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12화 (912/1,329)

3화. 무지개를 보려면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Ⅳ (1)

매서운 눈초리가 아버지, 제부, 동생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중 가장 서늘한 느낌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다. 손사래까지 쳐야 할 때였다.

“경아 씨, 나 안 가도 돼요. 어차피 라파로로 하지도 못하고, 응급 수술이 도움이나 되겠어요? 동서, 처남, 왜 그런 말을 해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들어?”

차마 장인어른까지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장된 손짓으로 손일석과 고경철을 가리키며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크게 웃었다.

고경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편의 갈등을 모를 아내가 아니었다.

‘밤새 아쉬워서 한숨 쉬는 걸 보느니 지금 보내는 게 낫지. 그 환자 수술 날이 내일만 아니었으면 국물도 없었는데, 미워 죽겠네.’

“지훈 씨, 어차피 자리 다 끝났는데 들어가 봐요.”

“내가 어떻게…….”

“우리 여자끼리만 커피 한잔하려고 그래요. 아빠, 형부들하고 술이나 한 잔 더 하세요. 경철이 넌 우리 차 운전해야 하니까 먹지 마.”

“술? 그럴까? 손 서방, 자네도 갈 거지?”

술자리일까? 병원일까?

어디인지 몰라도 지금 손일석에겐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잠잠했던 투지가 솟구치며 격한 흥분이 다가왔다. 김지훈과 신현수의 손을 동시에 볼 기회는 결코 흔치 않았다.

“예. 형님하고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어라? 고성문의 말은 그게 아니었나?

꿈틀거리는 눈썹을 본 손일석이 부랴부랴 김지훈을 재촉했다.

남자들만의 자리를 갖게 된 서정호와 정훈철도 등을 떠밀다시피 김지훈을 재촉했다.

‘희연이 백일 날까지 내가 이래야 하나?’

“형님, 갈등 때리지 말고 아버님 말씀대로 희연이 열심히 가르쳐서 의대 보내면 됩니다. 써전까지 시키면 오늘 일은 아버님 말씀대로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손일석 몸이 더 달았다.

아직도 갈등이지만 소중한 기회임이 분명했다.

어여쁜 희연이 꼭 안아 주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 간신히 옮기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장모님, 처형, 형수님, 죄송합니다. 경아 씨, 고마워요.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요.”

한없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감추고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과연 부신을 확인할 수 있을까?

자신보다 더 서두르는 손일석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타고난 일복도 모자라 가족들까지 나서서 일복을 더했다. 스스로 일을 찾는 손일석도 있는데 힘들어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족, 특히 고경아의 배려 덕에 또 한 명의 환자를 안전하게 수술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희연아, 아빠가 미안하다. 나중에 맛있는 분유 사 줄게.’

분유로 딸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했다.

***

개인 병원에서 전원한 환자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창백한 안색,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과 혈액이 심각한 상태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송진우와 오하석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간호사, 빨리 바이탈 체크합시다. 오하석, 수액 혈액 확인하고 중심 정맥 잡자. 소변은 어때?”

띠띠띠! 띠띠띠!

심장박동이 급박했다.

소변 줄은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송만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사고 시간을 고려하면 당연히 골든아워는 지났을 것이다. 초기 대처를 잘한 덕에 치명적인 상황까지 밀리지 않았지만 언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

지금도 아슬아슬하다.

의료진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CT상으로는 비장과 콩팥 모두 손상받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콩팥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부신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원칙대로 하는 게 맞아.’

신현수도 콧등을 찡그렸다.

“무척 급한 목소리로 손상이 심하다고 전화해서 백 퍼센트 제거해야 할 줄 알았는데, 콩팥은 두고 봐야겠다. 희연이 백일잔치 중에 왔는데, 미안해서 어쩌냐.”

“환자 잊지 않고 전화해 줘서 도리어 내가 고맙지. 어차피 백일잔치는 거의 다 끝났어. 환자를 위해서도 남겨 둘 수 있으면 남기는 게 좋잖아?”

