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20화 (920/1,329)

7화. 무지개? Ⅱ (1)

입이 쫙 찢어진 채 출근했던 신현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이경석까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대장 수술을 완벽하게 하려면 혈관 수술도 잘해야 돼. 경석아, 좋은 기회다. 좋은 기회. 이참에 네가 혈관까지 하자. 좋다. 좋아. 현수는 좋아서 말도 못하는구나. 말도.”

아침 커피 타임 내내 이어진 동네 망치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좋다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세지도 못했다.

‘정말 그렇게 좋은 일인가요?’

“김지훈, 간이식은 차원이 다르다. 열심히 하자.”

스승이 하라면 해야 된다.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이어진 말에 힘이 되기는커녕 동지 한 명 늘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 교수.”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간이식은 신기동 교수와 간담도 파트 수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참가하는데 팔짱 끼고 구경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다.

“예. 김지훈 선생님에게 오늘 내로 자료 받고,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말없이 눈길만 주었다. 자발적으로 하나 더 꺼내라는 재촉이었다.

오창도가 잠시 눈가를 찡그리다 말고 절로 터지는 한숨을 불굴의 의지로 막아 냈다.

“혈관 수술도 더 배우겠습니다.”

이제야 묵직한 시선이 사라졌다.

“그게 좋겠다. 신 교수가 와야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정확한 계획이 나오겠지만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지. 다들 일 보자.”

이혁민 교수의 마무리로 자리가 끝났다.

전임 세 명과 교수 한 명만 남았다.

따뜻했던 커피가 다 식도록 다들 말이 없었다.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만 할 뿐이었다.

머리 쥐어짠다고 뾰족한 답이 나올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쥐어짜 최대한 준비할 뿐.

그 이상도 이하의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좋아질 만하면 꼭 일이 생기냐. 지훈아, 현수야, 펠로우 올 때까지만 고생하면 끝나겠지? 오창도 선생님, 좋게 생각하죠.”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날 보며 위안 삼으세요. 핵폭탄을 맞았습니다.”

모두들 허탈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김지훈만큼 부담이 많아진 사람도 없었다. 일은 그대로인 데다 혈관 수술까지 바짝 신경 써야 한다. 단순히 수술을 같이하는 정도라면 평소처럼 하면 된다. 그러나 간이식을 대비하는 과정이기에 가해지는 부담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마냥 같이 울며 한탄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한다면 이겨 내야지.’

깔끔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네 명이 한꺼번에 같이한다고 실력 늘겠습니까? 하루씩 번갈아 가며 혈관 수술 들어오세요. 후배 교육도 시켜야 하니까 집도든 퍼스트든 한 건만 줄 수 있습니다. 집도를 원한다면 반드시 환자부터 보셔야 합니다. 신기동 선생님 요구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실력을 위해 바짝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기한은 한 달밖에 안 남았다.

혈관 수술 경험이 가장 적은 써전이 마음에 걸렸다.

이젠 복강경 센터 의사가 아니라 간담도 파트 교수였다. 간이식까지 나온 마당에 필요한 부분은 모두 갖춰야 마땅했다.

“오창도 선생님,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죠.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세컨도 마다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신기동 선생님과 제 수준은 비교할 수도 없으니까 정말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론 준비는 매주 금요일마다 세미나를 한다고 하니까 목요일에 모두 모여서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우리도 정리해서 의견을 내야 할 거야. 중구난방으로 말하면 시간만 오래 걸릴 테니까 첫 번째 세미나에선 네가 대표해 발표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알았어.”

홍재순 버금가는 이론의 강자다. 내과 교수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다.

교수 회진이 끝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월요일 밤 이후 지금까지 끈적끈적 달라붙어 있는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심적 부담은 손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오창도가 안정을 찾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오창도 선생님, 진충기 선생님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른 말은 없었나요?”

오창도가 입술을 모았다.

동네방네 소문낼 일이 아니었지만 누구 한 명 상의 못할 사람이 없었다. 사실 뜻밖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 심사가 더욱 복잡한 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자 이경석이 재촉했다.

“선생님, 힘든 일은 일부러 나누라는 말도 있는데 말씀해 보세요.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오창도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이젠 모두 동료다. 새로운 인연은 평생을 갈 것이다. 당연히 상의하고, 함께 고민할 일이었다.

“이경석 선생, 어제저녁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 복강경 센터 소속 의사 전원이 집단행동에 나섰다는 연락을 받았어.”

“집단행동이요?”

“진충기 선생님과 한 교수가 이번 달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기존에 예약된 환자 진료와 수술 이외의 모든 업무를 중단한다고 통보한 모양이야. 그뿐이 아니야.”

“또 뭐가 있습니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대. 복귀 말고는 타협은 없다는 말이겠지.”

모두들 깜짝 놀랐다.

초유의 사태다.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는 상황이다.

부당한 대우나 처우 개선 때문에 전공의들이 시위에 나서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교수들까지 행동에 나선 적은 없었다. 심정적으로 십분 동의한다고 해도 환자를 보아야 한다는 부담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와! 이건 완전히 배수진이네. 병원 측에서는 뭐라고 한답니까? 최인호 교수님이 물러서실까요?”

“추가로 연락받은 것은 없어. 그동안 매일 복귀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사표가 무리수일지, 해결책일지 알 수가 없어.”

