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09화 (909/1,329)

1화. 무지개를 보려면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Ⅱ (2)

고민하는 사이, 꽤 시간이 지났나 보다. 강병옥이 새로운 차트 하나를 내밀었다.

“선생님, 궤양 천공 환자 한 명 있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참인데 잘됐다.

이럴 땐 오직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았다.

“오늘 당직이 누구누구지?”

“저하고 차상수, 오하석입니다.”

“그래? 상수는 수술 많이 하고 있어?”

“당직 운이 좋은지, 저 2년 차 때보다 많이 합니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겠지. 하석이 준비시켜.”

간만에 다시 소리와 함께 오하석 손을 보았다.

전임과 선배들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서 상당히 침착하고 꼼꼼하게 진행했다. 어려운 부분에 부딪치면 뻘뻘 땀을 흘리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중간중간 한마디 던질 때마다 주눅 들지 않고 더욱 집중하는 모습은 대견하기만 했다.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각오가 보였다.

수술에 임하는 자세는 흡족했다.

그러나 오하석도 이제 1년 차 말이다.

거의 9개월가량 수련을 받았다.

2년 차에게도 메이저나 다를 바 없는 수술이라지만 기술적인 면을 간과할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김지훈의 눈은 매의 눈이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동안 열심히 해 왔다는 사실, 1년 차치고는 상당히 잘한다는 사실까지만 십분 인정했다. 오하석을 위해서라도 수시로 보이는 부족한 면들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선 이상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제아무리 잘난 전공의도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다. 심지어 오창도까지 발을 들인 곳이다.

직접 손에 피 묻힐 필요는 없었다.

“강병옥, 차상수, 요새 1년 차한테도 신경 안 써? 심각하네. 똑바로 하자.”

이 정도 말이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휴게실 문이 닫히고 열렸다.

강병옥이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찌 된 일인지 신현수 닮아 제법 냉정했던 차상수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이 자식들이 뭐 하고 나온 거야? 얼굴이 왜 반대지?’

의문도 잠시, 오하석을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송진우만큼 벌게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바짝 고개 숙인 눈길의 끝에 차상수가 걸려 있었다. 원망이나 불만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결코 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상수가 엄청 무서운가 보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 모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오늘의 고생이 내일의 행복이 될 것이다.

오하석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밤이 늦었다. 시간은 이미 일요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급실은 아직도 부산했다.

쿠싱 증후군 환자, 42세, 정은영.

아직도 입원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보름달처럼 부은 얼굴.

거칠고 힘겹게 내뱉는 숨.

띠띠띠띠띠띠!

가슴을 벌렁벌렁 뛰게 하는 급박한 심전도 소리.

차라리 어디가 뚜렷하게 아프면 격한 호소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이 가위 눌린 것처럼 괴롭고 힘들어 어찌할 바 모르는 모습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저 상태면 오히려 쇼크 상태에 빠진 환자 수술이 쉬울 것 같다. 최선의 방법이 뭐지? 최선…….’

집으로 가려던 김지훈의 눈빛이 돌연 번뜩였다.

후다닥 연구실로 올라가 생각을 정리했다.

수술 방법은 네 가지나 됐다.

첫째, 배를 열고 접근하는 고식적 방법.

둘째, 옆구리를 열고 접근하는 고식적 방법.

셋째, 복강경으로 배 속에서 접근하는 방법.

넷째, 옆구리를 통해 복강경으로 수술하는 방법.

부신은 차치하고 함께 노출시켜야 하는 콩팥까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장기였다.

의외로 선택지가 많았지만 무엇이든 원칙과 기본을 따라야 안전하다.

더구나 마지막 방법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일단 해부학 책부터 펼쳤다.

주변 구조물들을 정확하게 파악해 가며 각각의 방법을 일일이 정리해 보았다.

머리가 띵해 수시로 찬물에 세수를 해야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일도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 치고 방식만이라도 정리해 보자.’

