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호사다마(好事多魔) Ⅰ (2)
결국 일과는 변함이 없고, 오창도라는 써전의 교육 아닌 교육까지 맡으라는 말이었다.
함께 일했던 일주일, 두 번의 당직, 무시무시한 일복이 떠오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었다.
한 가지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선생님, 당직은…….”
말도 끝나기 전에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같은 간담도 파트인데 같이 서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손발이 척척 맞을 거 아냐? 어쨌든 네게 교육을 맡겼으니까 신현수, 이경석과 함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봐. 이왕이면 내년에 펠로우 교육 기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말이야.”
울고 싶어졌다.
묵묵히 앉아 있는 이준영 교수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돌아온 눈빛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열심히 해. 필요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오창도는 복강경 센터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의사는 복강경에만 특화된 써전이 아니다. 다방면에 걸쳐 기초가 탄탄해야 할 뿐 아니라 펠로우를 교육시킬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창도 선생의 실력은 안다만, 그동안 등한시했던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안 하면 잊기 마련인 것이 손이다. 그 손부터 돌려놓자.”
결정을 번복할 교수들이 아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연구실로 향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신현수와 이경석도 상당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전임이 교수를 가르치라는 말도 그렇지만 펠로우 교육까지 맡긴다는 의중을 감당하기 힘든 탓이었다.
머리를 맞댔다.
오창도의 일복은 시한폭탄과 다름없었다. 혼자 모든 일을 맡았다간 과로사할 판이었다. 최대한 부담을 줄이고자 했지만 엄연한 현실이 냉혹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함께할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네. 지훈아, 오창도 선생님이 간담도인 건 어쩔 수가 없잖아. 펠로우 교육은 모르지만 이번은 네가 거의 다 책임지고 하는 수밖에 없겠다.”
“어이구! 김지훈 일복 정말 어마어마하다. 일복 더하기 일복인데 당직은 또 어떻게 서냐? 교수님들이 원하는 선에 도달할 때까지 다른 도리가 없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시간 날 때마다 머리를 쥐어짰다.
원칙을 지킬 때 옳은 길이 보이고, 편하기만 바라면 도리어 힘들어지는 법이다. 오창도에게 어떤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고 효율적인지 고민했다.
‘내 입장만 생각하면 기간이 길어질 테고, 결국 더 힘들어지겠지. 내가 오창도 선생님 처지라면…….’
뚝딱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월 마지막 날, 오창도를 만났다.
이미 이혁민 교수에게 자세한 말을 들었을 것이다. 기분이 무척 좋지 않을 일이건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을 전했다.
“솔직히 제게 큰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얼굴 붉힐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다 같이 모여 상의해 가면서 개선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혁민 선생님 말씀대로 처음 시작한다는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이 남았다.
“한 가지 유념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우습지만 어쨌든 선생님도 동의하신 일입니다. 정식으로 진료하고 수술하시는 날까지 펠로우로 생각하고 진행하겠습니다.”
아랫사람으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후우! 일도 일이지만 처신도 문제네.’
오창도가 입술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독한 수련을 거칠수록 원하는 수준에 빨리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공의 때 이미 체감했다. 이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고 벗어나는 편이 나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교수라는 명칭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사실 그동안 라파로에만 너무 치중했어. 최선을 다하자.’
여러 생각으로 긴 하룻밤이었다.
***
드디어 11월 1일부로 오창도가 출근했다.
아침 7시 정각.
응급실 보고로 일과가 시작됐다.
커피 타임을 가진 후 회진 돌고, 각자 수술 방이나 외래로 향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김지훈이 오창도에게 들어갈 수술을 지정했다.
“오늘 제 수술은 다 기본적인 수술이니까 신현수 선생과 이경석 선생님 수술을 차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후에 혈관 수술 있으니까 잊지 마세요.”
“내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준영 선생님 수술은 무조건 다 들어가세요. 혹시 끝나고 난 후 이혁민 선생님 수술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시죠?”
지난 일주일간의 경험으로 많은 면을 파악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창도 입장에서는 당분간 일일이 묻고, 확인한 후 행동해야 실수를 방지할 수 있었다.
“당직은 어떻게 설까요?”
