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무지개를 보려면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Ⅰ (2)
으허헉! 공포의 쇼핑이다.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에서 고경아가 쓸 화장품과 새 옷, 집에 필요한 물품에 아기 용품까지 한가득 샀다. 사야 할 물건이 많아 유모차는 끌고 다니지도 못했다.
“지훈 씨, 왜 이렇게 붓기가 안 빠지죠? 맞는 옷이 없어요. 예전으로 돌아가면 지금 사는 옷은 다 클 텐데 어떻게 하지?”
붓기? 이젠 엄마 살이다.
따지고 보면 김지훈, 자신 때문에 붙은 살이니 절대 입 밖으로 낼 말이 아니었다. 옷 고르는 내내 희연이 안고 기다리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화장품은 매번 같은 상품을 사면서 온 동네 화장품 가게는 왜 다 들르는 걸까?
분유 먹이고, 달래 가며 희연이가 버티는 그 순간까지 쇼핑은 멈추지 않았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히터를 왜 이렇게 빵빵하게 트는지 모를 일이었다. 희연이는 또 왜 이렇게 뜨거운지 땀으로 흠뻑 젖고 나서야 밤샘 수술보다 더 힘든 쇼핑이 끝났다.
부르릉! 털털털털!
오래된 차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몰아 줘야 하는데,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으니 소리가 좋을 리 없었다. 아니면 트렁크에 실린 짐이 너무 무거운지도.
카시트에 앉힌 희연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생아를 위한 시트라고 해도 엄마 품만 못할 테고, 속설일 수 있지만 멀미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안쓰러웠다.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차 탈 때마다 저렇게 울면 목소리까지 쉬는 거 아냐? 멀미약을 먹일 수도 없고 큰일이네.’
“희연아, 조금만 참아. 집에 다 왔어. 카시트가 너무 커서 안 맞나? 지훈 씨, 차 안이 너무 더운 것 같지 않아요?”
애가 타는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반짝였다.
자동차는 남자의 로망이다. 손일석이 똥차라며 넘겨준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회진 중에는 TV에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단 하나만은 예외였다.
자동차 광고다.
이미 특정 메이커에 마음이 동한 상태였다.
아니, 그보다 신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희연이가 준 절호의 기회다!’
“경아 씨, 다른 애도 카시트에 앉히고, 온도도 적당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울죠?”
“차가 시끄럽잖아요. 어어? 이거 덜덜 떨기까지 하네. 이러니 우리 희연이가 얼마나 불편할까? 차가 널찍하고 조용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죠?”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적금이다 생활비다 뭐다 계산하며 주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시치미 뚝 뗀 채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던 김지훈의 입이 찢어졌다.
“시끄럽긴 시끄럽네요. 지훈 씨, 희연이 때문이라도 차를 바꾸는 게 좋겠죠?”
좋다고 덥석 물면 로망 바로 깨진다.
고민하는 척하자 고경아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왔다. 딸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성일지도 몰랐다.
적절한 때를 기다려 밑밥 회수했다.
“요즘 차가 점점 좋아져서 어느 차나 다 똑같긴 한데, 누비라 투(Two)가 나온 것 같아요. 세상을 누비라는 소린지 몰라도 괜찮은 것 같던데, 다음 주에 보러 갈까요?”
잠깐 멈칫하는 순간 희연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우리 딸 최고다!’
“그래야겠어요.”
우워워워워! 단박에 결정 났다.
새 차라면 누비라가 아니어도 좋다. 흔히 그렇듯 옵션을 넣다 보면 한 체급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다. 돈이 얼마가 들건 걱정은 고경아 몫이다.
아내가 사면 남편은 몰기만 하면 된다.
쇼핑의 피곤함이 싹 사라졌다. 희연이 울음이 이렇듯 즐겁게 들릴지 몰랐다.
너무 좋아하면 탈 난다.
결국 한 소리 들었다.
“방송을 봐야지, 왜 그렇게 채널을 돌려요? 정신 사나워 죽겠네.”
광고를 봐야 무슨 차가 나왔는지 알지?
반짝반짝 빛나는 새 차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뛴다.
목소리 뾰족해도 룰루랄라!
희연이가 울어도 카르페 디엠!
***
월요일 일과가 시작됐다.
“지훈아, 교수야, 거기 가서도 수술했니? 일복이 점점 넘치는구나. 점점. 좋다, 좋아. 근데 혹시 수술도 성공했는데 수당은 안 받았니? 공짜로 해 주면 안 된다. 공짜로. 최 교수 머리 벗겨지겠다.”
일복이라는 말에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데 이제는 팍팍 줄어도 좋은 것이 일복이었다. 하긴 남들 다 쉬는 휴가 때 마음 편히 쉬는 것만도 행복이긴 했다.
