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06화 (906/1,329)

10화. 무지개를 보려면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Ⅰ (1)

오창도와 한성희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전적으로 신뢰하는 써전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써전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간 절제 부위가 깊어지는 순간 다가온 불안과 초조함을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한성희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무안함과 자책감마저 잊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흥분도 잠시, 오창도가 입술을 모았다.

김지훈에겐 다섯 번째 경험이고, 전과 같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불과 하루 전 시행한 수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실력이란 말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단순히 손만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었어. 같은 수술이라도 그때마다 반복해 토론하고, 준비하고, 새롭게 계획하지 않았으면 실패했을지도 몰라.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여 진정한 실력이 된 거야.’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왜 대가라고 불리는 이준영 교수까지 사전 준비에 참석하는지 이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에서 익숙하고 능숙하다고 현실에 안주하면 결국 퇴보하고 말 것이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준영 교수마저 헛기침을 했다. 제자를 보는 눈빛과 수술 팀을 보는 눈빛이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정말 잘했다. 진충기 선생, 오늘 본 모습이 바로 써전이다. 잊지 말길 바라. 한 교수, 다른 생각 할 것 없어. 한 교수도 흠잡을 데 없는 써전이야.’

속마음을 온전히 알기 어려웠지만 응원과 격려의 마음이 담겼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최인호 교수의 표정은 알 길이 없었다.

안도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차라리 개복하는 편이 나았다는 것인지, 라이벌에게 졌다는 표정인지 말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화면만 보고 있었다.

처컥! 처컥!

익숙한 기계음 속에 마무리가 끝났다.

쿨럭! 쿨럭!

기관 내 삽관을 제거하자 마취에서 풀린 환자가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몸을 비틀며 내는 신음 소리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려 주는 징후였다.

수없이 경험한 일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수술 팀의 긴장이 풀리며 익숙한 감흥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대부분 마음을 놓는 것으로 끝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훅훅! 격한 숨을 내쉬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결코 쉽지 않은 수술임을 직감했다.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수술을 양 병원 써전이 함께했다.

홀로 한 수술도 아니고, 중간에 합류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성희가 자존심까지 버렸기에 가능했다. 더구나 진충기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변신하고 있는 써전이었다.

단 한 번도 손을 맞춰 본 적이 없건만, 완벽한 호흡으로 훌륭하게 마쳤다. 최고의 조합은 아닐지 몰라도 기념비적인 수술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경험을 할 줄은 몰랐네.’

아무도 쉽게 실행할 수 없는, 그러나 써전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을 보았다.

필설할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수술 후 감동할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진충기의 얼굴은 복잡 미묘했다.

‘김지훈, 정말 대단한 써전이다.’

오늘에야 김지훈의 진면목을 피부로 느꼈다.

수련 중에야 의대에 입학했을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난다. 그만큼 경험 차이가 어마어마한데 자신의 수준을 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전이었으면 어떻게든 쓰러트리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코 쉽지 않은 간 절제를 해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가슴이 들끓었다. 투지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자극에 몸까지 떨려 왔다.

희한한 일이었다.

잠시 벅찬 가슴에 몸을 맡겼던 진충기가 최인호 교수와 한성희에게 눈길을 돌렸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해야 할 말, 들어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한 교수, 정말 고맙다. 크게 배웠다. 최인호 선생님, 단순한 경쟁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준영 선생님이 직접 참가하지 않은 이유를 헤아려 주십시오.’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모두 수고했어. 훌륭한 수술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문득 후폭풍이란 말이 생각났다.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진충기의 숨은 어두움 때문인지 H 병원 의료진 역시 마냥 기뻐하는 기색만은 아니었다. S 병원 의사 중 오창도만이 동일한 느낌을 확연하게 받고 있었다.

‘후우! 지금 이 상황이 최인호 선생님에게 성공일까? 실패일까? 실패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아. 제발 아무 일도 없길.’

