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25화 (925/1,329)

9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Ⅰ (2)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조만간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재단에서도 말이 나올 것이다. 이럴 땐 일단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당면한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간이식이다.

칭얼대는 희연이 업고, 자료 뒤지는 일 꽤 힘들었다. 그나마 한 시간 정도 업어 주면 잠이 들어 다행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엄마는 어떻게 견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위대하다고 하는 모양이다.

잠자리에 들 무렵 고경아가 조용히 말했다.

“병원하고 얘기할 때 잘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돼요. 우리 밥은 우리가 챙겨야지 다른 사람이 일부러 챙겨 주진 않잖아요. 유학은 일단 지훈 씨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경아 씨하고 희연이는요?”

“우리 가족에게 가장 무난한 방법을 찾아봐야죠.”

나직한 한숨 속에 자기 자신의 희생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한없이 미안하고 고맙기만 했다.

불현듯 유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 물 먹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 정신 바짝 차리고, 눈과 귀를 열면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어. 에휴! 재수 없게 하윤호 생각은 왜 나는 거야.’

여러 생각 속에 1월 l일을 보냈다.

새해 첫 출근이다.

여느 때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가슴은 새해를 맞는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했다. 더구나 최철한이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모든 교수가 모인 가운데 새해 첫 커피 타임을 가졌다.

시무식이랄 건 없었다. 이혁민 교수의 간단한 당부의 말과 최철한의 인사로 갈음했다. 구미 병원 과장 경력이 있지만 서울 병원 근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아 더욱 그럴 것이다.

“올해도 열심히 살자. 해야 할 일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많아. 지훈아, 현수야, 경석아, 벌써 전임 2년 차구나. 2년 차. 흐음! 그렇구나. 그래.”

전임들을 보는 눈길이 묘했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뭔가 감을 잡은 눈치였다.

김지훈은 최철한을 보며 유방 수술을 어떻게 진행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한 가지라도 깔끔하게 벗어나야 다른 일도 잘 풀릴 것이다.

“회진들 올라가시죠.”

이혁민 교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줄줄이 병동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문득 고경아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지만 확정되기 전까지는 신경 끊는 것이 속 편한 일이었다. 물론 자기 밥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번 주 기다려 보고, 말 없으면 면담 요청해야겠다. 잘했든 못했든 조건을 충족했으면 계약을 이행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생각만으로도 은근히 가슴 떨렸다.

환자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가급적 빨리 가부간 결정이 나기를 바랐다. 여러 문제가 잘 풀려 갑작스럽게 유학길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아니겠지?’

김지훈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언제 가는지가 문제지 절대 계약을 어길 리 없어. 이사장님이나 현수 장인어른은 그럴 분들이 아니야. 그나저나 영어는 현수한테 특강을 받아야 하나?’

영어 회화는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었다.

별별 설익은 고민 속에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해가 뜨고 해가 졌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오창도와 함께 보는 덕에 진료가 일찍 끝나 바로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최철한이 참가하는 첫 유방 수술은 유방암이었다.

“김지훈, 오늘은 세컨 서라. 오하석, 졸지 마라.”

미처 입을 열 틈도 없이 수술이 시작됐다.

졸지에 전공의 신세가 됐다. 아니, 정규 수술은 치프도 세컨을 서지 않는다. 꼼짝없이 2년 차 이하로 강등됐다. 간만에 보는 유방암 수술인데 눈물부터 앞을 가렸다.

‘말이 그렇다고 하셨는데 이게 뭡니까?’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속으로일 뿐이었다.

리트랙터를 잡은 손이 왠지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이왕 들어온 수술이었다. 어떤 수술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없었다.

침착하게 눈물 닦고 수술에 집중했다.

유두 부분을 포함해 길게 절개된 피부를 따라 유방을 들어내는 이혁민 교수의 손길은 정확하고 차분했다. 혈관을 잡고,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임파선 절제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섬세했다.

“최철한, 여기까지 하면 되겠나?”

머뭇거렸다.

구미 병원 상황상 유방암 수술은 전공의 때 이후로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최신 경향이나 암 기수를 안다고 해도 실전은 다른 법이었다.

“흐음! 김지훈, 어떻게 해야 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더 절제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2기가 넘은 데다 CT상 임파선 전이 깊이가 꽤 됩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최철한, 수술 끝나고 나 좀 보자. 김지훈, 다음 수술은 퍼스트 서라.”

