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호사다마(好事多魔) Ⅱ (2)
그 시간, 새로운 자리가 이어졌다.
한 교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꽤 힘든 모양이야?”
“병원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한눈에도 전공의처럼 고생한 얼굴인데 영 딴판인 말이었다. 원래 아무리 힘들어도 티 내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 이상의 말을 할 오창도도 아니었다.
사실 누구든 생소한 곳에서 일하면 처음에는 몸이 무척 힘들기 마련이다. 더구나 우여곡절 끝에 임용됐으니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힘든 거야 참을 수 있는데, 모든 면에서 우리 방식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아. 라파로 하면서 혼날 줄 몰랐어.”
“누가 오 교수를 혼내? 이준영 선생님이 상당히 엄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교수로 근무 시작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걱정 많이 했는지 목소리가 꽤 높아졌다.
오창도가 피식 웃었다.
“이놈의 손이 문제지, 교수 대우는 받고도 남아. 이준영 선생님이 아니라 김지훈 선생한테 톡톡히 혼나고 있어.”
잠자코 듣고 있던 진충기가 돌연 큰 관심을 보였다.
“방식이 다르다는 말은 뭐고, 오 교수 손은 또 왜 문제야? 그럴 수가 없잖아. 자세하게 얘기해 봐.”
수술 한두 개 예를 들어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 오창도가 지난 일주일 동안의 경험을 말하자 진충기와 한 교수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업무량이었다.
‘도대체 일주일 동안 몇 건을 하는 거야?’
센터를 운영하는 자신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수술에 S 병원의 저력과 힘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과 원칙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많이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술 방식 일부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더욱 크게 놀랐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당연하게 여겼던 부분이기에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귀를 활짝 열었던 진충기의 눈이 번쩍였다. 강렬한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참관을 요청하러 온 자리가 토론 자리로 변했다.
“그렇게 하면 한결 안전하겠네. 습관이란 놈이 정말 무서워. 한 교수, 혹시 우리가 안주했던 걸까?”
진충기의 얼굴은 점점 진지해졌다.
오창도가 헛기침을 했다.
수술에 관한 부분은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진충기였다. 그간 혼자 고민해서 문제였지만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밑도 끝도 없이 시간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피로가 온몸을 누르고 있는 지금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참관이라니요? 최인호 선생님이 정말 허락하신 겁니까? 만일 실패하면…….”
진충기가 눈가를 좁혔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아. 최인호 선생님도 변하고 계셔. 오 교수와 관련도 있지만 그건 알 필요 없고, 어쨌든 대리 수술 문제까지 해결 기미가 보여.”
“이젠 대리 수술을 안 하시는 겁니까?”
“지금 준비 중이야. 센터 운영 재정비까지 겹쳐 미뤄지고 있지만 번복되는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진충기나 한 교수나 표정이 좋다고 볼 수 없었지만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찜찜한 가운데 오창도 역시 많은 면에서 변화가 지속되기를 바랐다.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오 교수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몇몇 문제가 있지만, 문제없는 병원 있나? 우리 H 병원이 최고의 병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자만에 불과한 소리가 아니었기에 기분 좋은 말이었다.
오창도의 얼굴이 멀쩡했으면 오후 내내 잡혔을지도 몰랐다. 졸음이 몰려와 연거푸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진충기가 일어섰다.
오창도가 일어서다 말고 끙! 소리를 냈다.
한 교수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얘기 들으니까 예전 일복까지 돌아온 모양인데, 왜 이렇게 부럽지? 조금 있으면 손 확실하게 풀리겠네.’
배웅하던 오창도가 활짝 웃었다. 농담 같은 진담 때문이었다.
“오 교수, 오늘 도움 많이 됐다. 재정비가 끝나면 우리가 원했던 병원으로 변해 있을 거야. 언제든 문이 열려 있으니까 항상 고민해. 환영이야. 그리고 한동안 스파이하자. 이런 정보 있으면 곧바로 알려 줘.”
“오 교수, 다음 주 토요일에 봐. 당직 아니면 술 한잔 진하게 하자. 눈치 봐 가면서 일해. 그러다 쓰러지겠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점점 좋아지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었다.
모두가 발전하고 있다.
다음 주에는 기필코 김지훈이 뿌려 대는 불길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을 다졌다.
‘명색이 교수인데 전임한테만은 타지 말자. 그래야 몸도 더 편해질 수 있어.’
자존심까지 걸린 일이었다.
병원을 나서는 진충기와 한 교수의 눈매도 매서웠다.
