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무지개를 보려면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Ⅱ (1)
여느 때처럼 커피 타임을 가졌다.
이혁민 교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도 들지 못했다. 죽을 맛인데 왜 이렇게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명 신현수와 이경석도 웃고 있었다.
낌새가 영 이상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이혁민 교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끌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김지훈, 니 벌써 정신줄 놓으면 안 된다. 내 이번에는 봐준다만 정신 단디 차려라.”
‘봐주신다고? 뭘 봐주신다는 거지?’
신현수가 씨익 웃었다.
“공고 낸 지 2주 넘었어. 이혁민 선생님이 나하고 상의 안 하셨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고맙다고 해.”
우어억! 이 자식이!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가슴부터 쓸어내려야 했다. 아니, 다시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고를 내도 안 오면 어떻게 하지?’
“얼굴 펴. 경수하고 성민이가 지원 의사를 밝혔어. 변동이 없는 한 올해 안에 얼굴 볼 수 있을 거야.”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경석까지 한통속?
또 한 번 회심의 미소를 보아야 했다.
눈이 홱 돌아갔지만 이런 판국에 놀렸다고 목소리 높이면 재수 옴 붙는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김경수와 오성민이 온다면 손일석까지 동기 중 무려 5명이 함께 근무하게 된다.
가히 최강의 기수가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전화위복인가?’
슬그머니 모른 척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자꾸 눈에 걸렸다.
뜻밖의 난처함과 전혀 관련 없는 오창도의 얼굴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주말 집담회 직전까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제 코가 석 자라지만 이제 임용 3주밖에 안 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파트 의사라면 응당 가급적 많은 것을 공유해야 한다.
커피 타임이 끝난 후 바로 물어봐야 했다.
“오창도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반응은 곧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이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일이 있거나, 안 좋은 말이라도 들으신 거 있습니까? 얼굴이 너무 안 좋으세요.”
오창도가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지난밤 당직으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주말 당직까지 겹쳐 지금은 무조건 쉬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걱정 가득한 눈으로 묻고 있었다.
‘후우! 김지훈 선생님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이런 일까지 말해야 하나?’
확실한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날 김지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는 오창도 자신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을 것이다.
아니다. 티를 안 내려 애썼으니 김지훈의 마음 씀씀이 때문일 것이다.
단지 같은 의사이자 환자를 먼저 생각한다는 점 하나로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김지훈 선생님, 한 교수 기억하십니까?”
“한성희 선생님이요? 당연히 기억하죠.”
경쟁 병원 써전이라는 사실을 넘어 퍼스트 자리를 망설임 없이 양보한 의사다. 게다가 오창도와 무척 친해 보여 매우 또렷한 인상까지 받았다.
“한 교수가 H 병원 분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분원이란 말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선생님이 예전에 그만두신 그 병원은 아니죠? 수술도 거의 없고, 라파로는 하지도 못하는 병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불행히도 그 병원 맞습니다. 라파로 센터 의사에겐 그만두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진충기와 함께 수술 팀을 이뤘던 써전이다. 웬만한 실력 아니고는 팀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진충기도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로요?”
오창도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구체적인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참관한 수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간에 손을 바꿨다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충기의 요구였고, 수술도 잘 끝났는데 무슨 소린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참관 후 상당히 어두웠던 최인호 교수의 얼굴이 생각났다. 하지만 변하기 전 진충기의 인상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 겉으로만 변한 건가?’
“설마 진충기 선생님이?”
“아닙니다. 도리어 진충기 선생님에게 먼저 연락받았습니다. 한 교수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다른 마음 갖지 못하도록 꽉 잡아 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후우! 다행이다.’
“그럼 최인호 선생님인가요?”
오창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진충기 선생님이 아무리 전권을 받았다고 해도 인사 문제를 이런 식으로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한 교수도 오해 말라고 하더군요.”
김지훈이 눈살만 찌푸렸다. 마치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다른 병원 수술에 전후 사정 고려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끼어들었는지도 몰랐다. 정중하게 거절했다면 한성희 역시 훌륭하게 퍼스트를 섰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젠 제가 근무하는 병원이 아닌 이상 기다려야죠. 사실 진충기 선생님이 어떻게든 복귀시키겠다고 했지만 불안합니다. 최인호 교수님 눈 밖에 나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요.”
