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무지개? Ⅲ (1)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고 했다.
지난 일주일 좋은 일, 나쁜 일이 어지럽게 오고 갔지만 마지막 장식은 무지개였다.
펠로우를 지원한 동기 세 명의 얼굴이 유난히 밝았다. 최종 면접을 무난하게 치르고, 거의 확정적인 언질을 받았다. 친구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자식들, 내년에 보자. 다 죽었어.’
여기까지는 어쨌든 다른 사람 일이다.
진짜 김지훈의 무지개가 남았다.
남자의 로망!
누비라, 소나타, 그랜저, SM520.
어서 선택해 달라고 차마다 뽐이라도 내듯 반짝반짝 빛났다. 쇼핑할 땐 그렇게 힘들고 다리까지 아팠는데, 전시장 세 곳을 전전하는 내내 콧바람이 절로 나왔다. 하루 종일 희연이를 안고 다녀야 하는데도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일단 체급으로 한 번 걸러 낸다.
그다음은 오감을 모두 동원한다.
전시 차량이라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신차 냄새, 핸들에서 전해져 오는 묵직한 느낌, 부드럽게 넘어가는 자동변속기, 폭신폭신한 시트, 점점 세련돼 가는 계기판까지 모든 것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요소다.
매주 방문할 수는 없다. 지금 반드시 차를 골라야 한다.
차값은 한두 푼이 아니다. 영업 사원의 휘황찬란한 설명에 휙 넘어가서도 안 된다. 알맹이 잘 골라 내 신중하게 취사선택을 해야 하건만 의외로 결정이 빨리 났다.
한눈에 들어오는 차가 있기 마련이다.
고경아의 눈길까지 끌었다.
“사람들 말 들으니까 이 차가 정말 좋은 차래요.”
호의적인 소문도 무성했다.
결정이다.
미적거리면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맛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과감하게 지른 후 몰다 보면 어느새 차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좋아요. 이 차로 합시다.”
두둥! 계약서 작성하고 인도 날짜 받았다.
앞으로 2주 후다.
매일매일 들뜨고 흥분된 기대 속에서 살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SM520이 아른거렸다.
그것도 V가 달린 차다!
카르페 디엠!
앞으로 고경아는 계산기 두들기고, 김지훈은 열심히 돈 벌면 된다. 넘쳐 나는 일복 덕에 야간 수술 수당까지 넉넉히 받을 테니 걱정할 일도 없었다.
‘흐음! 당직 더 안 서도 되겠지?’
차값이 만만치 않아 쪼끔, 아주 쪼끔은 걱정됐다.
***
기분 좋게 월요일 일과를 시작했다.
어느 직장이나 몇 년을 근무하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병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환자 보고, 치료하는 일이 99.9퍼센트다.
물론 가끔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당장 결과가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좋은 일, 나쁜 일, 득이 되는 일, 실이 되는 일일지 시간이 가야 알 수 있는 일도 많다.
오전 수술을 마친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병실에서도 연말연시의 은근한 들뜸이 느껴지건만 근무 중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가정과 병원에 충실하면서 간이식 준비까지 하려면 시간을 알차게 쪼개야 했다.
‘점심시간에 30분은 반드시 투자해야 돼. 일과 후에도 한 시간은 필요한데 희연이하고 언제 놀지?’
갈수록 시간이 부족했다.
총각일 때와 결혼한 후조차 비교할 수 없는데 입 하나 더 생겼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오늘처럼 혈관 수술이 잡힌 날은 희연이와 고경아가 눈에 밟힐 정도였다.
최선을 다할 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후 정규 수술이 끝나자마자 혈관 수술을 이어 나갔다. 간이식과 신기동 교수의 준엄한 경고를 잊지 않고 신현수, 송진우와 함께 시작했다. 한발 늦게 혈관 수술을 시작한 오창도까지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달리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집도의로서, 임시지만 주임 교수로서 세 명의 써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부족한 것은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은 가르쳐야 한다.
기분 나쁘지 않게.