한시가 급했지만 선배들이 그랬듯 믿고 맡기는 것 또한 수련의 일부분이다. 적절하면서도 확실하게 대처하는 송진우를 보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이제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어떻게 온 거야?’

집에서 쉬고 있어야 할 오창도와 간만에 민간 세계 공기를 맡았을 손일석 때문이었다. 스스로 일복 만드는 사람 한 명, 아니 두 명 추가다.

“현수야, 간만이다. 조카 백일잔치 왔다가 네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들렀어.”

“김지훈 선생님, 딸 백일인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신현수 선생 전화받고 가능하면 저라도 부신 쪽 확인하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그런데 이분은?”

하오문주다운 정보력과 눈치 사라지지 않았다.

“아! 누구신가 했더니 새로 오신 교수님이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년에 혈관 파트 근무를 할 손일석입니다. 제대 말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몸 사리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결정도 안 됐는데 혼자 확정이다. 긍정적인 모습만큼은 보기 좋았다.

“반갑습니다. 오창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 놓으세요. 저 아직 어립니다. 파트가 다르긴 하지만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는 간단하게 끝낼 때였다.

다들 환자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비장과 콩팥이 손상됐다. 환자를 보낸 병원과 받은 병원의 적절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바이탈은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더 이상 여유는 없었다.

지금 바로 수술을 들어가야 한다. 단 1분이라도 지연되기 시작하면 최적의 시간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가 직접 마취과에 전화했고, 곧바로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긴장감이 치솟았다.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감한 상황에 부딪쳤다. 때 아니게 써전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교수 3명, 군의관 1명, 전공의 2명까지 무려 6명이었다.

신현수가 숨도 쉬지 않고 교통정리를 했다.

“지훈아, 퍼스트 서 줘. 오창도 선생님, 세컨 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우야, 미안하지만 상황 알지? 써드 서자. 일석아, 참관만 해. 하석이 너는 일 있으면 나가서 일 봐.”

빠르게 자신들의 자리에 섰다.

일이 잔뜩 밀린 오하석이 내심 안도하면서도 아쉬운 기색으로 수술실을 나갔다. 뒷모습을 좇던 손일석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현수 저 자식은 동네방네 전화를 다 한 모양이네. 오창도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최소한 세컨은 섰을 찬스였는데 아쉽다. 에휴! 주말인데 그냥 푹 쉬시지 왜 나왔을까? 허구한 날 수술하면서 이유가 뭐야?’

어느새 마취가 끝났다.

잡소리,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세요.”

“메스!”

최대한 빠르게 배를 열었다.

띠띠띠띠띠띠띠!

순간적으로 복압이 감소하며 혈압까지 떨어졌다.

수술 팀의 손길이 빨라졌다.

비장이 깨져 있었다. 그 뒤에 위치한 후복막이 검붉게 변한 채 불룩했다. 콩팥 손상의 전형적인 소견이었다.

콩팥은 무조건 제거하지 않는다. 상황을 봐 가며 제거해야 할지, 남겨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굳이 의견을 나눌 이유가 없었고, 일부가 깨진 비장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장 제거합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수술 팀이다.

따르륵! 따가각!

기구 소리가 몇 번 울리는 순간 비장이 제거됐다. 워낙 빠르게 진행된 덕에 이내 혈압이 회복되며 심박동마저 안정되기 시작했다.

안심하긴 일렀다.

따뜻한 물로 배 속을 씻어 내고, 콩팥 주변을 살폈다. 불룩 솟은 후복막 부위가 상당히 단단했다. 콩팥이 단단한 탓도 있지만 출혈이 예상외로 만만치 않다는 의미였다.

눈으로만 보고 내린 첫 소견과 확실히 달랐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지훈아, 불안하지 않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 같다.”

손상 정도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소변 양상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다.

마침 또 한 명의 써전이 참관 중이다.

“일석아, 소변 어때? 지켜볼 수 있겠어?”

“완전히 혈뇨야. CT에서 보이지 않는 손상까지 동반된 것 같아. 소변만으로는 제거하는 게 좋겠어.”

