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Ⅱ (1)
형식적인 물음에 불과해 대답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경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인지, 무엇인가 다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의미 모를 기대감을 보이며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신현수의 고민이 의외로 길어졌다.
‘조교수 임용 후에는 심각한 결격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병원 마음대로 그만두게 할 수 없다. 그런 자리를 결정하려면 아버님 말씀대로 모든 면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돼.’
조교수 임용 등 행정적 문제를 쉽게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실제 아버지인 신동철 이사장에게 올해 배정된 조교수 정원이 2명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들었다.
당연히 욕심이 났고,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결과는 분명해 보였다. 대상자는 김지훈과 자신이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신동철 이사장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현수야, 병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누구보다 넓고, 크게 보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다.’
언젠가 병원 경영을 맡아야 할 위치를 떠나 지극히 원론적이고 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교수 임용과 어울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 탓에 도리어 무슨 의미가 담긴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의미가 방금 전 합당한지 묻는 말에 돌연 확연하게 다가왔다.
‘단기적 실적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펠로우가 된 이후 우리가 보인 모든 행동과 자세가 기준이 돼야 해. 보편적이지 못하면 합당함도 없다. 경석이 형은 내가 먼저 조교수가 돼도 이해하겠지만, 과연 다른 과 사람도 똑같은 태도를 보일까?’
2년 근무와 3년 근무의 차이, 이사장 아들이기에 특혜를 받을 것이란 시각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최선을 다해 왔기에 이경석 역시 내심은 무척 서운할 것이다.
인사만큼 공명정대해야 할 일은 없었다. 오죽하면 인사가 만사라는 말까지 있을까?
신현수가 어깨를 활짝 폈다.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합당한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윤재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 펠로우 과정을 모두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제 돈도 아닌 병원 지원으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그러고도 이경석 선생과 실적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할 전임으로서 가장 모범을 보인 사람이 이경석 선생입니다.”
“그래서요?”
“결격 사유가 없다면 조교수가 돼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경석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펠로우 일 년과 전임 일 년만 거친 저는 아직 자격이 없습니다.”
가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모두들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1년 빨리 임용되면 그 시간만큼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 얼마나 큰 변화와 도약이 있을지 전임 중 가장 잘 알 텐데 스스로 양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멍해질 지경이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윤재철이 한참 만에야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후회할 일이 아닙니다. 조교수 임용이 늦어진다고 해서 부교수 임용까지 늦는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공정하게 경쟁해 다음번에는 제가 먼저 임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현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인사 위원회 추인만 남은 조교수 임용을 본인이 거절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불안정하기에 오히려 미래에 대한 열망과 보장으로 가득해야 할 전임이 말이다.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새로운 상의가 필요하다는 눈빛이 오고 갔다.
“신현수 선생님, 잠시 옆 회의실에서 대기해 주세요.”
나직한 목소리가 오고 갔다.
신동철 이사장은 입을 꾹 다문 채 경청했고, 윤재철과 교수들은 신중의 신중을 기했다. 째깍째깍 나직한 초침 소리 속에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쉽게 결론을 낼 사안이 아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결론이 났다.
다시 자리에 앉은 신현수의 어깨에 긴장이 잔뜩 걸려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오해 없이 받아들여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신현수 선생님, 어떤 생각인지 충분하게 알았습니다. 우리가 내린 결정에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또다시 상의하거나 번복할 수 없습니다. ‘예, 아니요.’로만 대답해 주세요.”
힐끗 문밖을 본 신현수가 훅! 숨을 내뱉었다.
‘번복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를 위한 결정이다. 만일 기존 결정을 고집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주저하는 모습에 이혁민 교수가 엄한 눈길을 보냈다. 마치 우리가 그런 면 하나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하겠냐는 얼굴이었다.
“예.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 내린 결론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다.
“없습니다.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일차적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조교수 임용은 선생님 생각보다 훨씬 중차대한 일입니다. 일주일 후 개별 통지하겠습니다.”
확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재검토한다는 말이었다. 모든 상황을 유추해 생각하면 사실상 결론이 났다는 의미였다. 정식 절차와 형식을 다시 갖추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뤘을 것이다.
신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저를 위해서라도 제 뜻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조용히 그 모습을 보던 송재덕 교수가 돌연 크게 웃었다. 심각한 상황에서 터진 웃음인데 누구도 책망하거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이사장님, 우리 신현수 선생 속이 꽉 찼습니다. 사실 전임들 다 조교수 자격이 넘치고도 남지 않습니까? 경석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마음 상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 됐습니다. 허허! 허허허!”
지나가는 말속에 정보가 가득했다.
윤재철이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원장님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장님, 임용 자격 여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없다면 혈연을 배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말씀대로 됐습니다. 따로 불러서 특별히 하신 말씀은 없는 거죠?”
신동철 이사장이 딴청을 피우면서 고개를 저었다.
“딱히 한 말은 없는데, 저놈이 참! 허허허!”
“신현수 선생, 지금처럼 열심히 해 주길 바랍니다. 이사장님, 자식 임용 문제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은데 무거운 짐을 더셨습니다.”
나직한 헛기침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만 가자. 누구보다 병원 경영을 잘할 것 같구나.’
더 멀리, 더 크게 보며 눈앞의 이득을 포기할 줄 아는 자식은 자랑이었다.
신현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눈가에 걸린 주름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현수야, 움켜쥔 채 단 하나도 놓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가진 사람의 여유와 아량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 좋은 법이다. 앞으로도 이미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또다시 신현수를 칭찬하는 말이 들리자 도리어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그만들 하시죠. 이러다 대단한 일 한 줄 알고 헛바람 들겠습니다. 소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인정한 이경석 선생을 칭찬하셔야죠.”
