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무지개? (2)
수술 직전,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정은영이었다. 지금도 겉모습은 전과 다름없었지만 발걸음이 제법 가벼워 보였다. 천식 환자처럼 거칠었던 숨소리도 많이 잦아들었다. 고도비만으로 인한 영향뿐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표정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다시 찾은 삶의 희망과 의지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운동 중이세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죠?”
“네. 몸이 한결 개운하고, 기분도 좋아요. 꿰맨 자리만 조금 따끔거릴 뿐이에요. 어제 호르몬 검사 한다고 하셨는데, 결과 나왔나요?”
“아주 잘 나왔습니다. 오늘 점심부터 밥 드시고, 괜찮으면 내일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아! 내과 선생님도 동의하셔야 하는 건 아시죠?”
“그럼요. 정말 퇴원해도 되는 거죠?”
정은영이 밝고 활기차게 웃었다. 목소리가 의외일 정도로 예뻤다.
사람이 이토록 빨리 변할 수도 있나?
겉모습은 거의 변한 것이 없었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울하고, 짜증스럽고,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의욕을 잃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모습이 바로 진짜 정은영이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수술 전 온갖 문제로 고심했고, 그 어떤 수술보다 힘들고 어렵게 수술했다. 수술 후에도 합병증 발생 우려로 여간 신경 썼던 것이 아니었다.
‘호르몬과 관련된 질환은 접근 자체가 무서울 정도지만 일단 해결되면 정말 극적으로 변하네.’
결과적으로 보면 정상보다 커진 부신 하나 달랑 제거했을 뿐이었다. 그 작은 차이에 이렇게 큰 변화를 보이다니 더없이 뿌듯하면서도 고맙기만 했다.
꾸준히 건강에 신경 쓴다면 달덩이 얼굴과 고도비만도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질 것이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어린 딸인 양 곁을 꼭 지키고 있는 늙은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딸과 김지훈을 보며 입은 웃고 있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 같았다.
“아버님, 좋으시죠?”
“그럼요. 좋고말고요. 우리 딸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마치 대견한 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어깨를 잡고 연거푸 문질렀다. 까맣고 마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이만저만 따스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의사 하는 맛이었다.
써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살짝 가쁜 숨소리를 내며 정은영 환자가 복도를 거닐었다. 한 발 한 발에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다.
오늘 하루가 편안하고 순탄하게 지날 것 같았다.
예감 틀리지 않았다.
진료 내내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내일 수술 준비 역시 차질 없이 진행됐다.
“다들 일 끝나면 바로 내려와라. 들어야 할 말이 두 가지가 있다.”
‘이혁민 선생님이 갑자기 호출하면 꼭 무슨 일거리가 생기는데 오늘은 아니겠지?’
내심 불안했건만 금상첨화, 이혁민 교수가 선물 보따리까지 풀었다. 함께 있던 신현수와 이경석이 번쩍 만세를 부를 정도로 기쁜 소식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이었다.
“내일 저녁에 교수와 펠로우 자체 면접이 있다. 병원 수준에서도 임용된 것과 다름없지만 철저하게 진행시킬 생각이다. 동기나 선배라고 대충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알았나?”
의아한 말이었다.
“선생님, 저희도 점수 같은 걸 주나요?”
“점수는 아니지만 근무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은 해야지. 내년에 펠로우 교육 맡아야 하는데 당연한 일 아니야? 누구 한 사람이라도 결격 사유를 지적하고, 합당하다면 펠로우 임용 취소할 거다.”
이런 일에 관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이혁민 교수다. 허튼소리는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말하면 된통 혼날 것이다.
“파트는 어떻게 됩니까?”
손일석-혈관 파트
김경수-대장 파트
오성민-위장 파트
전임 밑으로 한 명씩 사이좋게 들어왔다. 혈관 파트는 상황이 달랐지만 어쨌든 오창도가 있기에 김지훈도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혈관 파트도 곧 신기동 선생님이 오시니까, 몇 개월만 지나면 완전 해방이다. 으하하하!’
궁금함이 하나 남았다.
“최철한 선생님은 어느 파트로 오십니까?”
“유방, 갑상선 파트를 맡을 거다. 아직은 환자 수가 적지만 여성 질환에 대한 관심이 상당해서 앞으로 많이 늘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아마도 메이저 파트와 똑같은 규모로 크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환자가 넘쳐 나지만 미래에 대한 대비는 무척 중요하다. 이혁민 교수는 과장으로서 혜안을 갖고 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김지훈으로서는 반색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유방, 갑상선 수술까지 빠지면 남는 시간이 얼마야. 와우! 우리 딸, 아빠가 간다. 희연아, 기다려! 이렇게 되면 간담도와 라파로에 확실하게 매진할 수 있겠어. 너무 좋다. 이런 일만 쭉쭉 터져라.’
