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Ⅲ (2)
발소리 죽여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힘들었는지 희연이가 칭얼거리며 눈을 떴다.
가슴에 안고 달래며 상념에 잠겼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고경아와 함께했던 시간이 스치고 스쳐 흘렀다.
즐거운 날만 있으면 부부가 아니다.
당연히 힘든 날이 있었고, 때론 목소리 높여 싸운 날도 있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믿었는데, 문득 고경아가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렸다.
고경아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 희연이 깼어요? 내가 재울게요.”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먼저 자요.”
눈빛에 담긴 미안하고 고맙다는 미소를 본 것일까?
물끄러미 남편을 보던 아내가 잠자리에 누웠다.
많이 늦었지만 편안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선발 시험은 고경아의 마음을 꽤나 복잡하게 만들었다.
밤새 뒤척거리다 가끔은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쿨쿨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은 왠지 야속하면서도 든든했고, 새근새근 천사처럼 따스한 숨결을 내쉬는 딸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일요일 내내 싱숭생숭했다.
고경아의 관심이 하루 종일 책에 쏠렸다.
시험 종목을 대략이나마 짐작했는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툭하면 희연이에게 눈길을 돌리면서도 입술을 꼭 깨물고는 이내 책에 집중했다.
‘우리 딸은 걱정 말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치를 애먼 데 팔아먹었다. 툭하면 골목길 어귀에 세워 놓은 차에 눈이 갔다. 조교수 임용의 흥분도 채 가시지 않았다.
운전대 잡을 날도 많지 않은데 무작정 몰고 나가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이미 입 밖으로 토해 낸 말이 있는 이상 열심히 할 일을 해야 했다.
희연이와 놀고, 재우고, 기저귀 갈아 주고, 먹이는 일은 끝이 없었다. 세탁기, 청소기 한 번 돌린 후 밥상에 마주 앉았을 때는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땀범벅이었다.
‘그동안 경아 씨가 정말 힘들었구나.’
간이식 준비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틈날 때마다 자료에 코를 박아도 넘어간 페이지보다 남은 페이지가 위압적일 정도로 많았다.
딱 한 번 외출했다.
지난주 수술한 환자 중 한 명이 중환자실에 있었다.
겸사겸사 회진을 돈 후 부리나케 돌아와야 했다. 여유 부리며 당직 전공의와 노닥거릴 시간은 단 1초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11호가 아니라 바퀴 4개 달린 물건을 이용했다.
역시 겸사겸사.
일요일 밤, 잠자리에 들 무렵.
맥이 다 빠질 정도로 말도 안 되게 피곤했다.
절로 한숨을 폭폭 내쉬고 말았다.
‘휴일에도 이렇게 일하고 출근한 거야? 내가 훨씬 더 힘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했네. 그나저나 언제 자려고 아직도 책을 붙들고 있어.’
어느 시험이나 필수 항목이 있는 법이다.
작은 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꺼질 줄 몰랐다. 슬며시 가져다 놓은 주스에 입 한 번 댔을 뿐이었다. 김지훈도 놀랄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입가에 미소는 왜 그려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바쁘게 지나갔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상을 차린 김지훈이 헐레벌떡 출근길을 서둘렀다. 고경아는 희연이를 돌봐 줄 아주머니가 와야 나설 수 있다. 손에 들린 작은 종이 한 장을 보며 중얼중얼 뭔가를 외우는 모습이 내내 따라붙었다.
새롭다면 새로울 월요일 일과를 시작했다.
오늘따라 이상스럽게 간호사부터 동료, 후배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평상시와 다르지 않을 텐데 유학과 조교수 임용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모든 일이 정식으로 결정된 후에 말하는 게 맞겠지.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면 경아 씨 문제도 있는데 재수 옴 붙는다. 산만해지면 실수한다. 일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자.’
언제나 그렇듯 아침부터 바빴고, 곧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오전 수술이 끝나자마자 신현수에게 토요일 일을 물었지만 특별한 말은 없었다.
“조교수 임용 때문에 신경이 가긴 하는데, 발표 나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불안할 수밖에 없잖아. 경석이 형이 유난히 예민하네. 다 잘될 거야.”
신현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잘될 것이란 말에 지레짐작했다.
‘올해 전임 티오(T.O)가 세 명이나 되는 모양이네. 웬일이래? 혹시 누군 되고, 누군 안 될지 몰라서 찜찜했는데 잘됐다. 유학 가는 일은 언제 말하지?’
입단속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십중팔구 신현수는 알고 있겠지만 초인적 의지로 입 꾹 다물었다.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현수야, 둘이 뭐 하니? 할 일 없구나? 그럼 경석이 수술 들어가서 참관해라. 참관. 이럴 때 2~30분도 귀한 거다. 아주 귀한 시간이다.”
