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변화는 남의 몫이 아니다 (1)
참관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당연히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
‘금요일에 간 전 절제술이 있고, 토요일에는 참관을 가야 하는데 그때 당직 섰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 현수가 오늘 시간이 되나?’
신현수가 흔쾌히 당직을 바꿔 주었다.
졸고 있는 오창도에게 제법 크게 말했지만 잠에 취해 좀처럼 알아듣지 못했다.
“오창도 선생님!”
오창도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설마 그새 수술할 환자가 왔나?
“오창도 선생님, 생각해 보니까 참관 때문이라도 제 당직 날을 바꿔야겠습니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수요일밖에 없네요. 신현수 선생에게 이미 양해를 구했습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김지훈의 말이 십분 당연하지만 문제는 연이어 당직을 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주 보이는 눈도 토끼 눈이라 할 말도 없었다.
두근두근, 벌떡벌떡. 심장은 왜 뛰는 걸까?
그날 밤, 정말 물밀 듯이 환자가 왔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금요일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사태를 예견한 김지훈이 신현수와 당직을 바꾸지 않았다면 참관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밤새도록 수술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하루를 보내고, 모든 교수의 배려 속에 목요일 밤은 푹 잘 수 있었다.
물론 정규 일과 이후에 벌어지는 수술이 모두 끝날 때까지 단 한시도 쉬지 못했다.
여러모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 좌측 간 전 절제술로 금요일을 시작했다. 누적된 한 주의 피곤이 바윗덩어리처럼 느껴질 시간이 됐건만, 수술 팀 모두 고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김지훈 선생님이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오창도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집중과 선택!
아울러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철저히 쉰다면 써전에게 이만큼 만족감을 주는 병원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너무 부족할 뿐 김지훈에겐 몸에 익은 일이었다. 일과가 끝나자마자 번개처럼 사라졌고, 어느 틈엔가 희연을 안고 있었다.
우르르! 까꿍! 꺄르르르르!
며칠 사이에 희연이 웃음소리가 달라졌다.
자칫하면 어느 날 갑자기 기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날 갑자기 아빠라는 말을 듣고 놀랄 것 같았다. 어쩌면 희연이가 낯설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마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이만큼 초조하고, 무서운 일도 없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네. 오창도 선생님이 빨리 정식 진료를 시작하셔야 희연이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왜 말씀이 없으시지?’
그렇게 한 주를 또 치열하게 보내고.
대망의 토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보다 이른 커피 타임을 가졌다.
교수들 분위기가 유난히 진지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김지훈에게 물었다.
“이 주 동안 고생했다. 필요한 게 더 있겠나?”
드디어 올 것이 왔고, 감까지 딱 왔다.
오창도도 꿀꺽 침을 삼키며 김지훈을 보았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솔직하게 답할 일이었다. 사실 전임이 교수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 2주라는 기간 동안 나 몰라라 했을 교수들도 아니었다.
“제 능력 밖입니다.”
긍정적인 말조차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했다.
이혁민 교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할 사람의 의견이 남았다.
“이준영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미의 관심사다.
당사자인 오창도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똑바로 하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탓에 입술까지 바싹 말라 있었다.
뜻밖의 불똥을 맞고, 당사자와 다름없는 처지에 빠진 김지훈은 애가 탈 정도였다.
오창도가 정식으로 가세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여유를 얻을 것이다. 고경아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희연이를 매일매일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곧 전임된 지 1년이 지나기 때문에 박사 논문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스승님, 오창도 선생님 실력과 자세 아시죠? 이왕이면 저 좀 빨리 살려 주세요.’
언제나 일관된 이준영 교수였다.
눈길 한 번 주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정대로 진행하지.”
긍정인지, 부정인지 살짝 헷갈렸다.
절로 이혁민 교수의 입에 눈길이 갔다.
“오 교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 근무 시작해라. 수술 날과 진료 날은 김지훈과 똑같다. 초반에는 여유가 있을 테니까 이준영 선생님만이 아니라 내 수술에 들어와도 좋다.”
우워워워워!
2주 만에 끝났다.
길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교수들이 견지하는 원칙을 생각하면 수월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오창도를 보며 활짝 웃었다.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김지훈 선생님이 저 때문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말씀 좀 놓으세요. 같이 근무한 지 벌써 이 주, 아니 한 달이나 됐습니다.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왜 그러세요? 부담됩니다.”
오창도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수 욕심 하면 송재덕 교수다.
“오 교수, 수고했다. 시간 남으면 다른 수술 말고 내 수술 들어와. 내 수술. 대장을 잘해야지 다른 수술도 잘하는 거야. 알지? 지훈아, 교수야, 내 말이 맞지? 그치?”
기분 좋다고 맞장구치면 대장 소리 또 들을 것이다.
시치미 뚝 떼며 딴청을 부리자 송재덕 교수가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경석아, 현수야, 너희들은 저러면 안 된다. 메스도 못 잡던 코흘리개 다 키워 놨더니 혼자 큰 줄 알아. 혼자. 에이! 못된 놈. 그놈은 어디 갔니? 그놈은.”
“누구 말씀하시는 겁니까?”
“놈놈놈 말이야. 놈놈놈.”
“구미에서 근무하고 있죠.”
“그런가? 그렇구나. 다 마음에 안 들어. 이젠 지훈이 저놈까지 놈놈놈놈이다. 놈놈놈놈. 아이구! 입 아파라. 나이 드니까 입도 아프네. 입도.”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생각해 보니 좋은 일이 쭉쭉 이어졌다.
호사다마란 말이 맞는 걸까?
일복 터진 써전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안 좋은 일이라면 세상 어디에도 좋은 일 없을 것이다.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누군가 말하듯 마음은 꽃길만 걷고 싶은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
이제 참관을 위해 H 병원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주말 집담회는 참석하지 못한다.
