밤에는 집안일과 육아로 쉴 틈이 없었다.

갈수록 심화되는 간이식 준비까지 겹쳐 매일 밤 2~30분 정도 진행되는 회화 수업마저 벅찰 지경이었다.

달콤한 수확을 얻으려면 필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과 가족의 일까지 거저먹으려 한다면 행복과는 영영 이별하는 편이 낫다.

“파이팅! 으샤! 으샤!”

수없이 외치며 결코 서두르지 않고, 차분차분 하나하나 준비해 나갔다. 당직의 험난함은 여전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다.

‘유학 가면 수술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많이 하고 가자.’

정식 조교수 임용이 멀지 않았는데, 당연한 것처럼 또다시 전공의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천근만근 따라붙는 피로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후배들의 집요한 눈길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강병옥과 송진우에게 붙잡혔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자식들 눈빛이 왜 이렇게 살벌해?’

강병옥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준비하시느라 많이 힘드신 모양입니다.”

항상 일을 달고 산다는 티가 팍팍 나지만 최근에는 밤낮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고경아의 선발 여부가 결정돼야 어느 정도 덜 수 있는 피곤이었다.

“여러 일이 겹쳐서 그래.”

“사모님, 아니 형수님도 꽤 힘들어 보이시던데, 모든 일이 잘 풀리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사근사근한데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고맙다. 그래야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빨리해. 나 요즘 집에서도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유학은 언제 가십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5월이나 6월 정도에 가지 않을까 싶다.”

강병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빠르면 5월이라고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다 알고 있었으면서 뭘 그렇게 놀라? 아직 4개월 가까이 남았다.”

“언제 가시는지는 몰랐죠. 일단 정식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우린 어떻게 합니까?”

송진우도 심각한 얼굴로 눈가를 좁혔다.

유학 가는 사람은 김지훈이다.

지금도 준비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고, 간 후에도 여러 문제로 걱정인데 왜 후배들 얼굴이 심각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빠트린 게 있나?’

의자를 당겨 앉을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떻게 해?”

송진우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뭔가 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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