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무지개? (1)
찜찜한 표정으로 진충기를 보던 오창도가 거듭되는 재촉에 입을 열었다. 분위기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마지못한 얼굴이었다.
김지훈으로서는 꺼림칙해도 내심 바라던 일이었다.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까닭이었다.
간략한 설명을 들은 진충기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난 주저앉고 있는데 한발 또 달려가는구나. 한 교수 발령도 막지 못한 내가 누굴 탓할까? 어쨌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지.’
“김지훈 선생님, 정말 대단한 수술을 했습니다. 나 같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수술 전에 성공 가능성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원래는 측면 접근을 하려고 했는데,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될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환자 살리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확신을 가질 상황도 아니었고요. 오창도 선생님과 함께하지 않았으면 실패했을 겁니다.”
진충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은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환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갖고 있었다. 성공이 가져다주는 명예를 생각하지 않기에 도리어 성공했을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점이었다.
얼마 전이었으면 명예에 매몰됐겠지만 이제는 자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다만 너무 늦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울 뿐이었다.
“사실 선생님께도 도움을 구하고 싶었는데 최종 결정을 너무 늦게 내렸습니다. 병원 사정도 있고…….”
오해할지도 몰랐다. 병원 사정이란 말을 하는 순간 ‘아차’ 싶었는데 꽤나 날카로운 진충기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뒷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못 들은 척하는지도 몰랐다.
‘너무 늦게 알았네. 하긴 내 코가 석 잔데 알았다고 해도 도움이 되긴 어려웠겠지. 우리 병원 사정은 말해야 민폐만 끼치는 일이고.’
김지훈을 보던 진충기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문득 한 가지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마음속 시름과 괴로움을 잊고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방금 전까지 어깨가 처졌던 진충기에게 활기가 감돌았다. 천생 써전이었고, 고맙게도 어느 병원에든 그런 의사가 있기 마련이었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동안만은 모든 것을 잊었다.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복강경을 이용한 부신 절제술의 의미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열띤 목소리를 들었다.
진충기가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늦었지만 다음 수술에 꼭 도움이 됐으면 하고, 나도 시도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병원 써전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즐겁네요. 어이쿠! 시간이 너무 늦었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 수술 반드시 성공하길 바랍니다. 오 교수, 다음 주에 시간 되면 술 한잔하자.”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 관한 말이 또 나오는 것이 싫고 두려운 듯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10시가 훌쩍 넘었지만 김지훈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말을 못 들었다.
도대체 왜 수술을 부탁한 것일까?
‘안 좋은 일이 또 생긴 게 분명한데 뭘까? 복강경 센터에 큰 문제가 생긴 걸까? 개인적인 문제일까?’
오창도는 심난한 정도가 아니었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한 교수에게 연락해 봐야겠습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 교수? 때마침 잘 전화했어. 진충기 선생님이 방금 전에 우리 병원을 다녀가셨어. 얼굴이 너무 안 좋고, 수술 부탁까지 했어. 무슨 일 생긴 거지?”
시간이 갈수록 오창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통화를 끝낸 후 한동안 입도 열지 못했다. 안색이 극도로 어둡고 침울했다.
“오창도 선생님,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최근 대리 수술 문제로 크게 충돌했답니다. 더 이상 미적거리면 일반외과 전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에 최인호 교수님이 도리어 화를 낸 모양입니다. 참관 때 일과 겹쳐 도전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긴 합니다.”
어느 조직이든 권위 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하급자의 건의를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행동으로 보기도 한다.
결국 변한 진충기와 변하지 않은 최인호 교수로 말미암아 H 병원의 고질적인 문제가 터졌을 것이다.
진충기의 위상을 고려하면 오창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파급효과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요?”
“진충기 선생님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다음 달부로 대기 발령을 받았답니다. 며칠 내에 향후 거취가 확실하게 결정 난다는군요.”
“보직 해임에 대기 발령이요?”
분원 발령보다 더한 처분이었다.
복강경 센터의 핵심이자 주축인 진충기에겐 나가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관 때 일과 한성희 교수의 좌천이 맞물리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놀람을 넘어 답답함까지 다가왔다.
‘도대체 최인호 교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창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셨네요. 한 교수에 이어 진충기 선생님까지 배제하면 한동안 라파로 센터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울 겁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계신데…….”
“한두 사람에게 수술을 집중시킨 탓이죠. 다른 수술은 몰라도 간 절제 수준의 수술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공백을 메우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래서 수술 부탁을 하셨구나.’
다른 병원의 운영을 탓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가슴이 꽉 막혀 왔다.
일반외과 중추 중 한 명인 최인호 교수가 제자를, 후배를 제대로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답답해졌다.
차가운 기운이 점점이 느껴졌다.
추적추적 어울리지 않는 겨울비가 내렸다.
“한겨울에 비가 오네요.”
밤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어두컴컴한 하늘이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부신 선종 수술을 복강경으로 해냈다는 기쁨과 보람이 남아 있어 도리어 더 칙칙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소나기라면 빨리 그치기라도 할 텐데.’
나직한 한숨을 내쉬는 김지훈의 눈길이 진충기가 사라진 곳을 좇고 있었다.
오창도가 눈가를 찌푸렸다.
‘진충기 선생님과 한 교수를 내치고 새 판을 짜려는 게 분명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을지 몰라도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고, 누가 최인호 선생님을 막을 수 있을까?’
