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무지개? Ⅱ (2)
바쁜 하루가 지났다. 짬짬이 간이식 자료를 검토하느라 정신없었다.
‘시간을 갖고 전체적으로 쭉 검토해야 할 텐데 언제 하지? 집에서는 한 페이지만 봐도 다행일 거야.’
초보 아빠의 착각 하루 만에 깨졌다.
문득 떠오른 희연이 얼굴을 뒤로하고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외래로 내려가는 동안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펠로우 지원하는 동기 세 명과 교수로 임용되는 선배 한 명의 면접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군대 말년이라고 머리가 점점 길어지는 손일석.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 김경수와 오성민.
언제나 후배를 아끼는 최철한.
이제 곧 함께 근무할 동료들이다.
친근한 미소 속에 긴장이 숨어 있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응원했다.
낯선 얼굴인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 오창도 교수와 차례로 인사시킨 후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같은 듯 다른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송재덕 교수는 동네 아저씨 미소를 감추지 않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이런 일에 있어선 무척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는 교수였다. 삐끗하는 순간 야야야! 소리가 터져 나올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는 마치 항상 벌어지는 일이라도 되는 듯 평소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지원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기에 더욱 날카롭게 파악할 것이다.
뜨거운 커피 한 잔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쉽게 지나갈 분들이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이혁민 교수가 곧바로 포문을 열었다.
일반적인 질문은 필요 없었다.
“다들 얼굴은 잘 아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 최철한 선생, 유방과 갑상선 파트에 왜 지원했나? 원래 위장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사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구미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원치 않는 파트를 지원한 것은 아닌지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을 듣고 앞으로 일반외과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성 질환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현실도 감안했습니다.”
최철한의 말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맡아야 할 파트와 지역을 옮기는 문제까지 교수로서의 여러 고민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에겐 삶이 달린 문제기도 했다.
‘선생님, 전공의 때 한 번씩 다 해 본 수술입니다. 빨리 자리 잡으셔서 다 가져가 주세요.’
“최철한 선생, 나로서는 흡족한 말이지만 내일 오후 인사 위원회 면접이 남아 있으니까 준비 잘하길 바란다. 펠로우 지원한 선생들 질문은 해당 파트에서 하자. 송재덕 선생님,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가 맡았으면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당연해. 박 교수, 경수 저놈이 보기보다 속이 강한 놈이야. 인정사정 보지 말고 묻고 싶은 거 다 물어봐. 흐릿하면 내가 박 교수 면접 볼 거니까 알아서 해. 과장 해야지, 과장.”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해가 지나 인사 발령이 나면 박승준 교수가 과장이 될 것이다. 그동안 많은 말이 오갔는지 교수들 모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박승준 교수가 가볍게 목례하고 포문을 이었다.
“김경수 선생, 대장 파트를 왜 지원했습니까? 라파로 능력까지 요구되는데 준비한 것이 있습니까?”
일반외과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로 상당히 내성적이었던 김경수였다. 치열했을 수련 시절과 군대 3년이 성격을 조금은 바꾼 모양이었다.
송곳처럼 예리한 질문이 쏟아졌고, 김경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또렷하게 대답했다. 교수에 대한 욕심도 감추지 않았다.
‘자식! 멋있던 놈이 더 멋있어졌네.’
지동훈 교수와 오성민 차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술은 무엇이었습니까? 선생님의 수술 스타일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위장관 파트에서 특별히 요구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셨습니까?”
부드러운 가운데 의표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오성민은 더 이상 전공의가 아니었다. 전문의로서, 일반외과 써전으로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대답했다.
‘야! 옛날 경수나 성민이가 아니야. 정말 힘들었을 천안 병원 생활을 견딘 이유가 있었어.’
진지하게 경청하며 생각에 잠겼다.
동기와 선배의 말속에 담긴 의지와 목표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수련을 시작해 펠로우를 거쳐 전임이 되는 동안 해이해진 것은 아닌지, 지금도 최고의 써전과 수술 팀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면접에 임한 동기들이 전하는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속까지 다 안다고 여기는 손일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손일석의 두 손이 무릎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천하의 손일석도 긴장을 다 하네.’
그때 이혁민 교수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혈관 파트는 교육을 맡은 사람이 시작하자.”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예? 제가요?”
“그럼 누가 하나? 신 교수 올 때까지 주임 교수라는 걸 잊지 마라.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잘 알아야 둘이 함께 파트를 잘 끌어갈 거 아냐. 평소 손일석하고 친한 건 사적인 일이다. 확실하게 해라.”