절로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말이었다.
“일단 제 당직 날인 금요일에는 무조건 당직 서야 합니다. 박승준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당직 선생님을 바꿔 가며 한 번 더 서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집도할 기회를 더 많이 가져야 이 기묘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실 수 있겠죠?”
“오늘이 박승준 선생님 당직인 것으로 아는데, 바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오창도에게만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다. 김지훈을 비롯해 모든 교수들에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째깍! 째깍!
“다음 환자분 들어오시라고 해요.”
오늘도 수많은 환자가 외래를 찾았다.
“보비! 타이! 석션!”
여느 때처럼 많은 환자가 수술을 받았다.
전공의 일과도 변함이 없었지만 새로운 교수의 등장으로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진우야, 오늘 혈관 수술 내가 들어갈 차례지? 오창도 선생님한테 밀려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가능성 농후합니다. 난 당직이라서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네요.”
“박승준 선생님 당직이라 편하겠다.”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형, 말 못 들었어요? 오창도 선생님도 당직 같이 서세요. 전에 근무하셨을 때 보니까 복이 있으신 것 같던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오후 일과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
“루뻬 주세요.”
조용한 가운데 혈관 수술이 시작됐다.
퍼스트를 서게 된 강병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욱 집중했다. 혈관 처리야말로 가장 기본이 되는 술기라는 것을 점점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언제 이 자리를 뺏길지 몰라. 펠로우 선생님들이 세 분이나 오시면 4년 차 때도 방심하면 안 돼. 그 전에 최대한 많이 배워 둬야 해.’
강병옥이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빛내며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김지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오창도는 전공의의 보기 드문 집중과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머금었다.
첫 번째 수술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오창도에게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응급실에서 전화 왔어요.”
“알겠습니다. 김지훈 선생님, 응급실 다녀오겠습니다.”
수술에 집중하고 있던 김지훈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창도가 조용히 수술실을 나가며 어깨를 휘휘 돌렸다. 하루 종일 수술실에 있었던 탓인지 벌써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째깍! 째깍!
어느새 예정된 혈관 수술이 모두 끝났다.
강병옥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이혁민 교수를 비롯해 위장관 파트 교수들이 신경 쓰며 가르친 덕일 것이다.
문득 예비역이란 생각이 떠올랐지만 향후 진로 결정은 1년도 더 남은 일이었다.
‘자식! 들어올 때부터 눈에 띄더니 이젠 어엿한 써전이 다 됐어. 그나저나 오창도 선생님은 왜 안 보이시지? 아직도 환자가 있나?’
수술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미 한 건의 응급 수술이 있었다. 그런데 해가 지면 수술실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박승준 교수가 서성거리며 다음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 전에 있었던 일이 우연이 아닌가 봐. 일복 정말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에이! 설마 또 뜨겠어요?”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한 명 더 대기 중이야. 퇴근 미뤄.”
“예? 제가 왜요? 전 당직 아닙니다.”
“이준영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 응급이라도 라파로로 할 케이스면 우리 김지훈 선생에게 반드시 연락하고, 오창도 선생에게 줄 수 있으면 주라는 말씀 말이야.”
절로 헉! 소리가 터졌다.
뭐 이런 일복이 다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스승님의 오더는 거역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시간은 금이다.
고경아와 희연이를 볼 시간은 다이아몬드다.
치밀하게 두 번째 수술 소요 시간과 세 번째 수술 준비까지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다.
두 번째 수술 집도는 박승준 교수가 하겠지만 퍼스트를 누가 서는지가 변수였다.
“선생님, 이번 수술 퍼스트 누구 세우실 겁니까?”
“오창도 선생 세워야지. 펠로우 대우하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세컨을 세워?”
최소한 2시간 30분 정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부리나케 응급실로 가 복강경으로 아뻬 수술을 할 환자를 본 후 집으로 달려갔다.
“우르르! 까꿍! 희연아, 아빠다.”
그렇게 말하며 놀아 주고 싶었는데 자고 있었다.
깜빡깜빡 졸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딱 시간 맞춰 깼고, 우는 얼굴만 봤다.
“응애! 응애!”
