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23화 (923/1,329)

8화. 무지개? Ⅲ (2)

실전으로 쌓은 오랜 경험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기본적인 처치는 한 상태였지만 종합 병원에서 한 처치라고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오다가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생들이 이런 상태로 환자를 보내?’

화가 치밀었다.

간 파열 환자라면 이송 중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길거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응급 수술을 택했어야 했다.

명분을 좇다 환자를 잃으면 최인호 교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응급 수술까지 거부했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이상 무조건 살리고 보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바로 써전이 견지해야 할 자세다.

김지훈이 송진우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락한 선생이 누구야? 뭐라고 했어?”

전에 없는 모습에 간호사까지 깜짝 놀랐다.

송진우는 갑작스러운 태도에 눈만 껌뻑거렸다. 이송 연락을 한 의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를 것처럼 흥분한 김지훈이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그때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렸다.

송진우가 본능적으로 환자에게 달라붙었다.

당직 모두 수술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김지훈도 부리나케 달려가 손을 보탰다.

송진우의 대응은 확실했지만 사람이 모자라 인턴과 함께 피를 짰다.

더 이상 손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오창도가 급히 H 병원 의사와 통화를 했다.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파악한 후 부지런히 수술 방을 오갔다.

얼마 후 김지훈이 씩씩거리며 처치실을 나왔다. 피 묻은 가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사를 찾았다.

“이런 환자를 대충 보내? 이 간호사, 미안한데 H 병원 연결 좀 해 줘요.”

오창도가 급히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님, H 병원 응급실에서 직접 이송한 환자가 아닙니다. 다른 병원에서 환자 보낸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병원으로 이송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고 판단한 후 연락한 모양입니다. 환자 처치는 개인 병원에서 한 상태고요.”

김지훈이 어깨를 흠칫거렸다.

인력, 시설, 장비 모든 것이 열악한 개인 병원 처치라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CT를 빨리 찍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 의료 상황이기도 했다.

“H 병원을 들렀다 온 게 아니라 우리 병원으로 바로 왔다는 겁니까? 그게 시간이 더 절약되는 상황이었고요?”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오해한 것 같습니다.”

천만다행이었다.

H 병원 써전들이 어떤 의지를 가진 의사인지 잊었다.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환자를 등한시했다면 한마음 한뜻을 유지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부당함을 깨기 위해 자리까지 건 사람들인데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너무 성급했네.’

아직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오창도를 보니 은근히 미안했다.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의사를 욕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다행이네요. 이경석 선생님은 지금도 수술 중이신가?”

“아직 수술 중이십니다. 끝나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때마침 송진우가 달려 나왔다. 오창도의 말을 들었는지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바이탈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수술 들어가면 늦을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환자 보내라고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이렇게 빨리 보낼 줄 몰랐다고 해도 절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H 병원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을 것이다. 집이 가장 가깝고, 나오는 시간도 가장 적게 걸릴 사람은 김지훈, 자신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저지른 일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진우야, 마취과에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빨리 수술 준비해. 바이탈 확실하게 유지시켜. 오창도 선생님, 선생님은 들어가시죠.”

오창도가 응급 수술 스케줄을 작성하는 송진우를 보며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진충기와의 통화 내용도 알고,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우리가 다 들어갈 수술이 아닙니다. 내일 저녁에도 또 이송할지 모르는데 한 사람이라도 쉬어야죠.”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응급 환자만큼 들쭉날쭉한 경우도 없다.

“그래도 입장이 그러네요. 차라리 내가 수술을…….”

“선생님, 이런 상황은 우리 전임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환자 보내라고 한 사람도 저고요. 정 죽겠으면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머뭇거리던 오창도가 억지로 밀려났다.

수술 방으로 올라가는 김지훈을 보며 한숨 쉬고 말았다. 결코 자신 탓이 아니건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인호 교수에 대한 원망과 김지훈을 향한 고마움이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오늘은 이 환자로 끝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H 병원은 물론 S 병원에도 유리한 일이었다.

다급히 수술 방으로 올라가는 환자를 보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띠띠띠띠띠띠띠띠!