이준영 교수까지 엄한 눈길을 보냈다.
수술도 아닌데 긴장이 확 치솟았다. 그 탓에 함께 파트를 끌어가야 한다는 말을 흘려들었다. 혈관 파트는 엄연히 신기동 교수와 손일석일 텐데 말이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손일석도 급히 매무새를 살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전임과 군의관, 친구와 친구, 형님과 동서.
참 여러 인연으로 얽혔고, 그만큼 잘 안다고 여겼지만 이혁민 교수 말대로 사적인 인연일 뿐이었다. 임시로 맡은 혈관 파트 주임 교수 자리였지만 지금은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할 때였다.
‘일석아, 미안하다. 주임 교수로서 들어간다.’
‘지훈아, 준비됐다. 들어와.’
빠지직! 눈빛과 눈빛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손일석 선생님, 오랫동안 혈관 파트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기본적인 질문은 생략하겠습니다. 먼저 혈관 수술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우리 과 모든 수술의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술기에 있어서 수처와 타이, 박리가 기본이라면 수술의 기본은 혈관 처리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수술 중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또한 기본이기에 결과를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판단 기준이 있을까요?”
“순수 혈관 수술은 루뻬를 쓸 정도로 정교함을 요구합니다. 또한 재수술은 혈관 하나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점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것처럼 결과 예측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혈, 박동 여부, 문합부 상태까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겁니다.”
역시 막힘이 없었다.
불현듯 간이식 준비를 앞둔 상황에서 귀중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혈관 수술에 대한 질문을 이어 가다 간이식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먼저 확인할 일이 있었다.
“신기동 교수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간이식 수술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우리도 어제 들었는데 며칠 됐다고? 신기동 선생님이 확실하게 결정하셨네. 미리 축하한다. 그럼 자료도 받았겠지?’
“잘됐네요. 하루하루가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자료 정도는 읽어 보셨겠죠? 간이식의 혈관 연결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정맥, 문맥, 동맥 순으로 이어 줍니다.”
혈관에 목맨 손일석다웠다.
군대에 있다고 방심할 놈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그럼 공여자 수술에서 뇌사자와 생체 간 이식의 차이는 무엇이 있습니까?”
난데없이 간이식이 주된 질문으로 변했다.
김지훈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불과 한 달밖에 안 남았다. 더구나 손일석은 펠로우가 되자마자 수술에 참여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김지훈은 의표를 찌르려 노력하고, 손일석은 확실하게 대답하려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결국 난타전이 벌어졌다.
적절하게 제어할 줄 알았던 이혁민 교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준영 교수는 흥미롭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오창도가 은근히 놀라고 말았다.
‘어제 받은 자료를 밤새 읽었나?’
시간 날 때마다 뒤적거린 이유가 주말에 새 차를 보러 다녀야 하기 때문인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상당한 자극이었다.
가만히 보니 신현수나 이경석도 이미 검토한 기색이었다. S 병원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엿보는 순간이었다.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그 시간에도 치고받고 난리가 아니었다.
마침내 김지훈이 슬그머니 두 손을 들었다.
‘자식! 며칠 사이에 단단히 공부했네. 더 묻다간 도리어 내가 창피당하겠다. 일석아, 내가 졌다. 빨리 와서 혈관 수술 다 가져가.’
“수고하셨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이론적인 면에 관한 한 더 이상 질문할 거리가 없습니다. 단, 써전에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손입니다. 여건이 충족되지 않겠지만 오는 날까지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우! 매일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그 와중에도 혈관 수술을 이 정도로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어? 잘못하면 스승님 말씀대로 간이식 수술까지 뺏기겠다. 무서운 놈. 네 파트 아니면 적당히 좀 해라. 나도 먹고살자. 남의 밥그릇 넘보는 건 강호의 도의가 아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들 놀라고 흡족해하는데, 손일석의 눈매는 농담 같은 속마음과 달리 매섭기만 했다. 최고의 써전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 아니라 혈관 수술에서마저 강력한 경쟁자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수고했습니다. 결격 사유나 문제점을 제기할 분 계십니까? 없다면 이것으로 자체 면접을 마치겠습니다.”
“다들 잘했다. 잘했어. 내일 저녁 인사 위원회 면접도 잘 봐야 한다. 깐깐한 사람 많다. 많아.”
일반외과 교수들이 동의하면 임용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두 시간이 넘는 면접이 무척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다들 한숨 돌렸다는 얼굴이었다.
