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14화 (914/1,329)

4화. 소나기? (1)

점점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지훈아, 라파로는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지? 배 속 깊이 박혀 있어서 개복이 아니라 옆구리를 열고 수술하는데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대? 겁도 안 나?”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잖아.”

“아까 네 얼굴 보니까 막판까지 고민했을 것 같더라. 쿠싱이야. 스트레스받아서 호르몬 확 쏟아져 나오면 난리 나는 거 잘 알잖아. 몸 사려.”

“알았어, 인마. 그만해.”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인데 성질은.”

투덜거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오창도 선생님 말이야. 현수한테는 반말하면서 왜 너한테는 존댓말을 써? 혹시 네가 선임이라고 기강이라도 잡은 거야?”

“기강은 무슨! 한참 선배에 난 전임이고, 오창도 선생님은 조교수야. 안 그래도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계속 존댓말 쓰시는 걸 내가 어떻게 해?”

“몇 번이나? 우리 김지훈 교수님도 카리스마가 생기는 걸까? 아니야. 그럴 수가 없지. 일문의 주인인 내게도 없는 카리스마가 일개 필부에게 생긴다면 말도 안 되지. 음! 공력이란 건 절대 하루아침에 쌓일 수는 없는데 희한한 일이야.”

“뭐라는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는 거 보니까 맞네.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어. 그게 뭘까? 내 펠로우 생활이 무척 험난할 것 같은 이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신기동 선생님 칼날이 엄청 예리해져 돌아올 것 같은데, 험하긴 험하겠지.”

손일석이 화들짝 놀랐다.

“어후! 그렇겠지? 칼날만 날카로워진 게 아니라 칼 자체를 바꾸셨을지도 몰라. 죽었다고 복창해야 되나?”

“당연한 걸 왜 고민해? 나도 힘을 보태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될 거야.”

“즐거움이 두 배? 이 자식이! 그런 식으로 사니까 오창도 선생님이 말을 못 놓지. 안 보는 새에 심보가 꽤 고약해졌네.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는 거 잊었어?”

“동기가 아니라 난 전임이고, 넌 펠로우다. 집에서는 형님과 동서 사이고. 말조심하자. 하하하!”

이젠 말발에서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각각의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조심해야지. 신기동 선생님도 조심해야 하고. 어이구! 세상 참 험난하다. 군대 안 간 놈들은 페널티 팍팍 줘야 하는데 방법이 없네, 방법이. 천하의 하오문주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 너무.”

심각한 기색의 손일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백일잔치 뒤풀이까지 모두 끝나 있었다.

제법 늦은 시간, 감사함을 전하며 가족을 배웅했다.

물론 경과 보고도 잊지 않았다.

써전과 예비 의사, 인감도장 주인인 고경아만 관심을 가질 일이었기에 간략하게 설명했다.

시큰둥하게 들은 척 만 척하던 가족들은 오직 희연이만 물고 빨았다.

여인들의 수다 덕에 배웅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커피 마실 때는 뭘 했기에 아직도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나둘 집으로 출발했다.

정훈철과 서정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불현듯 한성희 교수가 떠올랐다. 섣불리 할 말도 아니었지만 좋은 날에는 좋은 말만 해야 한다.

희연이도 꽤 피곤한지 품에 폭 안겨 잠에 빠져 있었다. 새근새근 어깨를 넘나드는 숨결은 행복이었다.

오늘 하루 꽤 힘들었을 고경아를 쉬게 하고, 라면 끓여 먹는 것 또한 큰 행복이었다.

왜냐고?

사랑하는 아내가 웃으니까.

***

월요일 아침.

김지훈이 각오를 다지며 출근길에 올랐다.

‘처음 하는 수술이다. 경험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무엇보다 교과서에 나온 대로 충실하게 진행해야 한다. 절대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안 돼.’

응급실에 들어설 때까지 수술 과정을 되새겼다.

눈 빨개진 신현수와 함께 보고를 준비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실 간호사가 다급하게 전화기를 흔들었다.

“내 전화예요?”

“네. 내과 병동이라는데요.”