급박한 박동 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당직이 아닌 송진우와 오하석과 한 팀을 이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경석의 수술이 끝나겠지만 환자에겐 1초가 아쉬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간이 깨져 있었다. 배 속은 이미 피로 가득한데 지금도 줄줄 피가 흘러나왔다. 거즈와 탭이 시뻘겋게 물들고, 석션 통은 핏물로 가득 찼다.

“수처! 타이! 컷!”

정신없이 수술이 진행됐다.

깨진 간 중 제거해야 할 부분은 제거하고, 남은 간을 봉합해 출혈을 잡았다.

송진우는 물론 오하석도 어느 틈엔가 한 단계 올라서 있었다.

배 속을 씻어 내며 추가 손상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할 무렵 이경석이 얼굴을 비쳤다.

“지훈아, 수고했어. 나 대신 고생 많이 했다.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

“아니에요. 내 앞으로 입원했는데 끝까지 책임져야죠. 언제 환자 뜰지 모르는데 형이나 빨리 들어가세요.”

당직 아닌 사람이 수술하는데 당직이 먼저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경석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지켰다.

“컷!”

마지막 피부 봉합까지 끝났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가라는 말은 했지만 당직이다. 자신 앞으로 입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수술이 끝나기 전에 들어갈 이경석이 아니었다.

휴게실에서 쉬고 있나?

혹시 그사이 또 환자가 왔나?

다음 날.

전임 두 명과 전공의 네 명이 눈가에 검은 칠을 한 채 아침 일찍 회진을 돌았다.

김지훈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오자 오창도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수술이 많았습니까?”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H 병원 선생님들이 응급 환자를 얼마나 보셨나요? 라파로 센터를 포함해 전체적으로요.”

오창도가 입맛을 다셨다.

“워낙 라파로 센터에 신경 썼고, 대외적으로 홍보를 많이 해서 가려진 면이 있습니다. 일반외과 전체로 보면 우리 병원과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증 외상 환자도 많았겠죠?”

“규모가 큰 종합 병원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정적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H 병원은 S 병원보다 크다. 일반외과 규모도 그만큼 더 컸을 테지만 힘들다는 아우성을 피하진 못했다. 결국 환자 수만이 아니라 중한 환자도 많았다는 말이다.

‘어후! 참 생각 짧다. 라파로 말고도 환자가 많았을 거란 생각은 왜 못했을까? 그런 상황에서 응급 진료까지 거부했다면 H 병원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말인데.’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아침 커피 타임도 건너뛰고 잠깐 눈을 붙였다. 이경석은 그 짧은 새에 코까지 골며 잤다.

오전 진료를 마쳤다.

응급 환자와 H 병원 상황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극과 극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다를 바가 없어도 의사 집단을 향한 시각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집단행동을 하면 사회적으로 굉장한 지탄을 받는다. 환자를 볼모로 삼는다는 비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H 병원의 상황도 사람들 눈에는 똑같이 보이겠지?’

그럴 테지만 결코 의사 개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방식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있어도 결국 환자를 위한 길이었다. H 병원이 올바르게 운영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분명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해결돼야 돼. 그때까지 별 탈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마침 전임 모두 수술이 없는 날이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늦지 않은 시간에 수술이 끝난다. 당직 교수들이 죽어 나가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마땅했다.

허락 내지는 동의도 받을 겸.

회진 후 급히 자리를 요청해 모였다.

당직을 서야 하는 의사들만 대상이다.

조심스럽게 생각을 알렸다.

진충기의 요청을 제대로 상의조차 하지 않고 승낙했기에 눈치만 봐야 했다.

폭주하는 일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수술에 목을 매는 써전이라도 달갑지 않은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박승준 선생님, 사정이 이렇게 됐습니다.”

박승준 교수가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어제 진충기 선생님께 연락을 받았고, 밤새 양방으로 수술했단 말이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고.”