신현수 역시 각오 단단히 했다.
사전에 말한 대로 환자를 먼저 보고 들어와 집도를 맡겼다. 세컨을 서는 송진우와 써드를 자청한 오창도까지 눈에 불을 켰다.
신현수의 수술이 끝났다.
“현수야, 문합 시작부와 마지막 부분은 수처 간격을 조금 더 좁혔으면 좋겠어. 가장 문제가 많이 생기는 부분이잖아. 그리고 이리게이션(Irrigation)은 절대 아끼지 마. 눈에 보이지 않는 혈전이 혈관을 막을 수도 있어.”
“지금 했던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부족하다기보다 더 확실하게 처리하자는 거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짚었다.
두 번째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의 집도를 보기 위해 신현수가 회진까지 미뤘다.
자신의 수술과 비교하며 차이점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강력한 자극에 시간이 갈수록 피곤해하기보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그사이 또 달라진 것 같네. 신기동 선생님도 깜짝 놀라시겠다.’
무사히 두 번째 수술도 끝났다.
이제 하나만 더 하면 된다.
야간 당직자만 남아 인력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다른 과 응급 수술과 수술 준비까지 겹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마냥 넋 놓고 있으면 이런 낭비가 없다.
우르르 올라가 각자 회진을 돌았다.
이렇게 시간 부족에 시달릴 때 원칙은 하나다.
이동은 빠르게, 환자 진찰은 여유롭게.
인턴과 전공의의 발이 보이지 않았고, 검사 결과와 환자 상태 보고를 하며 숨을 헐떡였다.
수술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회진을 돈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아직 8시도 안 됐다.
‘좋았어. 역시 오창도 선생님이 자리 딱 잡으시니까 훨씬 빨리 진행되네. 9시쯤 퇴근하면 희연이 잘 때까지 놀아도 한 시간 정도는 충분히 남겠어.’
후다닥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또 뛰네. 하긴 그래야 1분이라도 빨리 퇴근하겠지.’
오창도가 피식 웃으며 뒤를 따랐다.
수술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직인 이경석이 보였다.
“형, 환자 있어요?”
“복막염에 혈복강까지 발생한 환자가 왔어. 지금 바로 들어갈 거야.”
그 탓에 혈관 수술 시작이 다소 지연됐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계획이 첫날부터 어그러져 뭔가 찜찜했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다. 부산하게 수술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휴게실에서 잠시 쉬었다.
그때 오창도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지훈 선생님이요? 지금 옆에 계십니다. 왜 그러세요?”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진충기였다.
왜 찾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도 저녁 늦게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오 교수는 아직 다른 선생님께 말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오 교수에게 우리 병원 사정 들으셨죠?)
“예, 들었습니다. 잘 해결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일이 더 커졌습니다. 한 교수와 제가 걸린 일이라 직접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응급 환자까지 거부하는 사태가 초래됐습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럼 응급실로 오는 환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서 전화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환자를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인 환자는 주변 병원에 부탁을 했지만 중증 외상 환자가 문제네요. 다들 인력이 부족해서 꺼려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중증 외상 환자는 간단한 면이 하나도 없다. 수술부터 치료는 물론 병실이나 중환자실 확보까지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형 병원밖에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각한 환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함부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환자는 받아 놓고 수술조차 못 들어갈 수 있기에 이송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치료가 가능한 병원 간의 이송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었다. 일을 넘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을 차치하고라도 함부로 답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환자 때문에 치이는데 응급 환자를, 그것도 중증 외상 환자를 추가로 받는다면 난리 날 것이다. 유난히 환자 없는 박승준 교수가 매일 당직이라면 모를까,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입을 열지 못하자 진충기가 간절히 부탁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믿을 사람이 선생님과 오 교수뿐입니다. 다른 병원에 말도 없이 환자를 보냈다가 거부당해 병원을 전전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아직도 간혹 제때 치료받지 못해 거리에서 사망하는 환자에 대한 뉴스가 들린다. 어쩌다 발생하는 일이 분명했지만 가족에겐 원통하다 못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의사 개개인, 병원을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의료 체계의 구조적인 영향이 매우 크지만 의사이기에 일정 부분 책임을 면하기도 힘든 문제였다. 도의적으로라도 말이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응급 환자 치료까지 거부해야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까?”