김지훈과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다. 사표까지 낸 이상 극단적인 대결이었다.

확실하게 해결되지 못하면 최인호 교수가 옷을 벗든지, 복강경 센터가 마비되든지 둘 중의 하나로 결판날 것이다. 어떤 결말이 나든 치명적인 일이었다.

밖에서 보는 입장이었기에 함부로 편들 일도 아니었다. 물론 전자라면 개인에게 국한되고, 후자라면 H 병원 일반외과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울기는 했다.

‘최인호 교수님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해. 이건 일반외과 내부가 아니라 재단과 의사 간의 싸움이 될 수도 있어. 만일 압력에 못 이겨 어설프게 해결했다가는 의사만 피해를 입게 될 거야.’

생각에 잠겼던 신현수가 물었다.

“진충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한 교수와 함께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데, 워낙 분위기가 강경해 막질 못했다네. 누군가는 치고 올라갈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솔직히 의외기도 해. 다른 면에서 보면 최인호 교수에게 더 강한 족쇄를 차게 될 것이란 사실을 모를 수는 없겠지.”

결코 순간의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인 불만이 이번 일을 기회로 터져 나온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도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은 콧등만 찡그렸다.

오창도 이상으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전임들 중 누구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문제였고, 오창도의 판단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신현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된 이상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 맞겠지. 개개인으로 따지면 모두 대체할 사람이 있겠지만 센터는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잖아. 물론 최인호 교수님 생각과 태도가 완전히 바뀌면 더할 나위 없고.”

맞는 말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최인호 교수의 대리 수술과 무리한 인사였다. 결과적으로 센터는 간 절제 수술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답은 이미 나온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의사라는 직업과 개인적인 입장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특히 의사의 본분은 환자 치료라는 대명제 앞에서 갈피를 못 잡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문제가 걱정돼 어설프게 덮으면 결국 고름이 돼 사방을 오염시킬 것이다.

고름은 반드시 터지기 전에 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나도 똑같이 움직였을 거야. 응원할 일이다. 부당함은 결코 정당함을 이기지 못해.’

다들 우울하고 답답한 기색이었다.

다른 병원 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나만 잘하면, 혹은 나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일반외과 전체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창도를 보던 김지훈이 웃었다. 결코 얼굴 찡그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소나기일 뿐이야. 아무리 세차다고 해도 소나기를 버티면 결국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어.’

이마에 꽂히는 눈길이 좋지 못했다. 이 판국에 웃음이 나오는지 묻고 있었다.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창도 선생님,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저력이 바로 이번 일을 통해 나타난 것 같네요. 잘 해결될 겁니다. 사표까지 제출한 이상 대충 어설프게 마무리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확신합니다.”

“그럴까요?”

“최인호 교수님 한 명의 힘으로 라파로 센터가 지금 수준으로 올라섰다면 의심할 수도 있겠죠. 누구 힘이었습니까?”

명쾌한 질문이었다.

오창도가 훅! 숨을 내쉬었다.

생판 얼굴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김지훈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 누구보다 동기와 후배가 어떤 의사인지 잘 아는 자신이 가져야 할 확신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기가 꺾일 일이 아니었다.

불현듯 김지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나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지훈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경석이 강하게 손뼉을 쳤다.

“지훈이 말이 맞네요. 센터 선생님들의 마음이 일치했다면 병원이나 최인호 교수님이나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겁니다.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벌어진다면 책임질 사람은 권한을 가졌던 사람이 아닐까요?”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세상은 의지나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부당함이 정당함을 이기는 경우도 많다.

함께했던 사람 중 누군가의 피해가 가시화되면 분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점을 파고들면 단단했던 벽에 금이 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일 수도 있었다.

최인호 교수와 복강경 센터 의사.

누가 이길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진충기와 한성희는 이미 피해를 봤고, 사유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부당할 수도, 정당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상처뿐인 결과만 초래될지도 몰랐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사람의 생각에 달렸다.

‘최인호 교수님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자존심이 어느 쪽으로 작용할지 모르겠네. 수치라고 느끼면 물러날 테고, 도전이라고 느끼면 난장판이 되겠지?’

현실적으로 상황을 생각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다. 하지만 굴지의 병원이란 명예는 단순히 규모나 실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H 병원 관계자 역시 이성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할 것이다.

‘내가 경영진이었다면.’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오창도 선생님,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지훈이 말이 맞습니다. 진충기 선생님 곧 복귀하실 것 같습니다.”

오창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일, 눈곱만치도 관여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회진 늦었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모두들 병동으로 달려갔다.

오창도의 발걸음이 아직도 무거워 보였다.

김지훈이 슬며시 다가가 말했다.

‘의사에게 약은 역시 환자지.’

“오창도 선생님, 정은영 환자 오늘 퇴원하는 거 아시죠? 같이 가서 인사라도 하셔야죠.”

퇴원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의 밝은 얼굴, 슬그머니 내미는 주스 한 박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또 한 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태연할 의사는 없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수술을 했기에.

한 사람의 생명이 드디어 빛나기에.

잠시 넋 놓은 것처럼 미소 짓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달렸다.

환자 연령 때문에 수술 순위가 밀린 오창도가 피식 웃고 말았다.

‘교수가 돼서도 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언제 보아도 희한한 구석이 참 많은 의사였다.

문득 리더의 조건이 무엇인지 떠올리고 있었다. 김지훈을 보며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