곧 점심시간인데 이게 무슨 소릴까?
“참관이요?”
한마디 되묻고는 역시 입 꾹 다물어야 했다.
“이 과장 말은 어디로 들었어? 제네랄이다, 제네랄. 아직 안 늦었다. 대장 하면 더 좋고. 좋다, 좋아.”
빤히 쳐다보는 눈빛 속에 유학 준비 철저히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꼼짝 없이 수술실로 들어가 이경석의 대장 수술을 참관했다.
다행히 식사 시간에 맞춰 수술이 끝났다.
이경석이 마스크를 벗으며 웃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설마 내 수술 볼 생각은 아닐 테고, 무슨 일로 둘 다 들어왔어?”
“송재덕 선생님이 등 떠미셔서 들어왔습니다.”
웬일인지 신현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잘 들어왔다.
‘다른 때하고 똑같네. 내가 너무 과민했어. 그래도 얼굴이 왜 그랬는지 궁금하네. 뭘까?’
모두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간만에 함께 식사를 했고,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그 때문에 더욱 궁금해졌지만 때가 되면 말할 것이라 여겼다. 더구나 일분일초가 금쪽이었다.
30분 짜게 간이식 자료 살피고, 오후 수술과 혈관 수술까지 쭉 달렸다.
이런저런 일이 연이어 벌어졌지만, 곧 신기동 교수가 오면 간이식은 발등의 불이 된다.
눈에 불을 켜고 혈관 수술에 집중했다.
송진우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서슬 퍼런 기색에 입도 열지 못했다. 한눈팔았다간 거의 죽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송진우, 오늘따라 산만해 보인다. 간이식은 혈관만이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이야. 똑바로 하자.”
김지훈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자물쇠 달았다.
두 번째 수술을 이경석이 집도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전임 중 누구 한 명만 마음에 안 들어도 비수를 뿌려 댈 신기동 교수가 수술 내내 아른거렸다.
‘무조건 다 통과해야 한다.’
휴게실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송진우는 얼굴에 불이 붙었고, 이경석은 헛기침만 해 댔다. 뒤늦게 들어온 신현수는 김지훈을 보며 콧등만 찡그렸다.
고만고만하다고 해도 3명 중 제일 실력 있는 써전이자, 주임 교수를 대행하는 의사의 지적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혈관과 라파로는 인정한다.’
일과가 모두 끝났다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은 1분도 쉬질 못한 것 같네. 아! 피곤하다.’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회진을 돈 후 퇴근을 서둘렀다. 송진우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아무 일 없는 척 부리나케 집으로 내달렸다.
물론 두 다리가 아니라 SM520V 엔진이 제 할 일을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시동을 끄는 순간 갑자기 예전 차를 거저 주다시피 넘긴 손일석이 떠올랐다.
‘어? 일석이 이 자식이 그냥 지나갈 놈이 아니잖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어후! 아예 달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팔아? 중고라고 후려치면 어떻게 한다.’
그 와중에 별별 쓸데없는 걱정이 다 들었다.
한걱정 하며 집으로 들어서자 고경아가 책을 보다 말고 주섬주섬 밥을 차리려 했다.
김지훈의 시간이 금이라면 고경아의 시간은 다이아몬드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희연이 나한테 맡기고 하던 공부 계속해요. 집안일도 걱정 말고.”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자! 밤 일과 시작이다.
이제 이틀째에 불과한데 꽤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퇴근 후에 한 시간 정도는 뒹굴뒹굴 굴러 줘야 사는 맛도 나고 피곤이 풀리는데,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결혼 내내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까짓것 3개월쯤이야. 파이팅!’
희연이 안고 힘차게 주먹을 흔들었지만 불안감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어째 일복이 이젠 안과 밖을 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한다면 매일매일 당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집 일복은 즐겁다.
“희연아! 아빠다, 아빠. 아빠 해 봐. 아빠, 아빠.”
까르르! 웃으며 브브브 침을 튀겼다.
침 범벅이 된 입술에 뽀뽀하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깨물어 주고 싶었다. 희연이는 존재 자체로 기쁨이자 설렘이었다.
모든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희연이와 좋다고 놀다 보니 간이식 자료 겨우 몇 페이지 넘겼다. 불현듯 신기동 교수가 떠오르며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미국 물 먹은 신무기에 찔리면 상당히 아플 것이다.
걱정도 잠시, 슬슬 눈이 감겼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옆이 허전한 탓인지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인 끝에야 깜빡 꿈나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부부가 잠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고경아는 얼마나 잤을까?