조금씩 정리가 됐다.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방식은 당연히 배 속으로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널리 시행된 방법이기도 했다.

비장과 위 사이의 연결 조직을 절개하고, 후복막을 연 후 콩팥 상부를 고스란히 노출시켜야 한다.

개복이기에 혈관을 비롯해 수많은 위험 구조물을 다른 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다.

관건은 수술 중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광범위한 손상이다.

정상적인 체격, 체력을 가진 사람이거나 장기 일부분에 국한된 질환이라면 별문제 안 된다.

하지만 호르몬 교란이 유발된 쿠싱 증후군은 다발성 질환이나 다름없었다.

익숙함에 의지한 의사에겐 유리하나 유리병 같은 환자는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옆구리를 통한 접근은 어떨까?

최근에 와 많이 시도되는 방식이었다.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두꺼운 지방과 누구나 갖고 있는 두툼한 근육뿐이다.

등 쪽에 위치한 후복막만 주의해 열면 보다 쉽게 부신에 접근할 수 있다. 단, 호르몬 이상에 의한 고도비만이 개복과 똑같이 상당한 난관이 될 것이다.

‘개복보다 안전하지만 비만을 고려하면 한 뼘을 넘게 열어도 시야가 제대로 안 나올 가능성이 있다. 크게 열수록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어. 후우! 잊을 만하면 절개 크기마저 문제가 되는 환자가 오네.’

두 방법 모두 쉽게 적용할 수 없었다.

부족한 경험과 환자의 특수성이 맞물려 선택 폭이 너무 좁았다.

만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옆구리를 열고 접근하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다.

‘손상이 적은 방식은 결국 라파로뿐인데 할 수 있을까? 후복막을 박리하다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 감당할 수 있을까?’

복강경 수술에 초점을 맞췄다.

해부학적 구조와 기구 운용까지 고려하면 결코 쉬운 방법이 아니었다.

복부로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옆구리로 접근하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신 제거는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갑갑했다.

그 탓인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뻑뻑해진 눈으로 입맛을 다시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 부신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캡슐(Capsule)? 캡슐?’

번뜩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최초로 시도한 수술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술할 때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여기저기 전화해 상의하고 싶었지만 밤이 너무 늦었다. 눈 부릅뜨고 집으로 가는 내내 고민을 거듭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 싶은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쩝쩝!

주말 당직이고, 아직 새벽 어스름도 가시지 않았다. 두세 시간이라도 잔 것에 만족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눈발 날리는 새벽 찬바람이 상당히 매서웠다.

살짝 쌓인 눈을 보는 순간 무척 불안했다.

예감 적중이다.

눈발 자체가 각종 사고를 불러일으킬 요인이었다.

결국 점심 무렵에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그놈의 일복은 언제 사라지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깜빡 졸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이대로 쭉 자면 안 된다.

정은영 환자는 물론 수술 팀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없었다.

일단 지난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의 실현 가능성 여부부터 확인해야 했다. 기구에 관한 정보는 역시 기구상이 가장 빠른 법이었다.

“강호승 사장님, 김지훈입니다.”

(어이쿠! 일요일에 웬일이십니까?)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뭐 하나 여쭤보려고요. 혹시 부신이라는 장기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부신이요? 그게 뭐죠?)

들어 본 적도 없다니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못 들어 보셨어요? 아드레날 그랜드라고…….”

(아! 아드레날 그랜드가 부신이군요?)

Adrenal Gland는 알아듣고, 한글 명칭인 부신은 모르다니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사실 의사들도 일부 용어를 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한글로 된 의학 용어를 배우지도 않았고, 사용하는 빈도마저 낮아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그럼 어디 붙었는지도 아시겠네요?”

(거기까지는 제가 딱히……. 그런데 전화는 왜?)

“필요한 기구가 있어서요. 혹시 부신, 아드레날 그랜드 제거에 복강경 기구를 이용한 사례가 있습니까? 복부나 옆구리 어느 쪽으로든 접근했다는 소리를 들으신 적은 없나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본다는 말을 했지만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다른 병원도 아니고, 복강경 수술을 선도하는 병원에서 문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몇 개나 가진 김지훈의 물음이었다.

