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Ⅲ (1)
신현수와 이경석은 이미 퇴근한 뒤였다.
‘오늘 같은 날 먼저 갈 사람들이 아닌데 이상하네.’
들떴던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다소 어두웠던 얼굴이 생각나며 찝찝한 느낌까지 들었다. 은근슬쩍 송진우와 강병옥에게 별일 없었는지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신현수 선생님하고 뭔가 얘기를 하시더니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이시긴 했습니다.”
“당황했다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은 건 없고?”
“저희가 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날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들어갈 동기들이 아니었다. 지극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훨씬 갑갑한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후자일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다.
‘뭘까? 나만 모르는 일이 도대체 뭘까? 조교수 임용과 관련된 일일까?’
혼자만 너무 기분 낸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미안함과 갑갑함에 자꾸 전화기에 눈길이 갔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책상만 톡톡 두드리고 말았다. 전화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이미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써 생각을 돌렸다.
어쩌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사적인 일 아니면 주말이라 일찍 퇴근한 것뿐이겠지. 임용 문제라면 선생님들 표정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만일 문제가 생겼다면…….’
이경석의 스승은 송재덕 교수다.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얼굴과 이경석의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이 있다고 해도 임용에 관한 일만은 송재덕 교수의 표정을 믿는 것이 지당했다.
“경석이 형 문제를 두고 웃을 분이 아니지. 웃으셨다는 건 일단 임용은 됐다는 말이야.”
상반된 심경에 복잡함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다 말고 흠칫 놀랐다.
어느새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오늘의 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일단 마음에 묻고 냅다 집으로 달렸다.
‘경아 씨에게 언제 말할까?’
새 차를 인수한 후? 아니면 그 전에?
좋은 일도 한꺼번에 터지면 어지럽고, 희석되기 마련이었다. 차를 인수하러 가는 내내 입 꾹 다무느라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일단 차부터 해결하고 말하자.’
알려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고경아의 의지와 손에 가족의 미래와 운명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었다.
기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손때 묻은 물건을 떠나보내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김지훈도 어느 정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발이 되어 준 차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잘 가라. 그동안 고장 나지 않고 잘 버텨 줘서 고맙다.’
뭔가 허전한 가운데 오래된 차 열쇠를 건네고, 기대감에 넘쳐 새 열쇠를 받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차 문이 열렸다.
고경아가 룸미러에 작은 십자가 하나 걸고, 트렁크에 하얀 실타래로 맨 북어 한 마리를 고이 모셨다.
무교인 데다 무속 신앙은 질색이었지만 항상 무사하기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이었다.
‘이거 북어 냄새 배지 않나?’
찜찜해도 활짝 웃어야 할 일이었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순간, 다시 못 볼 차에 대한 아쉬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부우웅! 스르르!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엔진 음, 부드럽게 치고 나가는 차체, 넉넉한 힘은 만족 그 자체였다. 이런 날 드라이브와 외식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입이 근질거릴 정도로 할 말이 있는 참이었다.
“경아 씨, 간만에 양수리나 갑시다.”
“날도 추운데 양수리를 가자고요? 희연이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튼튼하게 키워야죠. 6개월 될 때까지는 감기도 잘 안 걸리고. 겨울 강가! 꽤 운치 있을 겁니다.”
부우웅! 부우우웅!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탓인지 차가 많지 않았다.
길들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살짝살짝 밟아 가며 새 차가 주는 행복과 만족감을 만끽했다. 여전히 불편한지 희연이가 칭얼댔다. 멀미하는 아이가 차만 타면 운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희연아, 오늘 같은 날은 자야 하는 거야. 자자.’
양수리에 도착했다.
해 뜨는 집이라고 생물을 취급하는 유명한 집이 있다.
이 시간이면 쏘가리가 떨어질 무렵인데 다행히 몇 마리 남아 있었다. 새 차 뽑은 기념으로 가장 비싼 쏘가리 매운탕을 시켰다.
희연이는 어차피 분유나 이유식이다.
“사장님, 어제 많이 잡혔나 봐요.”
“들쭉날쭉하지만 내가 거래하는 어민만 50명이 넘습니다. 이 정도는 다 팔아야 먹고살죠.”
장사하는 사람 특유의 엄살을 뒤로하고 매운탕을 즐겼다. 쏘가리만의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식감과 포만감은 기분마저 붕 뜨게 했다.
배를 채우고 카페로 향했다.
조금씩 힘들어하는 희연이를 어르고 달래며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노란 조명 빛을 받아 반짝이는 어두운 밤 속 겨울 강가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즐길 만큼 즐겼다.
근질거리는 입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제 본론을 말해 볼까?’
“경아 씨, 오늘 이사장님과 면담했어요.”
“어머? 그걸 왜 이제 말해요?”
“급할 거 없잖아요. 계약서에 따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리 났다.
조교수 임용과 유학 결정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가족이기에 누구나 그럴 것 같았지만 그동안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뒷바라지한 아내의 마음이었다.
“고마워요. 경아 씨 아니었으면 아직도 먼 일이었을 거예요. 우리 희연이 혼자 키우게 해서 미안해요.”
공연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런 말 말아요.”
감정이 북받쳤는지 급기야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었다. 흔히 보는 눈물이 아니었다. 기쁜 일도 많았겠지만, 그만큼 힘들고 서러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부부란 이런 관계일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경아의 붉어진 눈가가 눈물 나게 고맙기만 했다.
진지하면 도리어 눈물을 더 보일 것 같았다.
“그만 울어요. 누가 보면 이혼하자고 한 줄 알겠네.”
“너무 좋아서 그래요.”
아직도 울음 섞인 목소리다.