“밖에서 보는 게 더 괴롭네요. 당장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더 괴롭네요.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전화위복이란 말이 꼭 좋은 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한때는 모두 동료였다. 어떤 감정이든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더구나 진충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그 모습에 문득 스승이 떠올랐다.
‘스승님도 안 좋은 일로 음성에 가셔야 했었겠지? 내가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면 어땠을까? 오창도 선생님 마음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나 혼자 마음 편히 지낸다는 것이 미안하네요.”
혼잣말일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진충기와 한성희도 해결 못하는 일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정호와 정훈철에게 말해 최인호 교수를 끌어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답이었다.
‘설마 참관 때 일과 대리 수술 때문만은 아니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해.’
한 가닥 희망이었다.
개인의 자존심과 라이벌 의식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프다 못해 슬픈 일이었다. 발전의 기회가 아니라 자진해 구렁텅이에 빠지는 꼴에 불과했다.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다. 진충기 선생님 같은 써전이 있다는 것은 내게도 엄청나게 좋은 일인데, 왜 최인호 교수님은 그걸 모를까?’
정말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알고도 자신의 제자들을 쳐 낸다면 욕심과 망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눈 먼 사람이 일반외과 선배라는 사실을 용납하기도 힘들었다.
오창도가 갑자기 가슴을 쳤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 해결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불현듯 스승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서정호와 정훈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바로 그 말이었다.
“오창도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께서 참관 후에 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무슨 말씀이요?”
“H 병원이 여기까지 발전한 이유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전 한두 사람의 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힘이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만일 부당한 일이 분명하다면 라파로 센터가 갖고 있는 저력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부당함에 머리만 숙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또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내 동기와 후배들은 절대 비겁하지 않아. 지금쯤 분명히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찾고 있을 거야. 부족한 것은 용기를 줄 격려뿐이다.’
오창도가 입술을 꽉 물었다. 두 눈동자가 불길로 활활 타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님, 하마터면 또 낙심하고 좌절할 뻔했습니다. 이젠 비록 다른 병원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H 병원 의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 선배, 동기, 후배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됐습니다.”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스승의 말을 전했을 뿐인데 선배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꽤 쑥스러운 일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갑갑함을 털어 내고 웃을 수 있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오창도의 목소리가 상당히 힘찼기 때문이었다.
웃는 와중에 돌연 부르르 몸이 떨렸다.
‘가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얘기는 결국 라파로 센터에 진충기 선생님과 한성희 선생님을 대신할 수 있는 써전이 많다는 말이잖아.’
라이벌이 우후죽순이다.
당장은 간 절제가 힘들어 수술 부탁까지 했지만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진충기, 한성희, 오창도와 같은 써전을 길러 낸 저력을 가진 병원이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일로 상당히 늦었다.
오창도를 뒤로했다.
병원 일을 집으로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인기척에 눈을 뜬 고경아가 잠결에 웃으며 손을 잡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언제나 따스하고, 촉촉했다.
‘사랑해요, 경아 씨.’
“피곤할 텐데 빨리 씻고 자요.”
새근새근 잠든 희연이 뺨에 뽀뽀 한 번 하고 평화를 즐겼다. 빈도는 줄었어도 자다 말고 잠투정을 한바탕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 희연이 오늘은 잘 자네. 이렇게 무럭무럭 건강하고, 예쁘게 자랐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우리 딸.’
가족은 마음의 평안이자 기쁨이었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가 또 지났다.
***
오창도의 어마어마한 일복은 진충기의 일을 잊게 만들었다. 당직이 끝난 후의 얼굴을 보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보다 몸이 힘든 편이 백배 나을 것이다.
김지훈은 더 바빴다.
‘어이구! 힘들다. 오늘도 최대한 일찍 들어가자.’
틈만 나면 희연이가 아른거렸다.
바짝 고개를 들고 힘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곧 몸을 뒤집을 것 같았다. 침을 튀기며 브브브 소리를 낼 때면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지만 엄마 아빠 소리를 하려면 4~5개월 정도 남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아빠 소리를 해 댔다. 이렇게 예쁜 딸이 엄마보다 아빠라는 말을 먼저 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희연아! 아빠다, 아빠. 아빠 해 봐. 아빠! 아빠!”
꺄르르! 웃는 희연이를 보며 고경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해낼 수 있다. 발음상 엄마라는 말이 훨씬 더 하기 쉽다고 해도 말이다.
퇴근 후 남는 시간 내내 희연이와 지지고 볶다 보니 어느 틈에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김지훈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차트를 펼쳤다.
정은영 환자의 바이탈은 사흘째 안정적이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비만과 쇠약, 두 번의 수술 연기를 야기한 상황, 오랜 수술 시간은 수술 후 합병증을 유발하고도 남았지만 의심할 만한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다.
죽을 먹은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식사 후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장이나 소화기관을 건드린 수술이 아니라고 해도 전신 상태가 무척 좋다는 간접적인 지표였다.
가장 중요한 검사 결과가 남았다. 각종 호르몬 수치와 전반적인 혈액 검사다.
떨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하나하나 자세히 확인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거나 정상에 근접했다. 우측에 남은 부신은 지극히 정상적이란 의미였다.
‘됐어. 실밥은 외래에서 풀어도 되니까 변동이 없다면 내일 퇴원해도 되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는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액 하나 달랑 매달린 폴대를 끌고 운동을 나온 정은영과 얼굴 가득했던 수심이 사라진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