“진충기는 수술 잘하니? 직접 보니까 어때? 사람이 변하면 손도 변하기 마련이다. 자세가 달라지잖아. 자세가.”
“소문대로 대단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배운 게 있으면 손해는 아니구나. 손해는 아니야. 다음에 기회 되면 H 병원 써전들 다 불러서 수술 하나 시키고 밥 사 주자. 밥. 그게 예의다. 예의.”
농담 속에 참 많은 의미를 담는 송재덕 교수였다.
흘려듣지 말고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말이었다.
오전 수술과 진료가 시작되기 전에 동기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진충기의 실력만이 아니라 행동에 더욱 놀랐다. 여러 생각이 드는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변하면 손도 변한다! 나도 변해야겠다.”
“형은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해요.”
“그런가? 근데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아까부터 입이 찢어져 있어? 좋은 일이면 나눠야 맛이다.”
“그럴 일이 있습니다. 험험! 알면 다칩니다.”
하루 종일 수술실에서 살았고, 밤늦도록 혈관 수술이 이어졌지만 김지훈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규 수술이야 예약이 필요하지만 당장 화요일 진료부터 오창도가 가세한다. 단 몇 명을 볼지라도 그로 인해 얻는 시간과 여유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당직 스케줄은 마음마저 풍요롭게 했다.
평일은 6일마다 한 번, 주말 당직은 6주마다 한 번만 서면 된다. 업무량이 어마어마하게 주는 것은 물론 생활의 풍요로움은 말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로망이 가슴을 꽉 메웠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혈관 수술 때문에 늦은 회진을 같이 돌던 오창도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김지훈 선생님, 좋은 일 있으세요?”
“많죠. 맨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송진우와 오하석이 흠칫 놀랐다.
오늘도 여지없이 10시가 넘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매일 이런 생활이 반복되기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가혹한 당직을 견딜 수 있는 이유도 다음 날 찾아오는 오프의 달콤함 때문이다.
하다 하다 이제 모든 것을 초월해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일까?
확실히 이상해졌다.
최근 들어 일과가 끝나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던 김지훈이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가에 더욱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이다.
교수가 쓸데없이 미적대면 할 일 많은 전공의의 수면 시간만 줄게 된다. 어정쩡한 얼굴로 퇴근하기를 기다리던 송진우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10시 넘었습니다.”
“응? 벌써? 가야지. 가자. 오창도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정식 진료 축하드립니다.”
후다닥 사라지는 김지훈의 얼굴이 큰 수술을 앞둔 것처럼 상당히 심각해졌다.
‘이왕이면 그랜저나 SM520이 낫지 않을까?’
아직 사지도 않은 차 운전 중이다.
정이란 것이 사람에게만 붙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골목길에 아슬아슬 주차된 애마를 보는 순간 서글퍼졌다.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에 주말에 꼭 세차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깨끗하게 보내야지.’
오늘은 웬일인지 희연이 잠투정조차 볼 수 없었다.
품에 안고 분유 먹이며 끄덕끄덕 졸다 고요함 속에 내처 쓰러져 잤다.
화요일, 당장 기대한 효과가 나타났다.
오창도 앞으로 신환이 배정되면서 보다 여유롭고 자세하게 환자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정신적, 체력적 부담을 덜은 덕에 이혁민 교수 수술마저 순조롭게 끝냈다.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일찍 퇴근했다.
저녁 8시 30분에.
11월 매운 찬바람도 스치는 바람에 불과했다.
집에 도착하자 고경아가 유난히 즐거워했다. 버둥버둥 혼자 잘 노는 희연이를 보며 모처럼 오붓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설거지 내내 희연이랑 놀 생각에 몸이 달았다. 서둘러 물 묻은 손 닦으며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제 10시도 안 됐다는 사실이 이토록 낯설 줄은 몰랐다.
히죽히죽 웃음만 나왔다.
‘이 상황에서 펠로우만 들어오면 천국이다.’
정말 꽃길을 걸을 모양이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편한 법이다.
수요일 오후 늦게 정규 수술이 모두 끝났지만 힘이 넘쳐흘렀다. 강병옥 손에 들린 컨설트 용지도 반갑기만 했다.
곧 신기동 교수가 돌아올 시간도 됐고, 손일석이 들어오면 혈관과도 이별이기에 더욱 집중했다.
강병옥이 오창도와 상대도 되지 않는 눈치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간만에 손잡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부담스럽지 않았다.
“병옥아, 너 조금 있으면 4년 차다. 똑바로 하자.”
표정 관리 참 힘들었다.
병원을 나서는 길.
“오창도 선생님, 수술 잡으셨다면서요?”