오창도도 더 이상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단지 얼굴만 알 뿐인데 다른 병원 일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일도 안 돼 인사 발령을 할 정도라면 대단한 파워를 갖고 있다는 말이잖아. 평소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는지 모르지만 진충기 선생님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신현수와 이경석이 들어왔다. 무거운 공기에 이유를 재촉했고, 오창도가 상황을 설명했다. 한두 명 더 안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난 얼굴도 잘 모르는 선생님 일이지만 답답하네. 그런 식으로 인사 발령을 냈는데 센터 의사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겁니까? 다들 동료잖아요.”
“이경석 선생,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우리 교수님 같은 분들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신현수가 냉정하게 말했다.
“확실한 건 다른 병원 내부 일이고, 분명 부당해 보이지만 의료계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당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말이죠. 선생님 말씀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맞는 말이다.
신경 안 쓰려 해도 중간에 손을 바꾼 일과 최인호 교수의 못마땅해 보였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문득 대리 수술이 생각났다.
최인호 교수의 인사는 공정한가?
한성희에게 과연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그보다 관여할 자격은 있나?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 핑계로 확 터트려?’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로 대리 수술 문제를 공론화했다간 도리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H 병원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공론화가 쉬운 일도 아니었다.
어설픈 정의감을 빙자한 오지랖일지도 몰랐다.
결국 별다른 결론 없이 대화를 끝내야 했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곧 잊은 것 같았지만 김지훈은 그럴 수 없었다. 퇴근하는 오창도의 뒷모습이 상당히 쓸쓸해 보여 더욱 답답해졌다.
‘정말 내가 대신 들어갔기 때문일까? 아무리 속이 좁고, 스승님을 견제한다고 해도 제 살 깎아 먹는 행동인데 그럴 리 없겠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해.’
한 주 내내 이어졌던 즐거움이 단 한 가지 일로 싹 달아났다.
그렇지만 엄연히 다른 병원, 다른 의사에게 벌어진 불명확한 일이다.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었다.
고경아와 함께 희연이를 보며 서서히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이내 아수라장으로 변한 응급실에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심각한 환자 한 명을 마주했다.
수술 하나 끝내고 잠깐 응급실에 들렀을 때, 내과 당직 교수가 얼굴을 보였다. 지금도 명색에 불과했지만 외상 센터로 분리돼 운영한 이후 내과 계열 의사는 보기 힘들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 선생! 마침 당직이었네.”
얼굴 보자마자 이름부터 불렀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환자 한 명 봐줘.”
내과 증상으로 내원했어도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제법 있다. 대개는 아뻬나 게실, 혹은 복막염 환자들이다. 그래서 더 의아한 일이었다.
“전공의도 있는데 왜 직접 오셨습니까? 혹시 환자가 아는 분이세요?”
“너무 잘 알지. 외래에서 관리하던 환잔데 급격하게 증상이 심해졌어. 쿠싱이야.”
“쿠싱이요?”
쿠싱 증후군 (Cushing's Syndrome).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일반외과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콩팥 위에 부신이라 불리는 작은 장기가 있다. 이곳에 부신 선종이나 부신암이 생기면 다양한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된다.
그중에서 스테로이드의 일종인 코르티솔(Cortisol)이나 혈압을 상승시키는 알도스테론(Aldosterone)이 분비돼 여러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지칭하는 질환이다.
‘쿠싱으로 수술이 필요한 환자라고? 드문 정도가 아닌데,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일단 환자부터 확인했다.
스테로이드의 영향이 한눈에 보였다.
특징적인 보름달 얼굴(Moon Face)에 목과 복부 비만이 상당히 심했다. 부종과 지방 축적 때문이었다.
육체적 쇠약도 전형적인 증상으로 환자 역시 축 늘어져 있었다. 피부 또한 무척 약해져 여기저기 멍이 관찰됐다.
혈액 질환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띠띠띠띠띠!
고혈압이 거의 악성에 가까울 정도로 발생한 상태였다. 심한 비만과 쇠약이 겹쳐 심장에 상당한 무리를 주는지 숨까지 헐떡였다.
“상황이 심각하네요.”