“예. 오창도 선생님 말로는 H 병원 응급실이 우리 병원 이상이라니까 오늘 저녁도 만만치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아니어도 어느 병원이든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백 듀티(Back Duty)를 정해서 혼자 감당 못할 시 바로 나오자, 이 말이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근데 왜 이런 사태까지 발생한 거야?”

저마다 진충기나 한성희에 대한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세히 알지 못하면 최인호 교수에 대한 생각이나 판단마저도 다를 것이다.

김지훈의 눈짓에 오창도가 상황을 설명했다.

박승준 교수는 물론 지동훈 교수의 눈빛까지 변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오창도와 전임들을 힐난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오 교수, 그런 일이 있으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말했어야지. H 병원 의사들도 다 같은 동료들인데 서운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라도 힘을 실어 줘야지. 김지훈 선생, 당직 순서를 어떻게 짰으면 좋겠어?”

숨도 쉬지 않고 결정했다.

역시 모두가 동료다.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무리 없이 당직을 서려면 일단 일복 확실하게 감안해야 했다. 아무리 사람 좋아도 일방적으로 힘들어지면 눈 찢어지고, 입 나오기 마련이다.

박승준-오창도

지동훈-신현수

이경석-김지훈

가장 최악의 조합은 마지막 편성이었지만, 먼저 제안한 김지훈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경석이 흠칫 놀랐지만 오창도와 함께 서는 박승준 교수를 보며 만족해야 했다.

박승준 교수가 깔끔하게 승인했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김지훈 선생, 진충기 선생님에게 우리가 이렇게 한다는 걸 연락할 이유까진 없겠지? 무작정 환자 받을 수는 없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만있자. 오늘이 내 당직이니까 오 교수가 뒤를 받치는 날이네. 오 교수, 살살 하자. H 병원에서 보내는 환자까지 봐야 하는데, 일복 접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지동훈 교수가 웃었다.

“우리가 제일 무난하네. 오 교수, 힘내. 박승준 선생님이나 나나 충분히 이해하니까 마음 쓰지 마. 예전 병원 식구들한테 안 좋은 일 있다는 소릴 들으면 아직도 신경이 쓰여서 그 마음 잘 알아.”

“어이구! 하필이면 일복 터진 놈하고 한 조냐. 지훈아, 금요일이 당직이지? 그땐 우리 쥐 죽은 듯이 지나가자.”

누구 하나 책망하지 않았다.

기존 당직 때마다가 아니라 3일마다 듀티, 백듀티 가리지 않고 일에 치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마웠다. H 병원 의사들에게 큰 힘이자 응원이 될 것이다.

자신의 탓이 아니건만 미안하다며,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오창도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퇴근들 하세요. 교수님들에게는 굳이 말씀드릴 필요 없는 일이니까 우리끼리 알아서 진행하자. 과장님까지 나섰다는 말이 돌면 공연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 다들 H 병원 상황이 어떤지 들었으니까 입조심하는 게 좋겠다. 골치 아픈 건 우리로도 충분해.”

박승준 교수에게서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한때 지동훈 교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는데 이젠 일반외과를 이끌 자격이 충분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인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 교수, 응급실 들렀다 가자. 설마 벌써 환자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평소 한두 명 정도는 보니까 내 일복일 수도 있겠네.”

지동훈 교수가 웃었다.

“한두 명이라고요? 응급 수술 평균 내면 한 명도 안 되죠. 오 교수 일복이 아무리 세도 선생님 일복을 이기긴 힘들다는 데 한 표 겁니다. 신현수 선생, 어떻게 생각해?”

“저도 한 표 겁니다.”

우르르 병원을 나서다 말고 흠칫 놀랐다.

농담처럼 한 말이 현실이 됐다.

때론 몹시 미안해도 얼굴에 철판 깔아야 한다.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렸다. 일복 터진 오창도 탓인지, H 병원 탓인지 확인할 염치가 없었다.

번쩍이는 경광등 불빛,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따라붙었다.

‘어후! H 병원에서 보낸 환자면 어떻게 하지? 내일 아침부터 눈총 받는 거 아냐?’

불안한 가운데 하룻밤이 지났다.

밤새 평안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