끝이 아니었다.
“최철한은 내년에 바로 근무 시작한다. 구미 병원 스태프 보강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채 2주도 안 남았다.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하마터면 크게 소리 지르며 만세를 부를 뻔했다.
“선생님, 그러면 저도 내년부터는…….”
찌리릿! 서늘한 눈길에 한 방 맞았다.
“니 아직 멀었다. 최철한 선생 근무와는 별개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거니까 김칫국 마시지 마라.”
“선생님! 파트 교수님이 두 분이나 되시는데…….”
“최철한이 내 파트를 알면 얼마나 알겠나? 말이 교수지 펠로우나 다름없다. 니 구미에서 라파로 가르친 경험도 있잖아? 오자마자 진료와 수술 바로 해야 해서 더 신경 써야 한다. 필요하면 세컨도 마다하면 안 돼.”
“제가 세, 세컨도 서야 합니까?”
“그래. 세컨도 수술 팀이다. 불만 있나?”
우워워워! 세컨? 퍼스트도 아니고 세컨을!
불끈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전임으로서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했다.
관건은 상대가 이혁민 교수, 게다가 과장이라는 사실이었다.
말을 할까? 말까?
김지훈의 눈치를 모를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아니, 이미 예측하고 대비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엉클어지는 순간.
“니 아직도 날 모르나? 말이 세컨이라는 거지, 그럴 리가 있겠어? 내도 가르치겠지만, 너하고 같이 수술할 때 부족한 면이 보이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말해라. 널 내가 확실하게 믿어서 맡기는 거다.”
확실하게 믿는다고?
이런 말 정말 듣기 힘들다.
순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시간 탓에 상황을 바꿀 기회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미소 짓고 있는 이혁민 교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 거미줄에 걸린 것 같았지만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펠로우 세 명에 교수 한 명이 보강되는데, 결국 변한 것은 오창도의 여파뿐이었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일복 터진 오창도 말이다.
어깨에 가득했던 힘이 쭉 빠졌다.
아니다. 긍정은 힘이다!
안 될 때는 소소한 일에서도 행복을 찾아야 한다.
‘최철한 선생님은 교수로 오시니까 최소한 당직 서는 날은 줄겠네. 자리를 확실히 잡으시면 수술 들어갈 일도 없잖아. 멀지 않았어. 시간문제일 뿐이야.’
다시 한 번 힘을 냈지만 이미 빠진 힘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찢어진 입을 보는 순간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직 두 번째 소식이 남았다.
편한 쪽일까? 힘든 쪽일까?
이혁민 교수가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다가왔다.
반드시 좋은 일, 편한 쪽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이혁민 교수가 난데없는 자료 한 뭉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신기동 교수가 보내온 자료다. 곧 혈관 파트가 장기이식 센터로 확장될 예정이다. 신장이식만이 아니라 간이식까지 준비해야 한다. 이미 내과는 교수 선발까지 끝냈다.”
김지훈의 귀가 활짝 열렸다.
신장이식은 몰라도 간이식이라면?
분명 편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일이다. 더구나 평소 간이식에 관해 틈틈이 생각해 오던 참이었다. 이런 기회는 확실히 잡아야 한다.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간이식을 하려면 상당한 준비가 필요할 텐데요. 당장 양압 시설을 갖춘 병실은 확보할 수 있습니까?”
이식 수술 후 치명적인 합병증은 면역 거부와 더불어 면역 저하로 인한 감염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있지만 병실 시설도 문제였다.
의사를 비롯해 방문자의 청결부터 공기를 통한 세균 전파를 막기 위해 외부로 공기를 24시간 내내 밀어내야 한다.
수술 방과 중환자실이 대표적인 예다.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시설이다.
“그건 이미 계획이 잡혔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일단 지금 준 자료부터 확실하게 파악해. 내과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세미나를 열 생각이다. 신기동 교수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준영 선생님도 참석하실 거다.”
으악! 고난이도 이론이다.
못할 것 없고, 간이식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단,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아직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한 짐 가득 등에 얹는 일이었다.
게다가 스승님까지?
한눈팔 여지가 없었다.
절로 손가락을 꼽고 말았다.