내과 병동이면 전화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불길한 느낌에 눈가를 찌푸리던 김지훈이 전화를 받다 말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정은영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띠띠띠띠띠띠띠!

허어억! 허어억!

심장이 폭주하는 것처럼 뛰고, 숨소리는 고통스럽게 들렸다. 시뻘게진 얼굴, 괴로움에 안절부절못하며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수술 당일, 불과 두 시간도 안 남은 상태에서 증상이 급격하게 다시 악화됐다.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건만 이미 일은 터졌다.

응급 수술?

수술 연기?

수술을 떠나 이 상태를 버틸 수 있는 걸까?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확한 판단이 아니면 환자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쩔 줄 몰라 김지훈만 보는 늙은 아버지의 두려움과 다급함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내과 교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힐끗 김지훈에게 눈길만 주고 곧바로 환자 상태를 살폈다.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며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갑자기 여러 증상이 확 나오네. 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급작스럽게 호르몬 과다 분비가 유발된 것 같아. 환자분, 불안해하지 말고 천천히 숨 크게 쉬세요.”

때때로 갑상선 기능 항진증 환자가 위기나 중독이라 불릴 정도로 호르몬 영향을 받는 것은 보았다. 이혁민 교수도 갑상선 수술마다 무척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쿠싱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볼 줄은 몰랐다.

적극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병실에서 치료하는 것이 위험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 상태로는 수술은 물론 마취조차 걸지 못한다.

결정은 빨라야 한다.

‘지금은 어떤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한다.’

“선생님, 상태가 좋아져도 오늘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연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어. 언제 하지?”

“언제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안정이 되면 가급적 빨리 수술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수요일 첫 수술로 다시 잡겠습니다.”

“알았어. 최대한 안정시킬게.”

첩첩산중이다.

온갖 생각과 고민 끝에 수술 방법을 정했다.

결국 측면 접근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수술이기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수술을 불과 한두 시간 앞에 놓고 환자 상태가 급변하다니 덜컥 두려움까지 다가왔다.

‘수술 중이나 후에는 문제가 없을까? 반대쪽 부신은 멀쩡하겠지?’

“선생님, 괜찮을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 꼭 건강하게 만들어 주세요.”

늙은 아버지의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내과 치료가 시급한 환자를 두고 써전이 할 일은 없었다. 잠시 보호자에게 수술 연기에 대해 설명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환자 얼굴이 내내 가시질 않았다.

“오창도 선생님, 수술 연기했습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오창도와 강병옥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술의 위험성이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수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스치고 있었다.

어느새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정은영 환자의 상태가 충분히 호전되지 않았다. 증상은 다소 나아졌지만 수술받기에 무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과 교수도 고심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너무 위험해. 미안해.”

연이어 연기 소리가 나오자 김진호 교수가 직접 병동까지 올라왔다. 차트와 환자 상태를 주의 깊게 살핀 후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야. 마취 걸기 힘들어. 김 교수, 환자 상태가 이런데 수술 가능하겠어? 잘못하다간 큰일 나겠다. 약물 치료만 해야 하는 거 아냐?”

“보시다시피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내과 산생님과도 상의했는데, 수술 이외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난감하네. 마취 걸 상태가 되면 걸어 주긴 하겠지만, 최종 책임은 집도의에게 있다는 거 잊지 마.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 급하다고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결정해. 언제 할 거야?”

무작정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관련된 모든 의료진의 긴장과 피로가 누적되기 전에 가급적 빨리 날짜를 정해야 했다.

“이틀 더 주십시오.”

“그때는 가능하겠어? 장담 못하겠지? 환자를 위한 일이니까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결정해.”

결국 금요일로 또 연기됐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누구보다도 신경 쓰이고, 불안할 김진호 교수가 툭툭 어깨를 치며 웃어 주었다.

고마울 뿐이었다.

김지훈이 환자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마취는 가능하다고 해도 수술이 문제야.’

김진호 교수의 걱정은 알지만 약물 치료는 답이 아니었다. 무조건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술 자체가 아니라 수술 방법까지 다시 검토해야 했다.