최철한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첫날이라고 봐줄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매 수술마다 조곤조곤 다져지지 않으려면 김지훈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할 판이었다.

남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잘근잘근 다져지는 김지훈을 보며 더욱 확신하게 됐다.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네. 후우! 구미 경험만으로는 부족해. 다른 수술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겠다.’

모든 수술이 끝난 후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불똥은 왜 항상 눈앞에서 펑펑 튀는 걸까?

***

새해 첫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연초의 가벼운 흥분과 들뜸은 남의 일이었다.

김지훈과 오창도는 변함없는 위력을 보였고, 첫 당직을 선 최철한도 만만치 않은 일복을 선보였다.

간이식 준비 역시 착실하게 진행됐다. 손만 믿고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면 신무기를 장착했을지도 모를 신기동 교수에게 작살 날 것이다.

거의 쉴 틈이 없는 김지훈이 시도 때도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흥얼대 다들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내긴 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란 말이지? 음! 헌 차 주고 새 차 갖고 오는 날이군. 흐흐흐흐! 얼마나 조용할까? 얼마나 부드럽게 나갈까?’

생각만으로도 몸이 바짝바짝 달아올랐다.

고경아도 분주하게 두드리던 계산기를 던져 버리고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그간의 성과와 고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 경제적 보상은 받고도 남아야 했다.

주말 집담회도 의연하게 맞이했다.

동네 아저씨 망치, 화염방사기, 도마를 갖다 놓고 작정한 채 이어지는 조곤조곤한 썰기까지 기쁜 마음으로 다 받아 냈다. 나쁜 일은 최대한 조그맣게, 좋은 일은 최대한 크게 맞이하는 것도 인생의 지혜일 것이다.

기껍게 집담회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커피 타임을 가졌다. 따스한 커피 향이 채 입 안을 감돌기도 전에 이혁민 교수가 전임들을 호출했다.

“커피 빨리 마시고 최철한 선생과 함께 별관 회의실로 와라. 김지훈 당직 섰나? 가운 새 걸로 갈아입어라.”

호출은 곧 일거리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인지 와서 보면 안다. 15분 후에 보자. 선생님, 가시죠.”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는 물론 박승준 교수까지 함께 일어났다. 이 정도 움직인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신현수는 뭔가를 아는지 긴장한 기색이었고, 몇 번을 물어도 안경만 고쳐 쓸 뿐이었다.

별관 회의실로 향했다.

평소 거의 이용하지 않는 장소라 낯설기도 했지만, 심각한 표정의 신현수를 보니 이유 모를 긴장이 느껴졌다. 최철한은 다소 의아한 얼굴이었다.

“최철한 선생님부터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는 순간 감 잡았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함께 있었다.

계약에 관한 일이 분명했다. 근무 시작 전 이미 면접을 보고 조건까지 정했을 최철한이 또 면담을 한다는 사실이 이상했지만, 온 가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 때문에 만나는 게 확실해. 경아 씨 말대로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갈 자리가 아니다. 이사장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똑 부러지게 대처해야 돼.’

이경석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데 현수하고 경석이 형도 1년 계약을 했나? 나야 유학 문제하고 조교수 승진 때문에 1년이라지만, 전임은 2년 계약 아닌가? 나하고 같은 조건으로 계약했나? 아니지. 현수는 이미 갔다 왔잖아?’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각자 자신이 공헌한 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선배이자 동료로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란 사실은 자명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겨야 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무조건 잘되기를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철한이 나왔다. 전임들을 보고 말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최철한 선생님, 뭐라고 하세요?”

“들어가 보면 알아. 내가 뭐라고 할 자리가 아니야.”

‘전임은 셋이고, 조교수 자리는 둘이라 많이 곤란하신 모양이네. 내 의견이 도움이 되셨을까?’

전공의 때 본 경험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접촉이 없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굳이 찾자면 김지훈과 몇 달간 구미 생활을 함께했고, 윤재철의 집중적인 질문을 받긴 했다.

잠시 후, 이경석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긴장된 얼굴에 김지훈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신현수는 평소처럼 냉정함을 유지하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후! 나부터 부르시지? 확실히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네.’

애꿎은 다리만 달달달 떨렸다.

이경석이 커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윤재철이 힐끗 눈길을 주고는 자료 3개를 내밀었다.

