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24화 (924/1,329)

9화.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Ⅰ (1)

어느새 금요일 아침이다.

지동훈 교수와 신현수의 몰골이 처참했다. 박승준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고, 오창도는 먼 산 바라보듯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공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하석과 차상수를 비롯해 수술이라면 밥보다 좋아하는 강병옥과 송진우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당직 때마다 거의 잠을 못 잔 데다 환자가 몰려 오프까지 반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 교수, 다른 병원 문 닫았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요새 무슨 일 있니? 그저께는 박 교수가 눈도 못 뜨더니 오늘은 자기하고 현수가 그러네. 한밤에 양방이 왜 이렇게 수시로 뜨는 거야? 이런 적 거의 없었잖아. 이유가 뭐야? 뭐니? 지훈아, 교수야, 넌 아는 것 같은데 뭐야? 뭐?”

송재덕 교수의 말에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오창도의 일복까지 겹쳐 가장 먼저 피곤죽이 된 박승준 교수의 눈길을 피해야 했다.

어제저녁 간이식 세미나를 대비해 요약 발표까지 한 신현수를 볼 낯이 없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아졌네.’

이혁민 교수는 뭔가 알아챘는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송재덕 교수의 눈길에도 당연히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연 다들 모를까?

세상에 비밀은 없다.

“그래. 그래. 상부상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올바른 일이라면 돕고 살아야지. 그게 세상이다, 세상. 우린 다 동료지, 동료. 암! 그렇고말고.”

‘우리가 다 알고 허락했다는 말이 나오면 H 병원과 껄끄러워질 수도 있어서 말을 안 한다 이거지? 박 교수, 잘했다. 그게 과장이 갖춰야 할 태도 중 하나다.’

복도를 울리는 동네 아저씨 웃음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실적 좋아졌다고 웃는 것이 아니었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모습에 도리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은근한 두려움 속에 금요일 저녁을 맞이했다.

간이식 세미나를 마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응급실 콜이 왔다. 겸사겸사 참석했던 이경석이 퇴근을 미뤄야 했다.

H 병원 응급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

환자 이송을 부탁하는 전화만 세 통을 받았다.

김지훈의 일복은 여전했고, 이경석은 배탈 난 사람 화장실 드나들듯 집과 병원을 오가다 결국 집을 포기했다.

평소 심각한 응급 환자를 이 정도 보았다면 정규 수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H 병원의 저력이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할 것이란 생각도 잠시였다.

이젠 병실 확보도 한계에 다다랐다. 마지막 이송 환자는 받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소나기였다.

주말마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 전에 교수나 전공의 중 한 명은 지쳐 쓰러질지도 몰랐다.

“경석이 형, 중환자실 환자는 누가 보고 있죠?”

“아마 상수가 있을 거야. 오프도 못 보내고 킵을 맡겼다고 진우가 무척 미안해하고 있어.”

제일 미안한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H 병원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네.’

이런 상황을 진충기가 모를 리 없었다.

토요일 아침, 직접 한 통의 전화를 걸어왔다.

내심 그동안 연락 한 번 없어 서운했던 참이었다. 물론 최종 결정을 내린 박승준 교수와 따로 통화를 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김지훈 선생님, 그동안 환자 받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과 동료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환자가 적진 않네요.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당연히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내용과 달리 목소리가 묘했다.

어떤 도움이 됐다는 말일까?

활기찬 듯, 체념한 듯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고생한 이유가 있다. 그 탓인지 마치 당사자인 것처럼 느껴져 결과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 감내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결되신 겁니까?”

나직한 한숨 소리만 들렸다.

아직도 요원한 일일까?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충기의 목소리가 더욱 나직해졌다.

(오늘 마지막 담판을 벌입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한 교수와 함께 내 발로 나갈 생각입니다. 더 이상 선생님들, 동료, 환자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네요.)

일반외과가 일주일이나 마비됐는데 아직도 결론이 안 나다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진충기와 한성희가 나간다면 그동안 기울인 노력 모두 헛된 일이었다.

H 병원 경영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조직이라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칙은 아니다. 때론 없는 것이 훨씬 나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사실을 두고 말이다.

‘심각하네. 오창도 선생님 말대로 무작정 억누르려 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우리도 현실적으로 한계에 부딪혔는데 어떻게 하지?’

(죄송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오늘 내로 결정을 내릴 거니까 조금만 더 참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병실이 거의 없습니다. 당직 선생님들도 모두 힘들어하고요.”

그 말 이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었고, 다른 말을 할 입장도 아니었다. 진충기 역시 답답한 숨만 내쉴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창도도 전화를 받았는지 일과가 끝날 때까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불쑥 불안감이 다가왔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주말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진충기라는 최고의 써전이자 절대적 라이벌인 한 명의 의사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까지 들었다.

일단 몹시 피로했다.

저지른 일이 있어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주말 당직인 박승준 교수와 백 듀티인 오창도에게 손이 정 모자라면 연락 달라는 말을 하고 퇴근했다.

한때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고 뭐고 잠부터 자야 했다. 고개를 반짝 들고 버둥거리는 희연이의 웃음소리는 자장가였다.

얼마나 잤을까?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환자가 폭주한다는 전화일까? 아니면 진충기에 관한 전화일까?

전화 한 통이 이렇게 큰 불안감을 줄지 몰랐다.

“여보세요?”

(오창도입니다. 주무실 것 같긴 했는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목소리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귀가 반짝 뜨였다.