이준영 교수가 정점을 찍었다.
“이사장님, 절대 그럴 선생이 아닙니다. 신현수 선생, 정말 고맙다. 써전답다.”
대단한 칭찬이었다.
“이 교수, 무슨 소리야? 현수하고 경석이는 원래부터 써전이었어, 써전. 잘 배웠다. 잘 배웠어. 내가 너희들 가르치느라고 주름살 깊어진 건 아니? 알지? 잘해라. 잘하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퍼졌다.
갑갑했던 조교수 임용 문제가 모두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임용을 포기한 신현수가 가장 기뻐하고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다.
이미 많은 것을 손에 쥔 사람은 대부분 욕심을 더 부린다. 단 한 번의 양보가 얼마나 큰 득이 돼 돌아오는지 모르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신현수는 이미 병원 경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는지도 몰랐다.
회의실 안이나 밖이나 시간이 꽤 지났다.
‘어후!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지지? 경석이 형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묻지도 못하겠네. 설마 일이 잘못된 건가?’
초조함에 서성거리던 김지훈이 귀를 활짝 열었다.
누가 들어도 유쾌한 웃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긴 이경석과 너무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머쓱함과 어색함에 입맛만 다셔야 했다.
‘분위기 정말 이상해지네.’
이경석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의 바람과 원칙대로 임용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리가 분명했다. 답답한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현실을 부정하면 몸과 마음이 다 힘들어진다.
‘선생님들이 이렇게 크게 웃으신다는 건 부담을 덜었다는 말이겠지? 깨끗하게 승복하길 잘했어. 역시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게 맞아.’
문이 열렸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경석이 벌떡 일어나 신현수의 등을 두드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백팔십도 다른 얼굴이었다.
신현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쳤다.
‘정말 잘 결정한 것 같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회의실에서 나온 이후 내내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던 이경석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 하루 이틀 내에 지워질 감정이 아니었다. 신현수를 보자 확 달라진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다가왔다.
목소리가 절로 가라앉고 말았다.
“현수야, 무슨 일 있지?”
당사자가 된 이경석도 알면 안 되는 일이었다. 민망함을 넘어 화를 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교수들까지 모두 비밀을 엄수하기로 했고, 입 밖에 내면 제 얼굴에 스스로 금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신현수가 흔히 보던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 후에 통보한다는데 웃을 상황이겠어? 형, 최종 결정이 난 것도 아닌데 얼굴 풀어요. 분위기 이상해지잖아요.”
“난 괜찮아. 원칙대로 결정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
“아직 결정 안 났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김지훈, 뭐 해? 다들 기다리고 계시니까 빨리 들어가 봐.”
신현수의 말이 묘해 도리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누군가 한 명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을 보면 이경석이 바로 당사자일 것이다.
“현수야!”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일주일 후에 통보받아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야. 경석이 형, 가시죠.”
때마침 이름이 들렸다. 꼬치꼬치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눈길 한 번 주고, 옷매무새를 살핀 후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직도 유쾌한 기운이 남았는지 교수들을 비롯해 신동철 이사장까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뒤죽박죽이네. 경석이 형 얼굴이 저 정도면 절대 웃으실 선생님들이 아닌데 정말 이상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무리 궁금해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다. 일단 앞가림부터 확실히 할 일이었다.
마음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 한 잔이 나왔지만 손도 가지 않았다.
탁자 구석에 자료가 잔뜩 쌓여 있었다.
예전 기억을 살려 볼 때 분명 실적인데, 누구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는 모습에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펠로우나 전임 될 때하고 똑같은데 왜 이렇게 떨리지? 스승님까지 계셔서 그러나?’
스승 앞이라고 할 말 못하면 바보다.
계약할 때, 혹은 이행 여부를 확인할 때는 최대한 감정적인 요소를 버리는 것이 마땅했다.
머릿속에 담긴 계약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자.’
윤재철이 슬쩍 자료를 잡았다.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야흐로 인생의 갈림길이자 전환점이 될 대화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돌아선 후에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선생님들은 조언자일 뿐 결정은 내가 한다! 확실하게!’
불끈 쥔 주먹에 힘이 팍 들어갔다.
팔랑팔랑 실적 자료가 넘어갔다.
긴장이 점점 치솟을 줄 알았다.
때때로 막상 큰일이 닥치면 도리어 차분해지는 것처럼 의외로 담담해졌다. 누구 앞에 내놔도 자신할 수 있는 실적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윤재철이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님, 지난 일 년 우리가 바랐던 이상으로 열심히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당을 포함해 계약서 내용을 확실하게 이행했다고 생각하는데, 불만스러운 점은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 결정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조교수 임용 문제입니다. 기대한 대로 올해 조교수 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윤재철이 잠시 말을 끊었다.
문득 이경석이 떠올랐지만 산만해지면 안 된다. 차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교수님들을 포함해 인사 위원 모두 조교수 임용에 어떤 결격 사유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올해 3월 1일부로 임용될 겁니다. 조교수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너무 쉽게 결정 사항을 들었다.
얼떨떨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묵묵히 뒷바라지를 한 고경아가 떠올랐다.
스승의 과묵함 속에 흥분이 실려 있었다.
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낸 날부터 지나온 수많은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며 차분했던 가슴이 울렁거렸다.
드디어 조교수다!
너무도 벅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