환자 상태를 지켜볼 의료진만 남고 모두들 회의실로 향했다.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고, 전공의들은 최인호 교수와 대가의 존재 앞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마음인지, 같은 마음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최인호 교수가 애써 웃음을 보이며 자리를 권했다.

“허허! 다들 앉으시죠.”

서서히 수술실의 급박함이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김지훈의 수술 참여는 어색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진충기와 한성희는 묵묵히 음료수 잔에 입만 가져갔다.

이준영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수술 잘 봤습니다. 수술 팀의 능력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사실 수술 전에 CT를 보면서 우리 병원 단독으로 시도했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입니다. 진충기 선생의 결정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보통 사람은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예외적으로 말이 길었다. 수술 팀에 대한 칭찬만이 아니라 최인호 교수까지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진심이 아니면 꺼내지도 않았을 이준영 교수였다.

아직 말 끝나지 않았다. 정말 보기 힘들다는 웃음까지 머금으며 한성희 교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 교수, 오늘 중요한 걸 배웠습니다.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대가가 전하는 진심에 H 병원 의료진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어떤 사람도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기에 김지훈도 고개 숙여 같은 마음을 전했다. 때론 침묵이 더 효과적으로 마음을 전할 것이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최인호 교수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제길!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네.’

“과찬이십니다. 제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김지훈 선생의 손까지 빌려 민망할 따름입니다. 진충기 선생보다 훨씬 믿음직스럽습니다. 자! 수술 얘기는 차차 하시고, 먼 길 오셨는데 식사나 하고 가시죠.”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내가 참가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굳이 이 상황에서 더 믿음직스럽다는 말을 꼭 해야 하나?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뭔가 찜찜했다.

복강경 센터를 책임지는 위치기에 수술 팀 이상으로 입장이 애매모호할 것이라 여겼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면 화를 내고도 남을 일일지도 모르긴 했다.

약간의 어색함 속에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 후, 병원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밥 한술 뜨기도 전에 최인호 교수가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양해를 구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습니다. 진충기 선생, 잘 모셔. 이준영 교수님, 조심히 가십시오. 죄송합니다. 김지훈 선생, 얼굴 한번 봅시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사래를 치며 거듭 양해를 구했다. 정말 난감한 것 같은 모습에 김지훈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충기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어둡다. 후우! 어떻게 했어야 했지?’

애써 심난한 마음을 감췄다.

식당을 나서는 최인호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아닌 이준영 교수를 찾았고, H 병원 써전이 아닌 김지훈과 수술했다. 더구나 쫓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창도까지 있는 자리였다.

그것만으로 이미 성공한 수술이 아니었다.

“오늘 큰 교훈을 얻었어. 서로 경쟁하느라 협진조차 어려운 세상인데, 우리 선생들이 지금처럼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더 어려운 수술도 문제없이 해낼 거야. 진충기 선생, 한성희 선생, 오늘 너무 고맙다.”

이준영 교수의 말을 전해 들을까?

덕담에도 불구하고 H 병원 의사들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우리도 감사드립니다.”

김지훈과 오창도의 말에도 온전하게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특히 진충기와 한성희의 눈가가 어두웠다.

최인호 교수의 부재 때문일까?

결국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슬기로운 선택을 해 수술을 성공했다는 만족감과, 타 병원 의사인 김지훈의 힘을 빌렸다는 찜찜함이 뒤섞인 채 자리가 끝났다.

오창도가 마지막까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홀로 남아 진충기와 한성희에게 속을 털어놓았다.

“진충기 선생님, 괜찮겠습니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우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진충기가 웃었다.

“나만 변한 게 아니야. 최인호 선생님 눈에는 상황이 꼬였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했잖아? 걱정할 거 없어.”

“한 교수, 별일 없겠지?”

“한두 번 깨진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래? 아직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나 신경 쓰세요. 술 한잔하자는 약속 잊었어? 가자. 진충기 선생님, 쏘시죠.”

술 한 잔 쏴라?