(후우! 어떤 말로도 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잘 압니다. 우리 과와 동료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무작정 거절할 수도, 무턱대고 승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갈등에 빠졌지만 팔은 역시 안으로 굽었다. 거절한다고 해도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것이 빤했다.
‘오죽하면 이런 전화까지 했을까? 다른 병원에서 이송되는 환자도 대부분 연락도 없이 보내는데, 직접 통화까지 한 이상 받는 게 맞다.’
“알겠습니다. 다만 우리 병원도 응급 환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가급적 분산시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이 주 정도만 부탁드립니다. 그 전에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겁니다.)
“죄송하지만 일단 오늘뿐입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확답은 내일 드릴 수 있습니다.”
조건을 달고 전화를 끊었다.
흔히 그렇듯 연락도 없이 보낸다면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충기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사전 연락이 환자 치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길! 일이 늘기만 하네.’
오창도가 한숨만 내쉬었다.
집단행동과 사직서 제출만으로도 극단적인 상황인데, 그것도 모자라 낭떠러지로 치닫고 있었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사유가 무엇인들 자칫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김지훈도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 과의 의사 전체가 들고일어났는데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최인호 교수의 힘이 막강한가? 응급 환자 치료까지 거부할 정도라면 이제 적절한 타협은 없단 말이네.’
“오창도 선생님, 최인호 교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파탄 난 거 아닙니까?”
“이런 문제가 최인호 교수만의 문제겠습니까? 다른 과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죠. 비슷한 사람이 한두 명만 더 있어도 수치가 아니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병원도 그런 선생님들이 있긴 하죠.”
군대만큼 강한 상명하복, 권위적인 체계는 의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상당 부분 개선되고 의식까지 바뀌었지만, 일부 의사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가 두려운 겁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권위와 힘이 훼손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거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맞네요. 내가 당한 것은 억울하지만 위로 올라간 이상 바꿀 필요성 자체를 못 느낀다는 말일 겁니다.”
답답한 일이었다.
원칙을 지키고, 서로를 존중한다면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기에 도리어 내 일처럼 느껴졌다. 힘겨루기도 아니고 부당한 인사를 철회해 달라는 요청조차 무시하는 행태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환자가 내려왔다.
감정적 동요는 수술에도 영향을 끼친다.
찬물에 세수하고, 심호흡 크게 한 후에 혈관 수술을 시작했다. 다행히 수술은 아주 잘 끝났고, 환자도 무사히 병실로 올라갔다.
한숨 돌리고 퇴근 준비를 했다.
다른 병원의 일이다. 관여하거나 해결하지 못할 일을 질질 끌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창도와 함께 간이식 준비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연구실에서 나왔다.
응급실 앞이다. 앰뷸런스 경광등이 번쩍번쩍 요란하게 위급한 빛을 날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혈관 수술을 함께한 송진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응급실로 들어갔다.
당직도 아닌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고개를 들이밀고 말았다.
처치실이 난리 났다.
“오하석 선생, 소변 나오는지 확인해 봐. 간호사, 수액 하나 더 달고, 피 시킵시다.”
바이탈이 크게 흔들린 환자가 분명했다.
가운 여기저기에 피를 묻힌 송진우가 다급하게 나오다 말고 김지훈을 보고는 그대로 달려왔다.
“선생님, H 병원에서 막 이송된 환자입니다. 간 손상 환자로 저혈량성 쇼크가 심각한 상태입니다.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받은 지 한 시간 조금 더 넘었다. 진충기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무척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내심 섣불리 응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몰려들었지만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경석이 형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 폭탄을 안겨 준 건 아닌지 모르겠네.’
걱정도 잠시.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돌연 인상을 확 썼다. 오창도도 당황해 눈가만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