‘라파로에 개복까지 모든 수술에 생각 이상의 수준을 요구한단 말이지? 뒷받침할 수술 건수는 넘치고도 남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양 병원의 차이가 의외로 커 보였다. 김지훈을 비롯해 전임들의 실력까지 뛰어난 이유를 엿보았기에 단단한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
확고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릴 것이다.
***
일주일 지났다고 몸과 마음이 편해질까?
하! 하! 하!
완전한 오판이었다.
월요일, 시작만큼은 기분 좋았다.
두 번째 간 내 담석 수술 중 집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담낭을 절제한 후 총수담관을 처리하는 과정이 손에 익지 않았지만 누구든 방식이 바뀌면 고전하기 마련이었다. 수술 내내 주의를 기울여 아무 문제 없이 잘 끝냈다.
김지훈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했다.
‘한 가지만 빼면 수술 참 깔끔하게 하시네. 머리로는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손에 익는 건 시간이 걸리겠지. 빨리 이 방식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후배들 교육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
“오창도 선생님, 잠깐 저 좀 보시죠.”
휴게실은 참 여러 일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각오에 따라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자세에 따라 태우는 사람이나 타는 사람의 관계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
김지훈과 오창도가 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고, 결과는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남은 정규 수술이 이어졌다.
‘김지훈 선생님이 말하는 원칙은 써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있었던 걸까? 욕먹어도 싸다.’
오창도가 마침내 무심코 지나쳤던 동작 하나하나까지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시행된 개복 수술에서 퍼스트를 서며 타이 하나에도 모든 정성을 다했다.
‘역시 배워야 할 점이 많은 선생님이야.’
혈관 수술이 남았다.
송진우와 첫 번째 수술을 끝낸 김지훈이 물끄러미 오창도를 보았다. 그간 세컨을 서며 전공의와 똑같은 자세를 견지한 써전을 신뢰하지 않으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오창도 선생님, 다음 수술 퍼스트 서시죠.”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날도 많은데 하필이면 오늘!’
오창도는 상당히 담담했다. 침착하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수술에 임했다. 루뻬를 써야만 제대로 보이는 가느다란 실과 작은 바늘이 혈관을 통과할 때마다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했다.
결과는?
삐거걱! 덜컥!
휴게실 문이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전공의들이 보고 있습니다. 모레부터 선생님과 혈관 수술을 할 생각입니다. 반드시 다른 모습을 보여 주세요.”
앞으로 계속 퍼스트를 서야 한다는 말에도 오창도가 얼굴을 펴지 못했다. 휴게실에서 오고 간 대화를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김지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혹독하게 배웠다는 신현수의 말이 떠올랐다. 신기동 교수에 대해서도 임용 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혈관 수술의 대가라고 불리는 신기동 선생님에게 어떻게 인정받았을까? 재능일까? 노력일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화요일은 이준영 교수의 날이었다.
퍼스트를 서다 기구 한 번 잡았을 뿐이었다.
결국 듣고 말았다.
“오 교수, 똑바로 하자.”
극도의 긴장 속에 이준영 교수의 수술을 마쳤다.
실수하면 언제든 들을 수 있는 말인데,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뼛속 깊이 느꼈다.
그 말을 들은 직후 가뜩이나 전공의 대하듯 밀어붙이던 김지훈이 더욱 살벌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수술이 남았다.
이혁민 교수의 냉정하고 차분한 눈길이 따갑게 따라붙었다. 강병옥과 오하석의 눈길이 무안할 지경이었고, 김지훈은 오늘도 어김없이 휴게실 문을 열었다.
‘야! 세부 전공이 아무 의미도 없네.’
화끈한 열기에 휩싸인 후.
“이번 주 수술들 계획 잡아야 하니까 빨리 가시죠.”
공연히 전공의 소리가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연구실로 가는 내내 김지훈의 입이 쉬지 않았다.
오창도의 시름이 깊어 갔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눈에 걸리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수련을 받는 것처럼 수술 과정 일부를 받았을 뿐인데 말이다.
눈만 감으면 다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적을 받았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눈빛은 가히 전율이었다. 전공의들이 왜 수술이 끝날 때마다 휴게실 문을 주시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일이 더 늘었다.
이번 주에 하나 더 있다지만 복강경을 이용한 좌측 간 전 절제술은 이미 세 건을 시행했다. 여유가 있을 법했지만 참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탓인지 난리 났다.
이준영 교수마저 시연 이후에 한 케이스를 모두 확인하며 마치 첫 수술을 앞둔 것처럼 함께 준비했다. 더불어 수요일에 예정된 췌장암 수술 준비까지 이어졌다.
오창도가 입술을 모았다.