마취도 불가능한데 측면 접근을 견딜 수 있을까?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는 상태에서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해. 마취를 걸었다고 치자. 측면 접근 역시 크게 열어야 하는데, 수술 중 받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을까? 수술 후에는 더 문제다.’

마취는 말 그대로 통증을 못 느낄 뿐 깊은 수면과 다름없다. 커다란 절개 창, 그만큼 절개해야 하는 지방과 근육, 후복막까지 지속적으로 상당한 육체적 부담이 가해질 것이다.

마취 중이라고 안전을 확신할 만큼 경감될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인지 확언할 수 없었다. 두 번의 수술 연기에 내포된 의미와 심각성을 다시 평가해야 했다.

기존 방법은 분명히 무리였다. 대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결국 복강경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마취 시간이 길어지긴 하겠지만 손상 부위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관건은 우리가 해낼 수 있냐는 것이다. 난 할 수 있을까? 우리 수술 팀의 능력을 담보할 수 있을까?’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수술을 몇 번이나 했지만 이번만큼 자신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환자는 써전을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곰곰이 부신을 제거하는 과정을 되새겼다.

수없이 되풀이했다.

생각과 실전은 확연히 다르다.

신현수와 했던 수술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복강경으로 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은 확신했지만, 정작 집도의로서 가져야 할 자신감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써전의 조언이 절실했다.

신현수, 이경석, 오창도와 상의했다.

지난주와 달리 상황이 급변했다.

모두 김지훈의 판단에 십분 동의했고, 우려와 불안감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고민만 해서는 실행할 의지마저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자의 경험은 비슷한 듯 다를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야 했다.

“현수야, 비만 수술할 때 주의점이 뭐지? 경석이 형, 조기 대장암 때 후복막 박리해 본 적은 없어요? 오창도 선생님, H 병원에서 한 수술 중 도움이 될 만한 사례는 없나요?”

모든 기억을 끄집어냈다.

한 마디 한 마디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집도의의 마음과 열정이 느껴졌는지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일어날 줄 몰랐다.

긴 논의가 끝났다.

불과 반 발자국 정도 전진한 정도였지만 어느 방법을 선택하든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써전의 선택은 명확했다.

환자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한다!

수술 중에는 물론 수술 후에도.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오창도 선생님, 합시다. 라파로로 합시다.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환자 살려야 합니다. 두 번이나 연기하게 된 원인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오창도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똑같이 위험하다면 다른 도리가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수야, 경석이 형, 측면 접근도 복강경만큼 위험합니다. 도와주세요. 오늘 빠트린 부분이 있다면 수술 중에라도 알려 주세요.”

현재와 향후 예측되는 환자 상태를 모두 감안해 결정을 내렸다. 뒤돌아보면 볼수록 실낱같은 확신은 없어지고, 자신감만 사라질 것이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길에서 더 위험한 길을 선택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결과가 빤히 보이는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해 도리어 초유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좋아. 가 보자. 어느 방식이든 환자에게 다 위험하다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맞아.”

마침내 뜻이 하나로 모였다.

다시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스승을 찾았다.

‘라파로로 시도하겠다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의 길이겠지. 나도 동의한다.’

“결정했으면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고민해 보마.”

“감사합니다. 금요일 첫 수술로 시작하겠습니다.”

급히 나가는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교수가 피식 웃었다. 단점이 없을 수 없겠지만 누가 보아도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의사였다.

이혁원도 그런 써전이 되길 바랐다.

‘혁원아, 모든 걸 배워서 네 것으로 만들길 바란다. 너희 둘 다 내가 가 보지 못한 곳까지 가 보았으면 좋겠다. 녀석들!’

문득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와이프의 말에 화들짝 놀라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이라도 보자는 말이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별달리 해 준 것도 없는데 시간은 무심하게 잘도 흘렀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아들이 어느새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있다. 전공의 1년 차였던 김지훈이 벌써 전임이라는 사실마저 새삼스러웠다.

‘지훈아, 혁원아, 세월이 흐를수록 더 미안해지는구나.’

그 시간, 스승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김지훈은 부리나케 병동을 달리고 있었다.

오직 수술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젊음이 주는 특권이자, 젊기에 가능할 일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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