“금요일에 한 건 잡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시작했을 뿐입니다.”
“아! 말씀 좀 놓으세요. 경석이 형한테도 편하게 대하시면서 왜 저한테만 이러세요?”
오창도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글쎄요, 내가 왜 이럴까요? 이상하게 어렵네요. 선생님을 보면 왜 이준영 선생님까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리틀 이준영이 성장을?
별명이 무엇인지 까마득할 오창도에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김지훈 때문이 아니라 오창도의 마음이 그럴지도 몰랐다.
가장 어려울 때 발 벗고 도운 사람.
임용 전, 임용 직후 자신을 살벌하게 태운 사람.
도저히 전임이라고 볼 수 없는 실력.
이 모든 요인이 복합된 결과일지도.
목요일에 이어 금요일 오후까지 무난하게 지났다.
오창도는 자신의 첫 진료 환자의 수술을 깔끔하게 해냈다. 모두들 축하하며 더없이 신뢰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동료를 다시 한 번 격하게 환영했다.
지난 한 주가 너무 편했다.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를 지경이었다.
가벼운 기대를 품으며 당직을 맞이했다.
‘오창도 선생님이 없으니까.’
단박에 물거품이 됐다.
아무리 즐거운 일의 연속이어도 일복과 상관이 없었다. 적정선을 모르는지 혼자서나 둘이서나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송진우, 오하석과 함께 머리 깨지는 토요일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후우! 힘들다.’
졸음에 겨운 눈을 부릅뜨며 머리를 흔들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일단 당직 한 번을 서야 6주 후에 다음 당직인데 너무 매몰됐다.
9시가 넘은 시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화기를 들었다.
“경아 씨, 나 이번 주 주말 당직이네요.”
(네? 내일 차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깜빡했어요. 미안해요. 다음 주에 갑시다.”
(다음 주는 희연이 백일이에요. 가족들 다 오기로 했는데 벌써 잊었어요?)
‘우리 딸 백일이 다음 주라고? 다다음 주 아니었나? 왜 이렇게 빨리 크지.’
너무 즐거워도 정신이 없어지나?
가슴은 서늘해지고, 로망 실현은 2주 후로 미뤄야 했다.
한 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도미노처럼 이어지기도 한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슬 즐거움까지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말 집담회가 눈앞이었다.
화염방사기에 타고, 망치에 몇 대 두드려 맞고, 도마 위에서 잘 다져진 후 조용히 뻗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을 덜어 주진 못한다. 차례차례 쓰러져 가는 동기들과 한 건의 수술로 가혹한 시험대에 오른 오창도의 처절함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신현수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같이 탔는데 딱하다는 눈치까지 보였다.
무슨 일이 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훈아, 너 이혁민 선생님에게 도진이하고 호석이를 펠로우로 추천했다며?”
“응. 왜, 무슨 문제 있어?”
“지훈아!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도진이하고 호석이 우리 일 년 밑이야.”
눈만 껌벅거려야 했다.
손일석이 내년 초 제대한다. 서도진과 안호석은 당연히 그다음 해 제대다.
펠로우 지원하라며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았고, 둘 다 너무 좋아한 탓인지 기수마저 까마득하게 잊었다.
설마 김지훈이 기수를 착각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후! 내가 왜 이러지? 이혁민 선생님이 뭐라고 하셔?”
“11월이다. 웬만한 사람은 다 갈 곳 정해서 괜찮은 사람 정말 구하기 어려운 때야. 당장 공고 내라고 난리 나셨어. 이러다 내년에 일석이만 달랑 들어오면 어떻게 해?”
붕 뜨게 만들었던 일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한다.
난리 났다.
“현수야, 내가 너하고 경석이 형한테 말 안 했나?”
“하긴 언제 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만 터져 나왔다.
가끔 뭐에 홀릴 때가 있다.
김지훈은 물론 이혁민 교수도 서도진과 안호석의 제대가 언제인지 단단히 착각했다. 하필이면 오창도 임용으로 일이 급격히 많아진 탓에 의사 교환까지 제대로 안 됐다.
마음 푹 놓고 있다가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었다.
그나마 한 해가 넘어가기 전에 공고라도 낼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요구 사항을 충족하려면 내년 이후에 5명이나 더 뽑아야 하는 덕에 후배들에게 욕먹을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설마 도진이하고 호석이 그 자식들도 언제 제대하는지 헷갈린 건 아니겠지?’
일단 사태 수습이 먼저다.
이혁민 교수는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실수를 만회할 길이 없는 한 얼굴 볼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머리 쥐어짜며 펠로우를 지원할 생각이 있는 의사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지훈아, 곧 12월이다. 올 사람 없다.”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이경석의 말에 한 대 더 얻어맞았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날벼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