희연이의 호소를 뒤로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고경아의 한숨 소리가 바짝 따라붙었다.
가족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상당히 의미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창도가 교수로서 정식 진료하고, 치료하는 첫 환자와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능숙한 손을 보는 즐거움도 잠시, 왈칵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수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상수가 새로운 응급실 환자를 노티한 것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혈복막이었다.
네 번째 수술이다.
박승준 교수에겐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 참관하던 박승준 교수의 마스크가 입에 딱 달라붙었다. 입술 골을 따라 일자가 그려졌다. 헛바람을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송진우의 눈만 반짝반짝 빛났다.
‘이러면 언제 당직을 서도 환자 없을 걱정은 없단 말이네. 어후! 좋기는 한데 체력이 문제구나.’
아뻬 수술이 끝난 후 병원을 나서던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렸다.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응급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피해야 할 일은 피해야 돼.’
결국 당직도 아닌 날, 새벽 별 보며 퇴근한 꼴이 됐다.
세상모르고 자는 고경아와 새근새근 엄마 품에 안겨 작은 숨을 내쉬는 희연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왜 안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살그머니 자리에 눕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오창도 선생님 일복 장난 아닌 게 도리어 잘된 일일지도 몰라. 다른 교수님들과 수술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상황에서 더 빨리 벗어날 거야.’
달콤한 기대를 머금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났고,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점점 더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진료가 끝날 때쯤 이준영 교수의 마지막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스승의 수술을 보고, 이혁민 교수의 수술도 준비할 겸 수술실로 향했다.
차가워진 날씨에 1년 내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수술 방 공기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딱 수술 방 온도만 그랬다.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변화가 감지됐다.
오창도가 집도의 자리에 서서 총수담관을 처리하고 있었다.
역시 제자에게 모든 일을 미룰 스승이 아니었다.
반색하던 김지훈이 힐끗 이준영 교수를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분명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수술 방법에 집중했다.
오창도의 손이 어색해 보였다.
처음 복강경이 도입됐을 때 방식으로 수술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법 위험성이 있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된 지 오랜 방식이라는 점이었다.
‘H 병원은 아직도 저렇게 수술하나? 어어? 저 부분을 저런 식으로 처리하면 안 되는데. 불안 불안하다.’
이준영 교수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나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적으로 위험하다고 해도 숙달된 방식이면 대부분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에 일단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나가실 것 같지 않은데…….’
짐작이 맞았다.
수술이 끝난 후 묵직한 목소리가 터졌다.
“오 교수, 총수담관 처리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숙달됐다고 해도 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맞아. 김지훈.”
“예, 선생님.”
“똑바로 하자.”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영문 모를 오창도는 눈만 껌벅였다.
시간에 쫓겨 이혁민 교수의 남은 수술을 들어갔다.
시작 분위기는 좋았다.
“둘 다 오씨네. 오 교수, 오하석하고 항렬이 어떻게 되나? 하석이가 돌림자를 안 썼나?”
“안 그래도 성이 같아 물어봤습니다. 오하석 선생 아버님 함자를 들으니까 제 아주머니뻘이 되시네요.”
“그래? 하하하! 옛날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환자 내려왔구나. 김지훈, 집도해. 오 교수, 퍼스트 서라.”
이혁민 교수가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써드 자리에 앉았다. 세컨을 서는 단발머리 오하석과 오창도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슬슬 사라졌다.
결국 한마디 듣고 말았다.
누가? 김지훈이.
“김지훈, 국소마취라고 해도 유방 수술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실 잊었나? 오 교수하고 갑자기 내 수술 들어온 거 아니잖아.”
분명 김지훈은 원칙대로 했다.
누군가 실수했고, 눈에 밟히는 부분을 그냥 지나칠 교수들이 아니었다. 당장 불길에 휩싸이고, 다져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교수로서 이제 정식 근무를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교수가 전공의 앞에서 활활 타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총대 메고, 무엇이든 해야 할 때였다.
이제 이틀 지났기에 도리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얼굴에 철판 깔고, 가야 할 곳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충격으로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김지훈이 제법 큰 부담감에 훅! 숨을 내쉬면서도 눈가를 바짝 굳혔다.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