“무슨 일이죠? 진충기 선생님 일인가요?”

(예. 결론이 났습니다. 진충기 선생님, 한 교수 모두 센터로 복귀하고, 최인호 교수님은 일신상의 문제를 모두 정리한 후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와! 정말 잘됐네요.”

너무 큰 소리를 냈다. 곤히 자고 있던 희연이가 깜짝 놀라며 깼다.

서둘러 아기 띠 메고 품에 안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진충기 선생님이 센터장이 됐고, 한 교수가 부센터장입니다. 신임 과장님도 일반외과 전체의 뜻을 받아들여 모두가 원했던 선생님께서 맡게 됐습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 일로 가슴이 두근거릴 줄은 몰랐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진충기였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잘 해결됐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벼랑 끝에 몰린 일을 함께 해결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감정 교류, 혹은 유대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한동안 무척 친밀해진 대화가 오고 갔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다들 바쁘실 테고, 밥 한 끼로 넘어갈 일이 아니지만 시간 꼭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싼 거 사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 달 치 월급 다 털겠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구도 최인호 교수의 거취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진충기나 한성희를 비롯해 복강경 센터 의사들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업자득일 뿐이었다.

솔직히 속이 후련했다.

김지훈이 휴대폰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잘됐다. 정말 잘됐다. 최인호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지. 힘이 있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벌받아야 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머리맡에 놓인 또 하나의 물건, 간이식 자료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남은 분량이 장난 아니었다.

옆 동네는 일곱 색깔 무지개가 선명하게 떴는데, 정작 분위기 정말 좋은 동네는 빗발만 약해졌을 뿐 여전히 소나기를 맞고 있었다.

찔끔 눈물이 났다.

게다가 아직 잠이 부족한지 무지무지 졸렸다.

살며시 희연이를 눕히고 또 잤다.

꿈속에서 찬란한 쌍무지개를 보았다.

그런 날이 올까?

일복만 적당해도 일단 하나는 뜰 수 있는데 말이다.

***

징글벨 소리가 희미해졌다.

어느새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으로 희연이와 함께 그리운 사람을 찾았다. 두터운 우주복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무서워 오래 있을 수 없었지만, 어엿한 가족을 보며 웃어 주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잘 키울게요.’

이제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울컥거리긴 했지만 오래가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기억으로만 남아 추억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들과 부모님을 찾아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본 지 일 년도 넘었는데 항상 반겨 주는 모습에 죄송하기만 했다.

“누구 닮은 거지?”

“당신도 참! 척 보면 엄마잖아요, 엄마.”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 닮았죠.”

“그런 소리 하지 마. 이것 봐, 이거. 우리 희연이도 아니라고 우네. 에미야! 힘들 텐데 이리 줘. 할미 품도 따뜻해. 재현이 너도 김 교수에게 배워. 도대체 언제 장가갈 거야?”

티격태격 기분 좋은 입씨름으로 새해 첫날을 보냈다.

돌아오는 내내 고경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카시트에 앉힌 희연이의 칭얼거림에 SM520V가 더욱 간절해졌다.

차가 바뀐다고 안 울까?

고경아의 믿음을 깰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도착해 맥주 한 잔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보냈을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오창도라는 새로운 동료도 만났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일복이 무엇인지 체험했고, 별별 일이 다 생겼지만 평생을 함께할 멋진 써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없었다.

세 발 달린 물건이 두 발보다 안정적이라는 말처럼 더욱 단단한 가족이 될 것이다.

‘경아 씨, 지난 한 해 고생 많이 했어요. 희연아, 아빠한테 와 줘서 너무 고맙다.’

새로운 해는 어떨까?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커 가는 게 보일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는 희연이와 든든하게 곁을 지켜 주는 고경아는 더없는 삶의 희망이자 축복이 될 것이다.

펠로우와 교수 보강, 신기동 교수의 복귀, 새롭게 시도되는 간이식까지 근무 여건과 내용도 많이 변할 것이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라이벌이 된 진충기도 있다.

그리고 새 차까지.

여전히 힘들고 매일매일 구슬땀을 흘려야겠지만 결국 자신, 가족, 동료, 환자를 위한 일이다. 하기에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또 뭐가 있을까?’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넘긴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다 말고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바쁜 탓에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 모르는 사실을 잊었다.

계약서다.

경제적 대우나 조교수 임용 문제도 중요하지만 유학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한 세상이다. 안주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이 둥근 줄만 알게 될지도 몰랐다.

“경아 씨, 계약 조건에 유학이 있는 거 기억하죠?”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는데 왠지 갑갑해요.”

고경아의 눈길이 김지훈과 희연이에게 머물렀다.

어린 희연이와 고경아를 두고 달랑 혼자, 혹은 부부만 갈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온 가족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가족 모두 책임진다는 말은 없었으니 경비도 장난 아닐 것이다.

‘돈도 문제지만 선생님들이 허락을 하셔야 가지.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 괜찮을까? 가만? 영어는 또 어떻게 하지? 테이프라도 들으려면 마이마이를 사야 하나?’

미니 카세트가 끝물인지 모르는 것은 김지훈 탓이 아니다. 필요가 없을 뿐이었고, 워크맨과 더불어 이름을 아는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어쨌든 새로운 고민이 다가왔다.

‘경아 씨도 함께 가게 되면 병원을 그만둬야 하나? 장기 휴직은 없나?’

한두 가지 문제가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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