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소나기? (2)
보호자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결정을 알렸다.
늙은 아버지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김지훈의 두 손만 꼭 잡았다. 손등을 적신 뜨거운 눈물 한 방울에 아버지의 절실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만일 한 번 더 연기된다면 수술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환자의 고통과 애끓는 보호자를 외면하고,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보호자분, 금요일입니다. 환자분의 마음이 편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환자분, 우릴 믿으세요.”
정은영 환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때였다.
마취과와 수술 방에도 변경 사항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새로운 준비를 부탁했다. 수술 팀은 물론 도움이 될 모든 사람과 함께 논의에 들어갔다.
불과 이틀 남았다. 전력을 다해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요일 정규 일과가 시작됐다.
진료하는 날이다.
오창도와 함께 진료하는 덕에 한결 여유를 찾은 김지훈이 오전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외래를 나섰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어쩌면 수술을 꼭 성공하라는 암시일지도 몰랐다.
수술이 밀린 신현수가 부득이하게 비만 수술을 목요일에 하게 된 것이다.
‘정은영 환자도 비만이 심하니까 도움이 될 거야.’
수술실에 들어섰다. 비만 수술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누군가를 본 김지훈이 흠칫 놀라다 말고 미소를 머금었다. 같은 생각인지 오창도가 이미 참관하고 있었다.
처컥! 처컥!
규칙적인 기계음 소리 속에 신현수가 위와 비장 사이 연결 조직을 박리하고 있었다.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신현수! 언제 봐도 대단해.’
능숙하고 익숙한 손길로 조직을 열고 있었다.
혹처럼 매달린 지방 덩어리, 그 속에 숨은 굵고 가는 혈관들, 비장에 손상을 주고도 남을 연결된 조직까지 침착하게 하나둘 해결해 나갔다.
김지훈과 오창도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부신 수술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연결 조직들이 박리되며 후복막 일부가 드러났다. 콩팥이 위치해 약간은 불룩해 보였다.
써전 두 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로 그곳을 절개해 콩팥 상부를 노출시킨 후 부신 선종을 제거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후복막을 박리하는 과정을 상기한 김지훈이 목을 휘휘 돌렸다.
긴장감이 다가온 것이다.
이내 위 절제가 시작됐다.
부신 수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복강경 수술이다. 똑같은 일이라도 내게 부족한 것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넘치는 것이 있다. 기구를 다루는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1시에 가까워졌다. 수술을 잘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오창도에게 눈짓했다.
“선생님, 식사하러 가시죠.”
“어이쿠! 빨리 밥 먹고 오후 진료 준비해야겠네요.”
휘리릭! 후다닥!
무사히 밥 챙겨 먹고 오후 일과까지 끝냈다.
초조한 가운데 정은영 환자를 찾았다.
다행히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써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술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지 몰라 최대한 짧게 얼굴을 비쳤다.
‘내일 아침까지 버텨 주세요. 제발 변동이 없어야 합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수술이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수술 팀 전체가 모여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오창도와 강병옥의 얼굴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번 수술은 4포트로 진행합니다. 병옥아, 네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니까 수술 과정 완전히 숙지해.”
숙달된 수술의 경우 3포트로 해도 안전하기 때문에 시행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부신 선종 수술의 위험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째깍! 째깍!
제법 늦은 시각까지 연구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함께 고민할 사람은 병원 밖에도 있었다.
슬슬 본격적인 업무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고경아와 또 한 번 복기했다. 칭얼대는 희연이 번갈아 안아 주며 수술 준비하는 것도 꽤 독특한 경험이었다.
“경아 씨, 내일 수술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안 그래도 오늘 허락받았어요. 어시스트는 직접 못 서도 수술 내내 수술실에서 대기하면서 백업할 거예요.”
“우아! 역시 고경아야!”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을 가졌든 노련한 의료진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고경아의 가세는 엄청난 힘과 격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가운데서도 즐거웠다. 성공하고 말겠다는 각오까지 점점 강해졌다.