“잘못될까 봐 겁이 다 날 지경이야.”
환자 상태를 꼼꼼하게 담고, 복부 CT를 확인했다.
김지훈은 물론 강병옥까지 눈가를 찡그리고 말았다.
좌측 콩팥 위에 지름 6센티미터에 달하는 종양이 보였다. 크기도 크기지만 정상이라면 부신은 거의 관찰할 수 없어 단번에 이상 소견이 들어왔다.
부신 선종(Adrenal Adenoma)이다.
심각한 쿠싱 증후군을 감안할 때 수술이 불가피했다. 목숨을 위협하는 증상 때문에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종양을 제거해야 안전할 상황이었다. 예후가 극히 나쁜 부신의 암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급적 빨리 제거해야겠는데요.”
“안 그래도 부탁할 생각이었어. 일단 우리 과에 입원시켜서 증상을 완화시킬 생각이지만, 약에 반응을 잘 안 해서 걱정이야. 다음 주 언제쯤 가능할까? 최대한 빨리 잡아 줬으면 좋겠어.”
다음 주에 바로 수술해 달라니 답답한 일이었다.
다른 수술 스케줄도 있고, 수술실이 말 한마디에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상당히 주의 깊은 수술 준비가 필요한 환자였다.
다행히 그런 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교수였다.
“곤란한 건 아는데, 쿠싱도 사람 잡을 수 있어. 알잖아?”
‘다음 주 스케줄이 어떻게 되더라. 중간에 끼어들어 갈 틈이 있나?’
결코 만만치 않은 수술이었다.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하는 환자 상태를 감안할 때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 했다.
안타깝지만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당장 확답은 불가능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잡아 보겠습니다. 단, 혈압 조절부터 호르몬 수치 조정까지 수술 전 준비를 철저히 해 주셔야 합니다. 수술 전에 바이탈이 흔들리면 수술 중 큰 문제가 발생할 환자입니다.”
“오케이! 날짜만 빨리 잡아 줘. 그 전에 어떻게든 수술 가능한 상태로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일단 내과에 입원하기로 결정됐다.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차트와 검사 결과를 찬찬히 확인하던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이만저만 위험한 환자가 아니었다.
수술 중 가장 두려워하는 출혈은 눈으로나마 보인다. 반면 호르몬 변동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소한 변동만으로도 급작스러운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저하된 면역과 고도비만도 문제였다.
과도한 스테로이드 분비는 면역을 크게 약화시킨다. 수술 부위가 크면 클수록 감염 우려가 커지는데, 환자의 복부 비만은 심각한 정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한마디로 악조건이었다.
즉, 수술은 성공해도 수술 후 치명적인 상황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외과의로서 환자에게 가장 안전한 수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병옥아, 얼마나 열어야 할까?”
“비만이 너무 심해서 어떤 방식을 택해도 꽤 크게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콩팥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배를 연 후 비장에 면한 후복막을 절개해 접근하거나, 옆구리 쪽에서 두툼한 지방, 근육 및 상대적으로 위험 구조물이 적은 후복막을 절개하고 노출시킬 수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이 환자의 경우 상당히 크게 열 수밖에 없어 두 방법 모두 만만치 않았다.
고민스러웠다.
‘정말 만만치 않은 수술이다. 절개 창이 큰 만큼 출혈도 많을 테고, 수술 후 감염은 더 문제야. 마취 중이라도 스트레스가 심하게 가해지면 호르몬 분비도 급증할 텐데, 그건 또 어떻게 대처하지?’
사소한 감기도 환자 상황에 따라 기관지염, 폐렴으로 발전해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지금은 내과 질환에 외과 질환까지 겹쳐진 상태였다.
응급이라도 부담스러울 판이었다.
환자와 보호자 대부분 당연히 문제없을 것이라 여기는 정규 수술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무작정 칼을 대 부신 선종을 제거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어떻게 해야 가장 안전할까? 라파로로? 이런 경우는 해 본 적도 없는 데다 비장과 위를 제치고 후복막까지 열어야 하는데 너무 위험해.’
고식적 방법은 환자에게 위험하고, 복강경 수술은 전무한 경험과 더불어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환자의 안전을 담보하고 집도의로서 자신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