원하는 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복강경 기구는 모두 가늘고, 충분하게 길다. 이왕 생각난 방법인데 고민 더 한다고 손해 볼 이유도 없었다.

전화를 끊은 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복강경은 어떤 식으로 하든 최초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행해야 할 수술이었다.

‘손과 기구의 차이가 결코 작지 않은 수술이지만, 안 그랬던 수술도 없었다.’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부신을 향해 접근해 봤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처럼 서서히 구체적인 방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고의 수술 팀을 꾸릴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대로 전화기를 들었다.

“오창도 선생님!”

(일요일인데 왜 전화하셨습니까?)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깜짝 놀라는 목소리에 이제야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설명하려다 보니 너무 성급하게 전화했다는 후회만 감돌았다.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허당기가 나타나며 말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환자 때문이 아니고… 아니다. 환자 때문은 맞는데, 그게 그러니까…….”

(무슨 환잔데 이렇게 급하세요. 숨 돌리시고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호흡 조절하고, 머릿속 정리해 가며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직한 숨소리만 들렸다. 당황스러운지 헛기침마저 해 댔다.

“불가능할까요?”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한 건 아니시죠?)

“아! 그렇죠. 일단 라파로로 시도할 수 있는지부터 판단해 주세요. 가능하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까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일과 끝나고 진지하게 토론하죠. 편히 쉬시는데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혹시 하는 마음에 강호승에게 받았던 복강경 기구 카탈로그를 뒤졌다.

떠오른 생각에 부합하는 기구, 최소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기구가 있는지 샅샅이 확인했다.

난감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직 혼자만의 고민이자 생각이었다. 다 같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방법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 믿었다.

이준영 교수, 신현수, 이경석, 오창도.

필요하다면 H 병원에도 연락할 의사가 있었다.

당직이 아니었다면 몸이 달아 터질 뻔했다.

약간의 시간을 얻어도 일단 잠은 자야 했다.

대신 눈을 뜨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에는 번뜩번뜩 스치는 생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거기까지였다.

주말 당직을 섰는데 온전할 리 없었다.

아! 너무 바쁘다.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내내 집중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거나 신일 것이다.

정신력의 한계는 곧 극심한 피로였다.

그래도 앞으로 5주간 주말 당직은 없다.

카르페 디엠!

“선생님, 이번 주에는 평일 당직도 없으신 거죠?”

“그럼. 다음 주 월요일이지. 하하하!”

김지훈과 무지막지한 당직을 서고 나면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보람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마약과도 같은 집도 후의 흥분과 떨림.

그 치명적인 유혹을 가장 많이 충족시켜 주는 써전이 바로 김지훈이었다.

강병옥이 좋다고 웃는 김지훈을 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오창도 선생님 당직이 언제지?’

최고 연차다.

1년 차 말인 오하석, 은연중 2년 차를 주도하고 있는 차상수의 눈빛을 감당하고, 배려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마치 새롭게 눈을 뜨는 것처럼 갈수록 수술이 재밌어지며, 열정까지 들끓어 올랐다.

‘진우한테 미안하지만, 오창도 선생님 당직도 내 당직 때 걸렸으면 좋겠다.’

의국으로 올라가자마자 당직 표부터 찾았다.

송진우가 이미 진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얼굴은 당연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 자식 표정이 너무 진지한 걸 보니까 박승준 선생님 당직에 걸렸나? 그럼!’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행복이다!

기대에 차 당직 표를 본 강병옥이 눈을 쫙 찢으며 송진우를 노려보았다.

오창도 당직 날 함께 당직을 서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심각할까?

‘설마 정식 근무 시작했다고 배신하시진 않겠지?’

“어? 형, 언제 들어왔어요? 어휴! 얼굴이 말이 아니네.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해 놓을 테니까, 한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그렇다. 송진우의 속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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