가족이자 동료인 고경아와 공통 관심사를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기분 수술실까지 쭉 유지하자.’
긴장과 압박 속에서도 편안한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초조한 가운데 출근하자마자 정은영 환자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침 부산함 속에 예정대로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은영의 혈색이 나쁘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한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수술 앞두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환자분, 눈 한 번 감고 뜨면 수술 끝나 있을 겁니다. 아버님, 긴장하지 마세요. 잘 끝날 겁니다.”
시간이 가며 슬슬 긴장이 치솟기 시작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오창도와 마지막 점검을 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취 준비를 하는 김진호 교수 특유의 웃음소리, 기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간호사, 만일을 대비해 대기하는 고경아는 은연중 강력한 힘이 되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강병옥이 보였다.
정은영 환자가 긴장된 기색으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띠! 띠! 띠! 띠! 띠!
한결 안정된 바이탈은 큰 위안이었다.
“환자분, 마취과 김진호입니다. 크게 심호흡하세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취가 시작됐다.
드디어 부신 수술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두 번의 연기 끝에 결정된 반드시 성공해야 할 수술. 단 한 발도 물러설 곳이 없는 수술 방법으로 말이다.
눈을 감았다.
오늘의 수술을 위해 그동안 고민하고 논의한 모든 것들이 한 편의 영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준비한 대로 자신을 갖고 반드시!’
눈을 떴다.
최고의 수술 팀이 눈앞에 있었다.
김진호 교수와 노련한 간호사가 짝을 이룬 마취과.
오창도 교수, 강병옥, 고경아, 고경아를 대신해 일반외과 수술을 전담해 온 또 한 명의 간호사까지 모두가 동료이자 한 팀이었다.
‘동료를 믿고, 우리 팀의 능력을 믿자.’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세요.”
모든 동료에게 짧은 시선을 주었다.
“메스! 보비!”
얇아진 피부와 연약해진 조직은 아주 쉽게 피를 보였다. 스테로이드 과잉 분비로 인한 합병증일 것이다.
오창도의 눈가에 불안이 스쳤다.
‘역시 쉽지 않겠어.’
“에어 팁! 트로카!”
차례차례 준비한 대로 진행했다.
두꺼운 복벽을 뚫고 공기를 주입했다. 점차 빵빵해지는 복부 압력을 확인한 후 계획했던 네 곳을 뚫었다. 카메라와 기구들을 순차적으로 삽입했다.
처컥! 처컥!
나직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장기를 확인했다. 복부 비만과 동반된 심한 내장 비만으로 배 속이 무척 좁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은 지방 덩어리들을 제쳤다.
“간, 위, 비장, 대장, 소장 모두 이상 없습니다. 계속 진행합니다. 오창도 선생님, 카메라 접근시키세요.”
화면 가득 비장과 위 사이 연결 조직이 잡혔다.
조심스럽게 좌상복부 후복막 위를 덮고 있는 지방조직을 제쳤다. 다양한 굵기의 혈관들이 보였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그중 몇 개는 잘라야 한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네다섯 개는 잘라야 할 것 같네요. 문제없을까요?”
“중요 혈관이 지나갈 자리가 아닙니다. 진행하시죠.”
지방조직을 박리했다. 다수의 혈관을 확실하게 노출시켰다.
건드리는 곳마다 빨간 피가 비쳤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려할 정도의 출혈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코 수월한 과정이 아니었지만 경험의 힘은 확실했다.
“켈리! 클립! 가위!”
끼이익! 끼이익! 툭! 툭!
은빛 클립에 묶인 혈관을 잘랐다. 몇 방울의 피가 스르르 흘러나왔다.
오창도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인데, 이렇게 쉽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라파로로 하자고 했겠지?’
후복막이 노출됐다. 나지막한 언덕처럼 불룩 솟은 부위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콩팥과 6센티미터에 달하는 부신 선종이 숨어 있는 탓이었다.
