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902화 (902/1,329)

8화. 호사다마(好事多魔) Ⅱ (1)

휴게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오창도 선생님, 담낭 절제에는 문제가 없으시니까 총수담관 부분 처리만 말씀해 보시죠.”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술 기록을 직접 작성한다고 생각하면서 처리 과정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수술 기록지 작성?

전공의 1년 차가 하는 일이다.

어정쩡하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창도가 수술 과정을 읊었다.

역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밴 것처럼 막힘이 없는 것으로 보아 H 병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따르는 방식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문제가 되는 부분을 교정했다.

“아까 이준영 선생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실수가 유발될 가능성이 많아 방식을 바꾼 지 오래된 방법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했다.

오창도가 머리를 두드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씩 불안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동안 별일 없었다고 지나갈 일이 아니야. 반드시 고쳐야 해. 굴곡 담낭을 놓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야 돼.’

“다시 가 보시죠.”

동시에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아니죠. 제가 설명한 방식을 떠올리시면서 다시.”

사소한 습관조차 고치기 어려운 존재가 사람이다. 십수 년 동안 손에 익을 정도로 반복한 방식 역시 쉽게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과는 자명했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입에 착 달라붙을 때까지 휴게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울러 이혁민 교수의 지적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누구나 화를 낼 상황이었지만 깍듯하고 예의 바른 말투에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진행됐다.

“우리 교수님들은 수술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문제를 삼으십니다. 단순 유방 종물 수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창도는 창피함까지 기꺼이 감수했다.

‘잊었거나 무시했던 것이 이렇게 많았나? 주말 집담회 때 박승준 선생님까지 지적을 받는데, 이런 조언을 수용하지 못하면 함께할 자격이 없어.’

한참이 지나서야 휴게실 문이 열렸다.

김지훈도, 오창도도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후배를 가르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임이 교수를 태우는 일이나, 전문의가 전문의에게 활활 타는 일이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없이 따라 주셔서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후우! 원칙에서 단 한 발도 뒤로 물러나지 않네. 교수라고 해도 당연한 지적인데, 왜 전공의가 된 기분이 들지?’

오창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치열한 하루하루가 지났다.

김지훈은 소소한 차이나 사소한 문제 하나 지나치지 않았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확실하게 힘을 보탰고, 박승준 교수는 무지하게 힘들었던 당직 때문인지 작정하고 밀어붙였다.

그나마 동년배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성격까지 좋은 덕에 가장 빨리 말을 놓게 된 지동훈 교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안이었다.

“다음 주 당직은 나하고 서니까, 오 교수가 다 수술해. 손을 빨리 풀어야 이 생활에서 벗어나지.”

“지 교수, 고마워.”

“김 교수가 만만치 않지?”

“후배 의사가 이렇게 무서울지 몰랐어.”

“하하하! 나도 처음에는 그런 기분이 들곤 했지만, 알고 보면 김 교수만 한 사람이 없어. 가장 힘이 되고, 언제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정도 제일 많을걸?”

정이 많긴, 혈관 수술 때는 살벌함 그 자체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퍼스트조차 서지 못한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어디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김지훈이었다.

어느새 금요일 저녁, 어둠이 다가왔다.

드디어 일복과 일복이 다시 만났다.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통의 강자와 신흥 강자가 화려하게 날밤을 새웠다.

오창도에겐 조금도 불만을 가질 수 없는 밤이었다. 김지훈이 퍼스트를 자처하며 환자 진료부터 수술까지 모두 맡긴 것이다.

복강경 센터에 근무하는 동안 기구만 다뤘던 손이었다. 밤새 수술하며 잊고 있었던 장기의 생생한 온기와 감촉이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였어.’

피 말리는 바이탈과의 사투,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수술, 환자의 극적인 회복은 짜릿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일반외과 써전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을 만끽한 날이었다.

대가는 천근만근이 된 눈꺼풀이었다.

곧바로 주말 집담회가 이어졌다. 오늘도 변함없이 메이저 수술을 앞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함께 밤을 샌 김지훈과 전공의들의 긴장이 확연하게 느껴진 오창도가 졸음을 쫓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오 교수 일복이 대단하구나. 대단해. 이번 주는 수술도 많이 하고, 퍼스트도 많이 섰네. 역시 실력이 있으니까 환자도 딱 알아보네. 어디 보자. 무슨 수술 했나 보자.”

송재덕 교수의 웃음에 혹하면 죽는다.

단단히 각오하고 대비했건만.

모든 교수들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일주일 동안 김지훈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면까지 찾아내 가히 융단 폭격을 가했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라 믿었던 지동훈 교수까지 말이다.

연이은 집도가 가져온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극심한 피로를 안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내 전사자들이 속출했다. 정도가 덜하다고 해도 박승준 교수까지 예외가 없었다.

불평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예전에는 맛보기였구나.’

반쯤 타 버린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선생님, 이렇게 살면 한 달도 못 버티겠죠?”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럼 펠로우가 아니라 전공의가 되셔야겠습니다.”

오창도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전공의 대우 아니었나?

김지훈이 번쩍번쩍, 가공할 눈빛을 보이며 다음 주 수술 스케줄을 꺼내 들었다.

진지하게 눈길을 주던 오창도가 또 한 번 놀랐다.

메이저가 줄줄이 예정돼 있었다.

월요일, 복강경으로 시행하는 간 내 담석 두 건이 포함돼 있었다.

다른 수술까지 시간 꽤 걸릴 것이다.

수요일에는 췌장암 한 건뿐이었지만 진행된 상황이라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 수술 날인 금요일, 간암이 한 건 있었다. 복강경을 이용한 좌측 간 전 절제술이었다. 시연을 포함해 벌써 네 번째라고 했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수술이었다.

