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27화 (927/1,329)

10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Ⅱ (2)

인턴 1년, 전공의 4년, 펠로우 2년, 전임 1년을 거쳐 의사 된 지 8년 만에 마침내 조교수가 됐다. 의대까지 따지면 14년 만이다.

남자인 경우 군대 3년이 더 있고, 통상 전임 2년을 거친 후에 조교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의 반 타의 반 4년이란 시간을 당겼다.

그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열심히 살아왔기에 떳떳했다. 신분이 안정되는 것은 물론 어엿한 교수로 불려도 결코 남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직위는 바뀌지만 써전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최고의 써전이라는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라는 자리가 주는 명예나 포장이 아닌 의미에 충실한다면 대가라고 불리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생각만으로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누구보다 고마운 사람이 떠올랐다.

‘경아 씨, 나 조교수 됐어요. 정말 고마워요. 스승님, 감사합니다. 후우! 침착하자. 이제 시작일 뿐이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다. 아직 해야 할 말도 남았잖아.’

“감사합니다.”

애써 호흡을 고르며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혼자만의 덕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에게도 인사했다.

“김지훈 선생, 이 자리까지 무난하게 올라와 줘서 우리가 고맙다. 축하한다. 그동안 열심히 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길 바란다.”

멘토로 삼았던 이혁민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인턴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하얀 목도리를 하고 나타나 리포트를 내주던 모습이 겹쳤다.

‘어느새 8년이 지났네.’

“지훈아, 교수야, 이제 정말 교수구나. 잘했다. 잘했어. 이제 부교수를 향해 달리자. 허허! 좋다, 좋아.”

송재덕 교수는 감개무량한지 따스한 눈길을 주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불현듯 천안 병원에서 신현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준 수술이 생각났다.

‘현수, 일석이, 경석이 형을 비롯해 모든 동료들을 한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 고맙고 감사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갖 감정과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스승님, 절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훈아, 정말 수고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훗날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았을 때 후배들을 지금과 같은 정성으로 이끌길 바란다. 고맙다.’

“축하한다.”

오고 간 말은 단 두 마디에 불과했지만 뜨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스승과 제자가 평생 기억하고, 간직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윤재철이 웃었다.

“제일 축하해 주고, 가장 말씀 많이 하셔야 할 분은 여전하시네요. 자!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았습니다. 축하는 나중에 하시고, 유학 문제를 상의했으면 합니다. 김지훈 선생님, 가셔야겠죠?”

조교수 임용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또박또박 확실하게 대답했다.

“예. 가고 싶습니다.”

“유학을 가게 되면 계약에 따라 최소 1년에서 최대 2년간 본인에게 소요되는 일체의 경비를 지급하게 됩니다. 단, 돌아온 이후 5년 이상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시기와 기간부터 상의해 볼까요?”

바랐던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떠나는 시기와 체류 기간을 제 마음대로 정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소하지만 당연히 제한이 있습니다. 인력 수급을 생각할 때 아무리 늦어도 올해 전반기에는 가야 우리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습니다. 가급적 빨리 결정하면 그만큼 서로에게 좋습니다. 체류 기간은 출발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반기에 출발하면 2년을 꽉 채울 수 있지만, 후반기에 가면 1년 이상은 어렵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계약서에 따른다고 해도 파격적인 조건임은 틀림없었다.

문제는 내심 내년에 갈 생각까지 했는데, 전반기에 떠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시간도 문제지만 고경아와 희연이 얼굴이 떠오르고, 스승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간 유학 겸 연수를 갈 수 있다. 만일 혼자 가야 한다면 그동안 가족과 스승의 곁을 떠나야 한다.

날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치를 깨고 나와야 하지만 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동안 스승의 업무 또한 과도하게 많았다. 오창도가 가세한 덕에 이제야 다소 편해졌다. 여기서 한 명이 빠진다면 또다시 예전처럼 근무해야 할 것이다.

‘간이식까지 겹치면 정말 일이 많아질 텐데 괜찮으실까?’

고경아와 희연이는 더 걱정이었다.

공식적으로 유학 문제가 거론되자 막연했던 걱정이 피부로 와닿았다. 며칠만 못 봐도 그리울 텐데, 일이 년 동안 떨어져 살 자신이 없었다. 적응은 고사하고 흔히 말하는 향수병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희연이, 경아 씨가 없는데 제대로 배울 수나 있을까?’

그것뿐일까?

가족 모두 함께 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추가되는 비용은 고려할 계제가 아니었다.

고경아의 경력 단절이야말로 유학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절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여러 면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했다.

결국 유학 가기 적당한 날, 좋은 날은 없었다.

뾰족한 대안 자체가 없었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송재덕 교수가 물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얼굴이 왜 그래? 혹시 가족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와이프 직장 문제도 그렇고, 아이가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내년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스승에게도 눈길이 갔다.

“지훈아, 교수야, 올해나 내년이나 다를 게 없어. 똑같아. 네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돼.”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사람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포기하기도 한다. 결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작 멍석을 깔아 주었는데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사님,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우리도 일이 년 앞을 보고 인력 운용 계획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가급적 빨리 결정해야 김지훈 선생에게도 유리합니다. 늦어도 5월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해야 간신히 2년이 보장됩니다.”

5개월이나 남았지만 남은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걱정되는 모든 일들이 그 안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답답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묘한 눈초리로 김지훈을 보았다.