간만에 동기들이 거의 다 모였다.
이때만은 참새다. 방앗간에 들러 많이도 쪼아 먹었다.
술기운에 H 병원 일이 입에 걸렸고, 손일석은 분개했다.
“나 같으면 진충기 선생 업고 다니겠다. 제자가 그렇게 멋지게 변했는데 안아 주기는커녕 내쫓아? 그 집안 완전히 쫑날 뻔했는데 사표가 살리네.”
“그렇겠지?”
“그럼.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지지 않은 이상 게임 끝난 거야. 사필귀정!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딱 보이는데 고민할 게 뭐가 있어? H 병원 경영진 눈이 멀었다면 모를까, 센터 마비까지 두고 볼 수는 없겠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만한 표정을 짓던 손일석이 돌연 김지훈을 노려보았다. 면접 때 자신을 궁지까지 밀어붙였던 원흉이 생각난 것이다.
“김지훈, 너 나한테 불만 있지? 담배도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개그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틀림없어. 아니면 위기감을 느끼는 거야? 너 가슴에 손을 얹고 면접 때 일 생각해 봐. 아주 내가 혈관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할 것 같더라. 나쁜 놈. 친구도 아냐.”
“그럴 리가 있어? 난 그냥 순수하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동기들 모두 손일석의 말이 맞는다고 십분 동의하고 있었다. 졸지에 천하의 죽일 놈이 돼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 다 맞았다.
손일석 기가 팍팍 살았다.
“순수? 얼어 죽을 소리 하지 마. 순진무구, 천진난만은 내 트레이드마크야. 경수야, 성민아, 안 그래?”
너무 나갔다. 미친놈 소리 듣고서야 정신 차렸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역시 최고의 안주는 H 병원이었다. 내일 저녁에 있을 최종 면접은 안주가 아니라 진지한 대화 소재였다. 술기운에도 긴장이 느껴졌다.
“간만에 너무 먹었다. 일석아, 경수야, 성민아, 면접 잘 봐. 내년에 꼭 함께 일하자.”
“면접 역시 게임 오버야. 새로운 삼인방이 기존의 삼인방을 밀어낼 날이 얼마 안 남았군. 경석이 형,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 밀어낸다는 말 알죠?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남은 시간 즐겁게 지내세요.”
“펠로우 교육 우리 소관이다. 이런 태도 좋지 않아.”
“펠로우도 펠로우 나름! 경수야, 성민아, 파이팅 하자!”
“파이팅!”
두 파로 나뉘어 입씨름을 벌였다.
“두고 보자.”
“두고 보면 어떻게 할 건데?”
“내일 집담회 참석하라는 과장님 말씀 잊지 않았지? 내년에 너희들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자리가 될 거야. 집담회 때 보자.”
“지훈아, 집담회 살벌한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어떤 말이 나와도 즐거웠다.
결국 12시가 훌쩍 넘어 자리가 끝났다.
즐겁게 손 흔들고 집으로 가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주말 집담회는 어김없이 열릴 테고, 부신 수술 대비는 안 돼 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큰일 났다.
술이 정수리까지 차 글씨가 안 보였다. 눈은 감겨 오고, 집중이라는 단어는 이미 멀리 사라졌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도 실행할 힘이 없었다.
포기다.
한 번쯤은 일탈한다고 해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죽었다고 복창하고 내처 잤다.
복창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국내 최초일지 모른다는 사실 역시 절대 강조하면 안 된다. 부족한 점, 주의해야 할 점이 그만큼 많기에 교수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을 테고, 도리어 역효과만 낼 것이다.
최대한 티 안 냈지만 몸부림일 뿐이었다.
세컨을 선 강병옥이 말 몇 마디에 숯이 됐다.
퍼스트를 선 오창도는 교수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하얀 재가 돼 휘날렸다.
집도의만 남았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까만 숯으로, 하얀 재로, 마침내 김지훈이 과연 전임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고서야 집중되던 화력이 사라졌다.
이래서 미리미리 준비하고, 대처해야 한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
‘니들 내년에 다 죽었어.’
손일석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갈수록 살벌해지지? 이 양반들이 회춘을 하시나?’
김경수와 오성민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최철한 역시 오창도를 보며 헛기침만 했다.
온몸으로 두고 보자는 말을 실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삐질삐질 흐르는 액체가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이것도 분명 소나기다.
팔다리가 다 욱신거렸다.
아! 정녕 무지개는 뜨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