신동철 이사장과 교수들도 같은 자료를 보며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마저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경석 선생님, 전임 계약은 기본적으로 2년이지만 조교수 자리가 나오면 임용하겠다고 말씀드린 일 때문에 보자고 했습니다. 오늘 자격 여부를 함께 논의했으면 합니다.”

윤재철이 공식적인 입장에서 말했다.

재단 이사와 교수 간의 자리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용 자체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문제는 전임은 세 명인데 조교수 임용은 두 명뿐이라는 점입니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후 결정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어떠한 잡음도 피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자료부터 확인하세요.”

이경석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자세를 고쳤다.

한 명은 무조건 임용이 안 된다.

교수 임용은 교육부의 권한이 절대적이기에, 대학 병원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동안 뒷덜미를 잡아끌었던 일이었다.

조교수 임용이 한 해에 3명씩 이뤄진 적은 없었다. 예외가 없는 한 누군가 한 명은 고배를 마셔야 하고, 결정은 실적으로 좌우될 것이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자료가 넘어갔다.

이경석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졌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전임 3명의 실적.

진료 및 수술 건수는 물론 병원 운영과 일반외과에 공헌한 바까지 최대한 수치화시켰다.

최선을 다해 왔건만 실적 차가 눈에 보였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하루하루의 소소한 차이가 쌓이고 쌓였다.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지훈의 실적이 눈에 확 띄었다. 양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이렇게 차이가 크게 났었나? 솔직히 잠도 못 잘 정도로 가장 열심히 했고, 국내 최초라고 할 수술까지 여러 개 했는데 애초에 비교하기가 힘들겠지.’

갑갑한 가운데 신현수의 실적을 확인했다.

항목별로 보면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밀리는 감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사장 아들이자, 이사 중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윤재철의 사위다. 혈연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도 실적과 능력이 비슷하다면 누굴 임용할지 자명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문득 후배와의 경쟁에서 한발 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답답한 일이었지만 학교 다닐 때, 첫 인턴 근무를 시작했을 때 헛짓거리를 안 했으면 시간 낭비는 물론 이런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무의미하게 보낸 죄.

‘지금이 아니라 그때 이미 뒤처졌던 거였어. 남들 하는 만큼만 노력했어도 많이 달라졌겠지.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다 내가 초래한 결과다.’

역시 자업자득이다.

끈적끈적 미련이 남았지만 오래 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서먹함만 초래할 상황이었다. 까마득한 선배이기에 도리어 먼저 축하해 줄 일이었다.

‘아쉽지만 가장 공헌이 적었네. 내년에 조교수가 돼도 정상적인 임용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 자식들! 하필이면 그 많은 놈들 중에 너희들이 내 라이벌이냐. 재수도 없지.’

세상에 무임승차나 공짜는 없다.

애써 마음을 비우고, 미소를 머금었다.

‘축하한다, 김지훈, 신현수. 먼저 조교수 됐다고 유세 떨면 죽을 줄 알아.’

신동철 이사장이 눈짓을 했다. 윤재철이 눈가를 굳히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확보한 자료가 백 퍼센트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수님들께서 직접 작성하시며 의견까지 주신 자료입니다. 이 자료에 근거하면 명백히 선생님들의 실적은 차이가 있고, 아쉽게도 조교수는 두 명만 될 수 있습니다. 이경석 선생님.”

“예, 말씀하십시오.”

결과를 예측한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원칙대로 김지훈 선생님과 신현수 선생님이 조교수로 임용돼야 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먼저 임용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들 모두 안타까워했다. 송재덕 교수만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열심히 했으니 됐다. 경석아, 잘했다. 잘했어.’

이경석은 최소한 자신의 기분을 비틀지 않았다.

깨끗하게 수긍하는 모습에 자기 자신과 일반외과의 미래가 있었다. 지금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면 당장은 한발 늦어도 후에는 한발 앞설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 후 정식 통보가 있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신현수가 들어왔다.

같은 과정이 이어졌다.

조교수 임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것도 집안 힘이 아니라 스스로 이뤄 낸 결과였다.

그런데 표시 정도는 낼 줄 알았던 신현수가 얼굴을 펴지 못했다.

모두들 신현수 인생 최고의 라이벌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 김지훈의 압도적 실적에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윤재철이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신현수 선생님, 김지훈 선생님과 함께 임용되는 것이 합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까?”

머뭇거리다 못해 입술을 모은 채 고민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차갑다고 할 정도로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격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 답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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