신중하게 콩팥과 부신의 경계 부위를 가늠했다. 기구로 예측 부위를 가리키자 오창도가 복부 CT와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복막 중 콩팥 위를 덮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복막 자체 조직 혈관 외에는 주의할 구조물이 없다. 일부분에 국한된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대단히 유리한 일이었다.
상대적 위험성만 덜었을 뿐이었다.
만일 출혈이 발생해 조직이 피로 물들면 경계가 모호해져 시야에 방해가 된다. 그런 유의 어려움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당연히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한다.
“후복막 절개합니다. 켈리! 보비! 멧젬!”
켈리로 후복막 조직을 살짝 잡아 올렸다. 보비로 일부분을 지져 절개했다.
팽팽하게 전해져 오던 질기고 탄탄한 감각이 마치 실 끊어진 것처럼 사라졌다.
출혈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그맣게 난 구멍에 멧젬(끝이 둥근 수술용 가위)을 끼워 넣고 살짝 힘을 가했다.
후복막 조직이 잘리며 언뜻 내부 구조가 보였다. 아직은 후복막 내인지, 콩팥인지, 부신과의 경계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 진행합니다. 카메라 고정시켜 주세요.”
삐이이! 삐이이이!
날카로운 보비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때마다 오창도가 조심스럽게 석션 팁을 접근시켜 연기를 제거했다.
깨끗한 시야가 확보됐다.
수술용 가위로 전해지는 감각에 집중하며 후복막을 조금씩 절개했다.
점차 속이 드러나며 정확하게 콩팥과 후복막 사이를 박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1센티미터 정도 열었다.
아직도 6~7센티미터는 더 열어야 한다.
“보비! 멧젬!”
예상된 순조로움에도 입 안이 살짝 말라 왔다.
수술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주르륵!
결국 숨어 있던 혈관 하나가 손상됐다.
“수처! 타이! 컷!”
능숙하게 출혈 부위를 잡았다.
어느 틈엔가 후복막이 일자로 길게 열렸다.
누구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도리어 더욱 강한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우려한 과정은 콩팥을 덮고 있는 후복막 절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은 충분한 경험과 수반된 신중함으로 손상을 최소화시킬 자신이 있었다.
관건은 이후 과정이었다.
콩팥과 부신의 경계 부위를 찾고, ‘ㅗ’ 자 모양으로 절개해 후복막을 제쳐야 한다.
즉, 수직 절개 자체가 부신 선종을 박리하는 과정의 시작인 것이다.
성패의 열쇠이자 치명적 수순의 시작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야 할 때였다.
“오창도 선생님, 지금 보이는 조직이 콩팥이 확실하죠?”
“예, 확실합니다. 콩팥 너비와 모양으로 봐서 바로 윗부분에 경계 부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판단이었다.
절개해야 할 후복막 역시 중요 혈관이나 신경은 주행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후복막과 부신을 연결하며 어지럽게 분포한 혈관의 위치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절개와 박리 중 부신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호르몬 분비가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쿠싱 증후군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두렵다.
급격히 다가오는 긴장에 훅! 숨을 내뱉었다.
수술 팀의 완벽한 호흡이 필요한 때였다.
“병옥아, 절개된 후복막 잘 잡고, 내가 신호할 때 출혈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당겨야 한다. 일일이 말해 줄 수가 없어. 수술 전에 상의한 것처럼 판단은 네 몫이니까 정확하게 결정해야 돼.”
“알겠습니다.”
강병옥이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오창도 선생님, 시야 확보 확실하게 해 주시고, 강병옥 선생과 손 잘 맞춰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시작합니다.”
진짜 시작이다.
일자로 절개된 부분 중앙에서 수직으로 절개를 시작해 나갔다. ‘ㅗ’ 자로 열고 활짝 벌리면 부신 전면이 모두 노출될 것이다.
서서히 검붉고, 캡슐로 반짝이는 콩팥의 끝이 드러났다. 곧이어 지방처럼 노란 조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계 부위다.
단 1밀리미터 위라 할지라도 연결 구조가 완전히 달라진다. 박리의 어려움은 천양지차다. 수술 팀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까지 치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