소변 양상은 콩팥을 제거해야 할지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수술 팀 모두 다시 한 번 소변을 확인했다. 소변 줄에 걸린 소변 대부분이 피인 듯 끈적끈적하게 보일 정도였다.

“후우! 어디가 얼마나 깨진 거지?”

후복막 부위를 다시 확인했다.

꾸준하게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양이 많지도 적지도 않아 애매모호했다.

섣부른 판단을 내릴 상황이 아닌 탓에 신현수가 계속 피를 닦아 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훈아, 제거하는 것이 좋을까?”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일단 부신이 위치한 부위를 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철저히 버렸다. 소변 양상과 후복막 상태로 번갈아 보며 손상 정도를 유추했다.

‘정말 애매모호하네.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재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감염 우려까지 있지만, 원칙은 최대한 건드리지 말라는 건데 난감하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오창도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단이 다를 수 없었다.

째깍! 째깍!

시간은 흐르고, 거즈를 검붉게 적시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양이 조금도 줄지 않는다는 것 자체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질긴 후복막을 뚫고 지속적으로 나올 정도의 출혈이 분명했다.

신현수가 눈빛을 굳히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미 결정한 표정이었고, 행여 섣부른 판단일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일 것이다.

“지훈아, 지금도 남기는 것이 좋을까?”

“제거하는 것이 적절한 판단 같다.”

수술 팀 전체 의견이 반대로 바뀌었다. 지금 상태로는 유지하는 것이 더욱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결 부담을 덜은 신현수가 입술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정확한 판단은 없다.’

“마취과, 바이탈 어떻습니까?”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콩팥 제거합니다. 신경 써 주십시오. 켈리!”

본의 아니게 부신을 볼 기회를 얻었다.

절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후복막을 열고 손상된 콩팥을 제거해야 한다. 모든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지 않으면 원치 않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수술 팀의 긴장이 다시 치솟았다.

드물게 본다고 해도 원칙은 확고하다. 후복막은 최대한 적게 절개하고, 지금도 콩팥에 피를 보내고 있는 동맥부터 잡아야 한다.

“보비! 타이! 수처! 컷!”

동맥이 주행하는 부위를 덮고 있는 후복막을 열었다. 불과 1~2센티미터 열었을 뿐인데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주변 조직에도 피가 가득 스며들어 콩팥을 노출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빠르게 수처하고, 빠르게 타이하며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오창도는 능숙한 손길로 시야 확보에 주력했다.

콩팥 일부분이 보였다.

콩팥에 가해지던 압력이 확연하게 줄어들며 출혈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제 일부분만 노출됐을 뿐인데 순식간에 시야가 나빠졌다.

웬만한 손상으로는 가급적 건드리지 말라는 원칙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 석션! 거즈!”

송진우의 손까지 바쁘게 움직였다.

완전한 시야를 확보하고 동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지훈과 신현수의 눈은 오직 동맥이 위치할 부분에만 집중했다.

핏물 속에서 얼핏 하얀 구조물이 보였다. 석션을 하는 순간 벌떡벌떡 뛰는 움직임이 보였다.

신현수의 손이 그대로 동맥을 잡아 갔다. 동시에 김지훈의 손도 움직였다.

따르륵! 따가각!

굵은 동맥이 잡혔다.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 엉뚱한 혈관을 잡은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확인했다.

좌측 신장 동맥이 확실했다.

“동맥 자릅니다. 타이!”

확실하게 묶고 잘랐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어야 했다.

잠시 후, 줄줄 흘러나오던 피가 사라지고 어디선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조직 속에 스며들었던 피가 분명했다.

살짝 흔들렸던 바이탈까지 안정되기 시작했다.

“오케이! 계속 진행합시다.”

인접해 위치한 신장 정맥과 뇨관까지 처리했다.

이제 들어내면 된다.

투명하고 질긴 막에 싸여 있고, 주변 조직과도 거의 붙어 있지 않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었다.

이대로 콩팥을 통째로 제거하면 부신까지 함께 제거된다.

신현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부신을 살릴 수 있을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