예전에는 꺼내지도 못할 말이었는데, 진충기는 웃음으로 답했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에 불현듯 마음이 놓인 오창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인호 선생님과 함께 반대편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화가 나도 모두 같은 마음이면 최인호 선생님도 어쩔 수 없겠지.’

차가운 소주가 알싸하게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S 병원의 운영과 김지훈의 실력에 대해 묻던 진충기의 혀가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성희야, 창도야, 우리 모두 최고의 써전이 되자. 난 반드시 김지훈을 확 눌러 버릴 거야. 믿지?”

한성희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음번에는 절대 퍼스트 자리 안 놓습니다. 아니지. 제가 집도할 겁니다.”

“집도의? 어림도 없어. 난 그동안 손 놓고 노냐? 창도야, 김지훈이 무슨 수술 하는지 매일매일 꼬박꼬박 알려 줘야 돼. 우리 병원 잊지 마. 건배!”

완전히 술기운이 차올랐다. 눈가가 시뻘게진 오창도가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복강경 센터에 근무할 때도 이런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김지훈과의 인연 자체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진충기의 붉어진 눈가에도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김지훈이 모처럼 이준영 교수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주말인 데다 참관으로 시간까지 빼앗겼다. 아쉽지만 당연히 술자리는 아니었고, 무뚝뚝한 스승을 자발적으로 집에 모시는 중이었다.

“스승님, 최인호 선생님 눈치가 이상하던데 진충기 선생님 괜찮을까요?”

축하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걱정돼?”

“예. 은근히 신경 쓰이네요.”

“H 병원의 능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고야. 그런 저력은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불가능해. 쉽게 휘둘릴 곳이 아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깊게 따질 필요 없이 교수들과 동료, 후배들을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답답한 부분을 훌훌 털어 냈다.

‘야! 더 무섭게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네.’

진충기의 변화가 가져온 생기와 활력까지 생각하면 어느 순간 무섭게 치고 나갈 것이다. 처지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심각한 얼굴을 본 이준영 교수가 화제를 돌렸다.

‘너무 많은 짐을 넘겨서 항상 미안하다.’

“희연이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지?”

“예.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습니다.”

“오 교수가 정식 진료를 시작하면 여유가 있으니까 일찍 들어가. 나중에 다 크고 나면 후회한다.”

대화를 나누다 말고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지난 1년을 통틀어도 일상에 관한 대화는 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도 항상 자신과 가족에 대한 스승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그럼 나도.’

“스승님, 혁원이가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아시죠?”

“뭐?”

반응이 딱 한마디면 빤했다.

궁금해 죽겠지만 무뚝뚝함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뭔가 이상한 낌새에 눈치만 보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스승님과 가장 아끼는 후배이기에.

어쨌든 스승의 말씀은 금과옥조다.

당직을 바꾼 덕에 힘도 남아돌았다. 가족에게 온 힘을 다해 충성해야 할 때였다.

“지훈 씨, 참관 어땠어요?”

“좋았는데, 별일이라고 해야 되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살짝 뻥을 섞었다.

“암 위치가 나빠서 수술이 의외로 어렵겠더라고요. 조마조마하다고 느끼는 순간 딱 일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요?”

“실력이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굳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부탁을 해 대는 통에 한 번 보여 줬죠.”

고경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충기 선생님이 그렇게 많이 변하셨구나. 우리 서방님 다른 병원 가서도 고생하셨는데 오늘은 삼겹살 먹죠.”

토요일 밤, 잘 먹고 잘 잤다.

희연이와 놀 생각을 하며 눈부신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유난히 맛있었던 어제저녁과 유난히 사근사근했던 고경아가 떠오르며 절로 웃음이 났다.

“자! 오늘은 내가 점심, 저녁 모두 책임…….”

말도 채 끝나기 전에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동안 장을 못 봐서 먹을 게 하나도 없네요. 삼겹살 값은 해야죠?”

고경아가 배시시 그윽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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