‘녀석! 내 눈치는 왜 봐? 희연이와 경아가 가장 마음에 걸리겠지. 부부가 함께 갈 수 있다면 고민거리가 많이 줄 수 있을 거다.’

눈길을 돌리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사장님, 일전에 말씀하신 일은 어떻게 결정됐습니까?”

“무슨 일 말입니까?”

“간호사 연수를 계획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 얘기요. 이사회 승인이 나면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하는 일이라 별다른 이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요건이나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윤재철이 나섰다.

“미래 교수 자원 확보가 목적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연수 성격이 강해 병원 근무 경력이 7년 이상이면 대상자가 됩니다. 단, 말씀드린 것처럼 간호학과 교수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3월 말에 있을 필기시험과 면접 통과가 쉽지 않을 겁니다. 경쟁도 만만치 않을 테고요.”

“연수 병원은 정해졌습니까?”

“여러 병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인지도 있는 병원으로 정해지지 않겠습니까?”

“언제 출발하게 됩니까?”

“5월 말에서 6월경이 될 겁니다. 기간은 1년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며칠 내로 이사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내리고 공고할 생각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김지훈 선생 부인 되시는 분이 우리 병원 간호사 선생이군요. 출발 시기도 묘하게 겹치네요.”

스승의 눈길이 제자에게 향했다.

고경아의 경력은 김지훈보다 오래됐다. 가족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일 부부가 함께 연수를 가게 되면 그야말로 일거양득,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김지훈 역시 간호사 연수 계획을 듣는 순간 곧바로 고경아를 떠올렸다. 하늘도 부부를 어여삐 여겨 특별하게 준 기회가 분명했다.

‘와! 이거야말로 큰 기회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화색이 돈 김지훈이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둘 착착 해결됐다. 준비 중 발생할 소소한 문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이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아 씨가 선발만 되면…….’

그 순간 성급함이란 놈이 경고음을 울렸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반짝이던 눈빛이 이내 사라졌다.

‘경아 씨가 같이 갈 수 있다면 희연이 키우는 일까지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지만, 우리 과는 물론 스승님도 문제야. 제대로 상의하지도 않고, 나 편한 대로 무작정 떠날 수는 없어.’

스승의 마음에 도리어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고경아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남편이 대신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중함이 필요했다.

“5월까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오늘 들어서 당장은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아 충분히 생각하고 빠른 시일 내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와이프 일 역시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원하는 일을 덥석 물지 않는 모습에 김지훈의 정신적 성장을 엿볼 수 있었다. 더구나 말은 안 하지만 무슨 걱정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지훈 선생, 다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과 문제는 송재덕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 박 교수하고 이미 말이 끝난 상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게 좋다. 갈 수 있을 때 가는 게 맞아. 나이 들면 편할 것 같아도 걸리는 일이 더 많아진다. 신 교수 봐라. 일 년도 못 채우고 돌아오잖아. 가자. 유학 가자. 더 잘난 놈 한 명 보자.”

어찌 보면 사적인 말이었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런 대화가 바로 김지훈과 함께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왜 당장 못 보내서 안달이시지?’

“선생님, 사실 올해 꼭 가야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내년이나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텐데, 제가 아무 준비도 없이 빠지면…….”

이혁민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마음은 고맙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도 탈이다.’

“김지훈 선생, 일반외과는 GS다. 내가 예전에 G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나?”

엉뚱한 말이었지만 의미 없이 물을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General이자 Great라고 하셨습니다.”

“맞다. 신현수 선생은 일찍 떠나서 우리 나름의 준비를 못했지만 김지훈 선생은 아니다. 내가 왜 간담도를 택한 의사에게 유방, 갑상선을 맡겼겠나? 신기동 교수는 왜 혈관 주임 교수라는 말까지 했을까? 결정적으로 이준영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지켜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 선생 다음으로 이경석 선생이 가야 한다. 유학 가 있는 동안 김지훈 선생이 했던 일을 그대로 해야 할 거야. 그래야 하는 이유는 제네랄, 즉 기본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그레이트란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이 배워 와서 우리 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면 좋겠다.”

설마 펠로우 될 때 이미 더 넓은 곳으로 보낼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설픈 의사는 깨진 바가지나 다름없다. 안에서 새면 밖에서도 샌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모두 낭비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하윤호가 그랬다.

왜 그렇게 다양한 분야를 익히고 배우게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일수록 인생에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보다 확실하게 잡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그래도 경아 씨가 합격되어야…….’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확신에 찬 말이 들렸다.

오늘따라 정말 말이 많아진 이준영 교수였다.

“김지훈, 네게 가장 유리한 길을 따라가면 돼. 경아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너보다 더 노력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보다 강력한 말은 없었다.

스승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말대로 고경아는 분명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반드시 기회를 잡을 사람이었다. 탈락은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웠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설퍼 보였지만, 하나하나 아귀를 맞춰 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한다면 부족한 부분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결정을 내렸다.

‘스승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혁민 선생님, 송재덕 선생님, 박승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올해 전반기 내에 출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미소로 김지훈의 결정을 존중했다.

유학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마어마한 돈을 더 투자해야 하는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수가 가장 믿는 의사에게 투자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투자할 수 있겠어.’

일일이 인사하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무엇인가 가슴속을 꽉 채웠다.

조교수가 됐다는 사실,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 가족과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준 벅참과 흥분일 것이다.

훅훅!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김지훈이 병동으로 향했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현수와 이경석은 결과를 나눠야 할 동기들이었다. 더구나 임용 문제까지 논의된 자리였다.

병동에 도착한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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