***
장밋빛이든 꽃길이든 많은 준비가 필요한 미래일 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꿈에 취해 현실을 등한시한다면 미래도 바뀌기 마련이다.
신현수와 이경석 역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아니, 숨이 찰 정도로 사방에서 압박을 가했다.
“김지훈, 오늘 갑상선하고 유방 수술 있다. 진료 끝나는 대로 보자. 그냥 습관적으로 들어오지 말고 하나하나 정리 잘해라.”
“이준영 선생님께서 퍼스트 서라는 수술이 있습니다.”
“그럼 그 수술 끝나고 들어와. 아! 최철한 선생 수술이 점심시간을 넘길지도 모르는데, 손을 보태야 할 일이 있는지 확인해라.”
최철한에게 그럴 일은 없었다. 송재덕 교수 말처럼 참관하라는 말이었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이러다 무릎 꺾이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당직과 상관없이 하루하루 넘치는 일복과 씨름했다.
부부가 쌍으로 시간과의 싸움을 이어 가야 할 날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당직이라는 결정타를 맞은 김지훈과 매일 밤 책과 벗한 고경아의 눈이 점점 빨갛게 변해 갔다.
이준영 교수의 관심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스승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준비 잘하고 있지?”
“어느 병원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지만 지금은 특별하게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너 말고 경아.”
머쓱한 웃음이 절로 터졌다.
“하하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을 거야. 많이 도와줘.”
왠지 가뜩이나 까매진 두 눈가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전공의 1년 차처럼 생활하고 있는 제자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일을 주지 마셔야죠.’
제자가 유학을 간다는데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껏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제자는 쏙 빼고 고경아라니, 알다가도 모를 스승의 속이었다.
그런데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에휴! 혁원이한테도 이러시겠지? 그러나 부부는 일심동체! 경아 씨에 대해 물으신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해서도 물으신다는 얘기지. 돌려 말하시기는. 아 참! 전문의 시험 결과 발표가 날 때가 지나지 않았나? 이 자식들이 보고도 안 하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고 합격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혁원 때문인지 제법 신경이 쓰였다.
이번 역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통할 것이다. 스승의 얼굴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학 떠나는 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평소와 똑같을 것이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혁민 교수는 물론 동네방네 소문 날 정도로 묻고 또 물었을 송재덕 교수까지 유학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뭔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상하네.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건데 뭘까?’
충분히 고민하기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직한 엔진 소리 들었다 싶으면 어느새 도착이었고, 이내 집안일에 파묻혀야 했다.
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다 일이다.
간이식 자료 살피는 시간도 희연이 업고 재울 때뿐이니 말 다 했다.
사실 그조차 쉽지 않았다. 등에서 전해지는 뜨끈한 체온에 한 페이지당 땀 한 컵을 쏟아야 했다.
‘이렇게 더운데 우리 딸은 참 잘 자네.’
잠투정 많이 사라진 딸이 대견하기만 했다. 그나마 몇 시간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는데 잠투정이 살아 있었으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어이구! 허리야.”
몸무게도 참 빨리 늘어났다.
가뜩이나 힘든데 후배들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김지훈만큼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은데 용케 참는지 눈치만 줄 뿐이었다.
물론 신현수와 이경석 사이에 흐르는 무엇인가 알지 못할 기류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을 모르면 치프가 아니다. 도리어 일에 완전히 뭉개진 김지훈이 미묘한 기류를 알지 못했다. 사안에 따라 꽤 무디고 맹한 면이 확연히 드러난 나날이었다.
어느새 주말이 다가왔다.
드디어 간호과 연수 공고가 붙었다.
김지훈이 전에 없는 관심을 보였다.
선발 인원은 5명.
시험과 면접 일자는 3월 말 이틀간.
자격 조건은 7년 이상의 병원 근무 경력 및 현재도 근무 중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학사 이상의 학위만 요구해 고경아에게도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현재도 근무 중이어야 한다면 딱히 불리한 조건이 없네. 도리어 유리할 수도 있겠어. 좋았어.’
대신 과목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았다. 당연히 영어 회화가 가능해야 했다. 김지훈에게도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결정적인 변수가 될지도 몰랐다.
우리나라 교육 체계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야 했다. 대학까지 나와도 외국인이 눈길만 주면 생기는 심각한 울렁증과 기피증을 말이다.
‘주변에 영어 잘하는 놈은 달랑 현수 하난데, 간호사들이라고 다르겠어? 현재까지 병원에 근무하고 있으면 다 똑같을 거야. 어이쿠! 경아 씨만 걱정할 때가 아니네.’
마이마이와 회화 테이프가 떠올랐다.
한 발 빠른 사람이 성공한다는데 큰일 났다.
부부가 쌍으로 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