“나 혼자 떠나면 어떻게 희연이를 키울 거예요? 그 생각은 안 해요?”
“방법이 있겠죠. 지훈 씨, 열심히 살아 줘서 너무 고마워요. 나 정말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나 같은 남편이 드물긴 하죠.”
말을 하고 보니 정말 그렇다.
수술 있다고, 환자 있다고, 세미나 한다고, 수술 준비해야 한다고 밥 먹듯 퇴근 시간을 어겼다. 툭하면 직장에서 날밤을 새웠으니 드물긴 드물 것이다.
아니다.
세상에 고경아와 같은 아내와 엄마가 수없이 많듯 세상의 남편, 아버지 또한 대부분 그렇게 살 것이다.
고경아가 눈물을 닦으며 째려보았다. 결혼 초 허구한 날 홀로 보낸 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희연이를 낳은 후에도 남편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 한편으로 그 모습조차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고소하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제 더없이 중요한 말이 남았다.
“경아 씨, 우리 학교에 간호학과 있는 거 알죠? 간호사 연수 겸 장기적 교수 자원 확보 때문에 이번에 연수 갈 사람을 선발한대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고경아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 점점 진지해졌다. 선발되면 함께 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없는 기회라는 것은 확실했다.
고경아의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온갖 쟁쟁한 이력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다. 그에 반해 내세울 것이 없었다.
꿈이 있었지만 병원 근무를 시작하고, 결혼이 이어지며 점점 희미해진 꿈이었다.
실전적인 문제는 경력이 쌓였다고 해도 이론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불과 3개월 남았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며 새롭게 공부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지훈 씨, 내가 자격이 될까요?”
당연한 걱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장래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며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나이를 구별하거나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격이요? 누군 자격을 갖고 태어나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잖아요. 해 보지도 않고 자격부터 말할 때가 아니죠.”
“교수 확보를 위한 연수라면서요. 일반적인 연수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책 본 지도 너무 오래됐고요.”
“후회는 결과가 나온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경아 씨는 나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스승님도 경아 씨가 어떤 사람인지 딱 꿰뚫어 보고 계셨어요. 할 수 있어요. 해야만 해요. 그래야 우리 가족 모두 함께 떠나죠.”
지금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은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것이다.
입에 침을 튀어 가며 도전을 설득했다. 자신 없어 하던 고경아도 조금씩 마음이 기우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못 믿어요? 이번 주에 공고 난다니까 지금 결정하고 바로 준비 시작하면 무조건 됩니다. 뭐든지 할 테니까 남편 믿고 달려 봐요.”
“정말 날 도와줄 수 있어요?”
“당연히…….”
헉! 미처 생각이 닿지 않은 일이 있다.
고경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직장 일에 희연이 보며 집안 살림까지 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빤했다.
결국 그 모든 일을 자기 앞가림도 벅찬 김지훈이 대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퇴근은 몰라도 최소한 경아 씨가 공부할 시간만큼은 만들어 줘야 하는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갑자기 엄청난 벽이 훅 치고 들어왔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고경아에게 했던 말은 자신에게도 해당됐다. 체력적으로 훨씬 불리한 고경아도 지금껏 꿋꿋하게 해 온 일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가 봐야 알 일이었다.
‘해 보지도 않고 고민만 해서는 안 돼.’
“시간 때문에 걱정하는 거죠?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요. 어떻게든 빨리 퇴근할 테니까 경아 씨는 공부에만 집중해요. 절대 나 혼자 못 갑니다.”
“지훈 씨가 도와준다고 해도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자신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고민하며 대안과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기운을 북돋아 줄 때였다.
“할 수 있다니까요. 직장 다니면서 희연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까지 한 사람이 그까짓 걸 못하면 말이 돼요? 경아 씨, 자신에게 투자해요. 아니다. 경아 씨만을 위한 일이 아니네. 나하고 희연이에게도 무지무지 중요한 일이라고요.”
내친김에 다른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 뻥뻥 쳤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배수진을 치고 달려들어야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고경아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희연이가 한계에 다다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경아는 말이 없었고, 김지훈은 확실하게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가져요. 어떤 사람들이 지원할지 모르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거예요.’
집에 도착했다.
먼저 들여보내고 주차를 했다. 돌아서려는 순간 반짝거리는 차가 보였다.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유학 가면 이 차는 어쩌지? 아무리 오래 타도 5~6개월이네. 어후! 생돈 주고 산 차를 일이 년 동안 그냥 이대로 묵혀야 하나?’
별 게 다 발목을 잡았다.
차를 가져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이다.
더 좋으면서 더 싼 차를 살 수도 있겠지만, 살면서 이런 헛발질을 한 적은 없었다.
속상하고 어이가 없어 뒷골이 욱신욱신, 없던 편두통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네.’
어기적어기적 집으로 들어갔다.
속만 태우며 희연이를 재우고, 잘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씻는다고 나간 고경아가 함흥차사였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경아가 책장에 고이 꽂혀 있던 책을 꺼내고 있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으며 때론 책갈피를 뒤졌다.
‘경아 씨, 잘될 거예요.’
마음의 응원을 하는 순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고경아가 낡은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웃고 있었다.
지난날의 추억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두 눈망울 속에 확연하게 들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가가 붉게 물든 채였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거리며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남편이 아내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돌연 마음까지 시려 왔다.
막연하게 느껴 왔던 아내의 희생이 이제야 절절하게 느껴졌다. 아무 말 안 하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꿈을 감춰야 했던 한 사람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고경아의 숨은 아픔이 다가왔다.
‘후우! 내가 잘 살아온 걸까? 나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살포시 안아 주고 싶었지만 고경아만의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시험이라는 관문 하나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꿈과 희망을 되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방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