가장 피곤할 전공의들까지 열정적이었다.
종씨인 단발머리, 오하석까지 눈을 뜨려 애쓰고 있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내내 고개를 떨어트리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차의 노력에 감탄하고, 자극받을 수밖에 없었다.
제법 늦은 시간이 돼서야 다들 퇴근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상당히 빠르게 사라졌다.
최근 들어 일과가 끝나면 단 1분도 쓸데없이 병원에 머물지 않았다.
미혼은 고개를 갸웃갸웃, 기혼은 고개를 끄덕끄덕.
‘우리 딸, 자면 안 된다.’
주말과 월요일 밤 맛본 희연이의 재롱은 고경아의 밝은 웃음과 함께 최고의 피로 회복제였다. 오창도가 지동훈 교수와 함께 당직을 선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한 가지 경우만 없으면 오늘도 마음 편히 쉴 것이다.
‘없어야 한다. 없어야 한다.’
주문을 걸며 잠자리에 들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만 잘 잤다.
새벽 즈음, 지동훈 교수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 나타난 오창도의 일복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화요일 자정 전의 바쁨은 지동훈 교수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었고, 일정 정도 각오는 했다. 그런데 애먼 시간에 의외의 환자가 왔다.
“지 교수, 어떻게 할까?”
“내 당직 때 오는 환자는 오 교수 환자라고 했잖아? 결정하는 대로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연락해도 괜찮을까?”
“안 하면 도리어 문제 삼을 사람이야. 빨리 결정해.”
결국 지동훈 교수가 전화를 했다.
김지훈은 자다 말고 끌려 나왔다.
환자 상태와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교수 3명이 마주 앉았다. 집에 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을 지동훈 교수가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정복되지 않는 탈장 환자였다.
‘배 속으로 장을 못 넣어서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탈장 환자 정말 드문데, 누구 일복이야? 그나저나 오 교수에게 라파로로 하게 할까?’
복강경 시행 여부 및 오창도의 집도 결정은 아직까지 김지훈이 결정할 일이었다.
조용히 환자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1차 결정을 내렸다.
“오창도 선생님, 라파로로 어떻게 수술하실 건지 간략하게 알려 주세요.”
경험 풍부하고, 실력 있는 써전이었지만 지금은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기대대로 오창도는 안전하고 확실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집도하시죠. 지동훈 선생님, 우리만 들어가면 되는데 퇴근 안 하세요?”
“오 교수 앞으로 입원하지만 당직은 나야.”
오창도가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 때문에 교수 세 명이 당직을 서는 꼴이 됐네.’
기장 힘든 시간인 새벽에 탈장 환자를 응급으로 수술하게 됐다. 그것도 복강경으로 말이다.
우르르 교수 3명에 전공의까지 들어서자 마취과 당직 교수와 수술 방 간호사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마취과 사이에서도 이미 말 나올 대로 나왔다.
‘어후! 이젠 떼로 몰려오네. 교수 충원은 좋은데, 왜 김지훈 같은 사람을 뽑는 거야?’
불만은 불만일 뿐 수술은 시작돼야 한다.
처컥! 처컥!
안전하게 탈장 주머니 속에 박힌 장을 끄집어냈다. 다행히 장을 자를 필요는 없었다.
확실하게 원인 부분을 처리했다. 탈장 수술 경험이 많은지 상당히 빠르게 끝났다.
김지훈과 눈빛을 교환한 지동훈 교수가 활짝 웃고 있었다. 불타는 일과와 치열한 당직 덕인지 몰라도 오창도의 손을 완전히 회복시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십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다.’
오창도는 진충기가 왜 자신을 다시 임용하여 애쓰는지 온몸으로 증명해 가고 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온 써전을 전임이 교육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늘은 3명의 교수가 토끼 눈이 됐다.
일 더하기 일은 삼인가?
수요일, 췌장암 환자의 휘플 수술이 시작됐다.
오창도가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이젠 병원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같은 식구라는 생각 덕인지 김지훈의 손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노력하지 않거나, 위험 때문에 회피하면 인정받던 써전도 힘들어하는 수술을 매끄럽게 해냈다.
‘누가 전임이라는 사실을 믿을까?’
의외로 빨리 끝나 시간까지 남아돌았다. 임용 이후 처음으로 갖는 일과 중 여유였다.
무려 열흘 만이었다.
오창도가 연구실 소파에 기댄 채 코를 골았다.
맛있고 달게 자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자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눈물 날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며 슬슬 눈을 감던 김지훈이 갑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잠시 고민한 후 전화기를 잡았다.
“현수야, 부탁 하나 하자.”
무슨 부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