‘기존 수술에 유방과 혈관은 그대로고, 간이식 이론까지 확실하게 갖추려면 도대체 언제 쉬지? 우리 희연이, 경아 씨 얼굴은 또 언제 보나. 아! 이론인데 장소를 가릴 이유가 없지. 집에 가서 하면 되겠구나.’
밤늦도록 떠나지 못하는 연구실을 떠올리던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석이조라 생각했다.
가능할까?
이제 유아기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시기인데?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희연이를 옆에 두고 정신 집중할 수 있다면 아빠가 아니다. 아직 기어 다니지 못해 말썽 부릴 일까지 없어 좋아 죽을 수도 있다.
초보 아빠의 착각이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김지훈은 이혁민 교수가 자꾸 눈길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름 방법을 생각해 냈고, 다소의 여유를 찾았다.
‘공부할 거리 하나 늘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희연이 보면서 공부하면 된다.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주문까지 걸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이제 퇴근할 일만 남았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인사를 하며 엉거주춤 일어나자 이혁민 교수가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함께 일어나던 김지훈은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손짓 방향이 정반대였다.
‘어후! 왜 이러시지? 설마 다른 일이 또?’
난감을 넘어 두려움까지 몰려왔다.
“제게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래. 내가 아니라 신기동 교수다.”
‘어라? 이게 무슨 말씀이지?’
띠리리리! 띠리리리!
마치 짠 것처럼 국제전화가 왔다.
“신기동 교수다. 받아라.”
“예, 선생님. 여보세요? 김지훈입니다.”
(나다. 자료 받았지?)
여전히 사족은 조금도 붙이지 않았다. 못 본 시간이 몇 달인데 인사나 안부마저 생략이다.
“예, 받았습니다.”
(한 달 후에 돌아간다. 준비 잘되면 곧바로 이식 수술을 할 수도 있어. 그때 수술은 나하고 네가 해야 되지만, 신현수와 이경석도 참여해야 할 경우가 생길 테니까 철저히 준비해.)
“예. 자료 확실하게 파악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혈관 수술 말하는 거야. 신부전 환자 이상으로 손이 중요해. 나 혼자 공여자와 수여자 수술 다 못한다는 거 알지? 미진하면 간 센터 차려 놓고 구경만 해야 된다. 확실하게 하자. 써전 손이 수준 이하라 안 굴러간다는 소리 나오면 옷 벗는 게 낫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도 신기동 교수가 혈관 수술을 보고 칼을 날릴지, 안 날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수까지 다녀온 이상 칼은 더욱 예리해졌을 것이다.
손일석보다 먼저 찔려 죽게 생겼다.
(신현수하고 이경석도 네 책임이야. 가서 보자.)
확실하게 하라는 말도 모자라 책임까지?
눈물 더하기 눈물이다.
오창도가 있지만 펠로우와 교수 보강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간이식 이론 준비는 결코 만만치 않다. 여기에 혈관 수술을 다시 준비하고, 강화해야 한다면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리어 일만 잔뜩 늘었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이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보일 것이 빤했다. 펠로우는 3개월이 지나야 오고, 혈관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었다.
‘현수하고 경석이 형이라고 해도 신기동 선생님 눈에 들려면 장난 아닐 텐데 큰일이다. 어이구! 내가 제일 문제네.’
찬란하면서도 여유로워야 할 미래는 어디 간 걸까?
피스(Peace)!
간만에 마음의 평화를 외쳤다.
명상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간이식 자료를 떡하니 펼쳤지만 희연이 웃는 소리, 브브브 침 튀기는 소리, 발딱발딱 쳐드는 고개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희연아! 아빠다, 아빠. 아빠 해 봐. 아빠! 아빠!”
결국 한 글자도 못 봤다.
‘이론을 집에서 준비할 수 있을까? 어쩌지?’
왠지 불안하기까지 해 잠자리에 들어서도 자꾸만 간이식 자료에 신경이 쓰였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내일을 위해 충분히 자야 한다. 조금도 줄지 않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로 달려갔다.
응애! 응애!
오늘도 어김없이 희연이가 울었다. 잠투정이 많이 줄었지만 하룻밤에 한 번은 꼭 깨어나 엄마, 아빠 품을 찾았다.
오늘따라 눈이 반짝 떠졌다. 부스럭부스럭 일어나는 고경아를 잡았다.
“내가 재울 테니까 자요.”
“괜찮겠어요?”
“이 정도쯤이야.”
거실로 나가 희연이 안고 한 손에 자료를 들었다. 희미한 조명과 달빛에 의지해 몇몇 부분을 읽었다. 새근새근 나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