모든 수술이 뛰어난 퍼스트를 요구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일과 끝나고, 전공의들과 함께 수술 준비 및 계획을 세우는 토론 자리가 있을 겁니다.”

종종 벌어지는 수술마저 매번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간 내 담석과 췌장암도요?”

“연령, 성별, 진행 정도, 몸 상태가 다 다르잖아요. 전공의 교육도 필요하고 해서 항상 해 온 일입니다. 그 덕에 실수를 줄일 수도 있고요.”

오창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한 원칙일 것이다.

전공의를 비롯해 S 병원 써전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분명했다. 손도 손이지만 이런 부분부터 몸에 익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

힘든 한 주였다.

이제 오후 회진만 돌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빡빡한 눈가를 비비며 일요일 집 당직 대비를 하던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나다. 오창도 선생하고 외래로 내려와.)

스승의 호출이다.

바로 가운 걸치고 외래로 향했다.

선잠 자듯 졸다 깨면 몸 무척 괴롭다. 김지훈과 함께 소파에서 졸고 있던 오창도가 진저리를 치며 뒤따랐다.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진충기와 한 교수였다.

무척 반가워하는 오창도를 보던 진충기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도 피로 겹겹이 쌓여 도저히 교수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몰골의 김지훈을 보며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어제 당직을 선 얼굴인데 심하네. 평소 수술이 제법 있는 모양이야.’

“김지훈 선생님, 일이 무척 많은가 봅니다. 오창도 선생, 할 만해? 아직도 늦지 않았어.”

일견 진지해 보이면서도 좋은 일로 왔는지 가벼운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진충기 선생, 하던 말 계속해.”

한마디면 분위기 원상 복귀다.

진충기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취했다.

한 교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자세다.

“예, 선생님.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에 두 번째 좌측 간 전 절제술을 시행하게 됐습니다. 이미 경험이 있긴 하지만 시연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부탁?”

“참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다 좋은 방식은 없는지 살펴 주시고, 조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락해 주실 것이라 믿고, 수술 날도 다음 주 토요일로 잡았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써전이 써전에게 평가를 받고자 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남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자존심까지 세다면 더욱 어렵다. 결정적으로 양 병원은 강력한 라이벌 관계이고, 최인호 교수가 있다.

결국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각오일 것이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순간 졸음이 싹 달아났다.

‘진충기 선생님에게 이런 면까지 있었어? 무섭다.’

진충기가 변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이준영 교수가 고민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최 교수님도 허락하셨나?”

약간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100퍼센트 성공할 확신이 없으면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대단한 의미가 있는 자리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안고 간다면 다음 수술을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곧이곧대로 말해서는 성사될 일이 아니었다.

내심 다른 뜻도 있었다.

시연 전부터 비틀렸던 관계가 시연으로 최악이 됐다. 일반외과 전체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었다. 이준영 교수와 최인호 교수가 건전한 긴장과 경쟁을 유지하면 외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H 병원과 자신을 위한 길이었다.

결자해지!

이상스러울 정도로 이준영 교수를 견제하는 최인호 교수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해결될 일이었다.

‘이준영 선생님 앞에서 체면을 세웠다고 생각하시게 되면 태도가 바뀔 수도 있어.’

“일단 선생님 허락부터 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되실까요?”

오창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말 최인호 선생님이 이준영 선생님의 참관을 허락했을까? 믿기 힘드네. 설령 허락했다고 해도 만일 실패한다면 후폭풍이 장난 아닐 텐데, 그 점은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걸까?’

우려는 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 교수가 허락했다면…….”

이준영 교수도 말꼬리를 흐렸다.

“다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전후 사정을 모를 수가 없다.

한때는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 진충기가 자신한다면 큰 문제 없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진충기의 수술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이번 기회에 최인호 교수와의 보이지 않는 알력을 일부라도 해소한다면 좋겠군.’

“김지훈 선생,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되겠어? 가게 되면 오창도 선생까지 가자.”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 가는 것으로 하자.”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으면 깔끔하게 결정된 일이다.

구체적인 수술 일정을 들었다.

시간을 더 갖고 친분까지 다지면 좋겠지만 토요일이다. 게다가 한때 같은 식구였던 의사들끼리 자리를 가졌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진충기가 오창도에게 눈짓을 주며 먼저 일어섰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겸사겸사 잘됐다.

“오창도 선생님, 오후 회진은 각자 돌죠.”

이준영 교수와 잠시 깊은 말을 나누었다.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많은 생각 속에 회진을 돌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번개처럼 사라졌다. 고경아와 얼굴 본 지 근 이틀 된 딸이 떠오른 것이다.

‘이러다 쫓겨난다. 아니지. 우리 딸이 날 못 알아보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라.’

조금 있으면 태어난 지 세 달 된다.

하루가 다르게 커 매일 놀라는 것이 일상이다.

옹알이를 하다 말고 크게 웃으면 가슴이 쿵 뛰었다.

엄마 아빠를 보며 미소를 지으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엎드린 채 버둥거리다 고개를 반짝 들면 금방이라도 기어 다닐 것 같았다.

아직도 잠투정 많고, 울음소리가 너무 커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딸은 행복이자 보배였다.

머릿속을 꽉 채웠던 참관, 좌측 간 전 절제술, 진충기의 상상도 못한 변화, 무시무시한 라이벌의 등장이 싹 사라졌다.

옹알옹알 무슨 말인가 하던 희연이가 꺅! 소리를 냈다.

어? 이건 또 뭐지?

고경아가 우쭈쭈거리며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우리 딸 아빠 왔다고 그렇게 기분이 좋아? 이틀 만이라 엄마도 기분이 참 좋아요. 아빠는 희연이가 왜 꺅 소리를 내는지 알까?”

한 줄기 한기가 다가왔다.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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