오창도는 물론 단련이 되고도 남았을 김지훈마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새카맣게 타야 할 자리에 새로운 기대가 뭉글뭉글 차올랐다.
“오창도 선생님, 준비 다 하셨죠? 빨리 출발하죠.”
“예, 갑니다.”
서둘러 준비하는 오창도를 보며 신현수와 이경석이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 좋으시겠습니다.”
“신현수 선생, 이경석 선생, 이번 주뿐이야.”
희한한 일이었다.
지동훈 교수부터 신현수까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는데 김지훈에게만은 말을 높였다. 편하게 말하자고 매번 마음을 먹어도 입이 따라 주질 않는 모양이었다.
각설하고.
이준영 교수, 김지훈, 오창도.
S 병원 간담도 교수들이 모두 H 병원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슬쩍 이준영 교수의 눈치를 보았다.
‘최인호 선생님도 무언가 변했으니까 참관을 허락하셨겠지? 그래도 조금은 불안하네.’
오창도도 마찬가지인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 번 등 돌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인데, 날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H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걱정도 잠시, 시연을 준비할 때만큼 긴장되고 흥분된 순간이었다. 멀리 H 병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치 시험을 앞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수로 보이는 의사 한 명이 밝게 웃으며 달려왔다.
오창도와는 당연히 깊은 친분이 있을 테고, 대가와 때 이르게 이름을 알리고 있는 써전을 모르면 일반외과 의사가 아닐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지금 환자가 내려올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곧바로 올라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커피 마시며 놀러 온 자리가 아니었다.
여유가 없어 즉시 수술 방으로 향했다.
이준영 교수를 필두로 묵묵히 뒤를 따랐다.
단 하나의 수술뿐인데 몹시 부산했다. 수술 자체가 갖는 난이도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겠지만 경쟁 병원 의사들이 참관을 온 탓도 클 것이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H 병원 의료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복도에 서서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았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이준영 교수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지만 최인호 교수의 표정이 찜찜해 보였다.
‘이거 대충 맞이했다고 욕먹는 거 아냐? 수술 시간까지 알려 줬는데 빨리 와야지 말이야.’
악수를 하는 순간 얼굴이 싹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바쁘신 와중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하는데, 환자가 곧 내려올 시간이 돼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속에 섞인 팽팽한 견제와 웬만해서는 속을 파악할 수 없는 무뚝뚝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김지훈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수술이었다.
어떤 환자인지 알기 위해 힐끗 뷰박스에 걸린 사진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많은 고민 끝에 수술 방법을 결정했을 수술이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케이스네. 난 라파로로 시도할 수 있을까? 스승님은 어떤 판단을 내리실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물씬물씬 들었다.
“진충기 선생님, 종양 사이즈가 제법 커 보여서 쉽지 않은 수술이 되실 것 같네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수술 팀과 상의 많이 했습니다. 어렵겠지만 수술 팀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죠.”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 보였다. 스스로를 향한 확신만이 아니라 동료에 대한 믿음도 상당히 강하게 느껴졌다. 써전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진충기였다.
‘내가 애초부터 잘못 알고 있었나?’
문득 엉뚱한 생각까지 떠오를 지경이었다.
오창도와 한성희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와중에 상당한 긴장과 열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김지훈과 신현수 같은 사이인 모양이었다.
“한 교수, 파이팅! 가뿐하게.”
“오 교수, 옛 생각 난다. 오늘도 같이했으면 정말 마음이 놓였을 텐데 아쉬워.”
한성희가 슬며시 진충기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이 변하면 손도 변하는 모양이야. 오늘 잘 봐. 깜짝 놀라게 될 거야.”
친분 정도에 따라 제각각 대화를 나누었지만 세대, 장소, 지위, 소속을 넘어 모두가 라이벌이 분명했다. 수술 팀은 물론 참관하는 써전까지 눈빛을 번쩍였고, 팽팽한 긴장감마저 흘렀다.
환자가 수술 방으로 내려왔다.
전공의들이 달려와 환자를 수술대 위로 옮겼다.
환자는 두려움에 떨고,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의료진의 모습은 어디나 똑같았다.
마취과 교수가 이준영 교수와 최인호 교수에게 인사를 한 후 마취를 시작했다.
수술실이 침묵에 잠겼다.
진충기가 조용히 집도의 자리에 섰다.
이제야 이름을 알게 된 한성희 교수가 퍼스트였고, 전공의들이 남은 자리에 섰다. 눈빛이나 자세 하나하나에 집도의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H 병원 최고의 수술 팀이 분명했다.
진충기가 일일이 눈길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최인호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예리한 메스 날이 반짝이며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다른 병원 써전이 수술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연할 때 이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더구나 H 병원은 시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체적 수준이 높은 병원이었고, 집도의는 그중에서도 실력을 알아주는 진충기다.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확실하게 보자. 이것도 큰 경험이고, 배워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야.’
최인호 교수가 눈가를 바짝 좁혔다.
‘진충기, 끝까지 고집을 부렸으니 각오했겠지? 반드시 성공해야 돼. 이준영 앞에서 망신살 뻗치면 내 인내도 한계에 부딪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모든 건 결과가 말해 주는 법이야.’
슬그머니 김지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병원 내 잡음도 없고,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의사가 눈앞에 있는데 아깝군.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동안 S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텐데, 어떻게 해결됐는지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금경태나 하윤호 사건의 중심에 김지훈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욕심조차 내지 않았을 것이다.
“에어 팁! 트로카 준비하고.”
진충기 목소리에 다시 수술로 관심이 쏠렸다.
처컥! 처컥!
규칙적인 기계음.
“보비! 석션! 거즈!”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능숙하게 수술이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