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호사다마(好事多魔) Ⅰ (1)
오창도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가의 이름까지 나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날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급격한 주가 상승이다.
한마디로 상한가 쳤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진충기 선생님도 있을 때 잘하시지. 흠! 이것도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일까? 기분이 나쁘진 않네.’
새삼 모두에게 고마웠다.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선 신현수.
자신이 알고 있던 진충기가 아닌 진충기.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준 김지훈이 가장 고마웠다.
“오창도 선생, S 병원에는 내가 설명하고 양해 구할 테니까 다른 부담 갖지 마. 오로지 오창도 선생의 미래만 생각해. 우리 센터가 어떤 곳인지 제일 잘 알잖아?”
너무 노골적이었다.
살벌한 눈초리를 느꼈는지 진충기가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지훈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김지훈이 정색하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오창도의 실력과 성품을 잘 아는 덕에 다른 이유까지 쑥쑥 떠올랐다.
‘이건 아니다. 나도 딸 얼굴 보며 살고 싶습니다. 당직만 같이 안 서면 모든 일이 잘 풀리는데 왜 이러십니까?’
신현수는 아예 말할 이유가 없다는 듯 주섬주섬 일어나 나갈 준비까지 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오창도의 몫이었다.
H 병원은 쫓아낸 죄, S 병원은 임용 전 단계인 정식 면접조차 미적미적 미룬 죄가 있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익숙하고 편안한 곳, 아직은 낯선 데다 엄청나게 힘든 곳.
시설, 능력, 실력, 조건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무수히 많았지만 결국 사람이었다. 함께하고 싶은 써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써전이 있는 병원이다. 그것이 곧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김지훈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 한 교수, 진충기 선생님, 나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교수들.’
침묵이 길어졌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십수 년을 넘게 이어 온 인연과 불과 몇 달 되지 않는 인연의 깊이는 누가 보아도 비교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문제의 발단이 된 진충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나 같으면 병원을 옮길 수 있을까? 후우! 만일 오창도 선생님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이것만큼 최악도 없을 거야. 인사 위원이고 뭐고 쫓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쳐?’
단숨에 결정하게 할 강력한 한 방, 오창도의 마음을 확고하게 만들 치명적인 한마디가 필요한데 할 말이 없었다.
신현수도 얼굴만 굳힐 뿐이었다.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써전이 된 후 처음으로 상종가를 친 오창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과분한 말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
모두들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오창도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진충기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가 원했던 진충기 선생님으로 돌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교수와 동료들 모두 기뻐하고 있겠죠?’
어떤 말을 할까?
김지훈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선생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김지훈 선생님과 신현수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S 병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일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절 스카우트할 정도로 실력을 쌓은 후 다시 뵙겠습니다.”
무거웠던 침묵과는 달리 단호한 목소리였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미 결정을 내렸다. 진충기의 마음에 미안할 따름이었다는 표정이었다. 행여 남아 있을지 모를 앙금은 천천히 털어 내도 될 것이다.
진충기가 절박하게 외쳤다.
“오창도 선생!”
말 길어지면 불리할 일밖에 안 남았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결정 났네요. 진충기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현수야, 뭐 해? 늦었어. 빨리 가자. 오창도 선생님, 가시죠.”
말할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오창도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개 한 번쯤 주저하기 마련인데 오창도 역시 마지못해 일어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기회를 잡으려던 고개 하나가 뚝 떨어졌다.
아직 면접이 남아 있지만 9부 능선은 넘은 팔 4개가 밤하늘로 치솟았다.
희비가 교차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오창도는 어느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자격이 충분한 써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러브콜을 받을 것이다.
‘진충기 선생님, 정말 여러 부분에서 라이벌이네.’
김지훈이 기분 좋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
이틀 후, 정식 면접이 진행됐다.
결격 사유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오창도는 침착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진솔한 모습에 일반외과가 제출한 평가서가 맞물리며 호의적인 기류가 유지됐다.
속개된 회의에서 그간 시간을 끌었던 것이 미안한 양 바로 결론을 내렸다. 행정적 절차가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임용될 것이다.
그렇게 어렵고, 꼬였던 일이 순식간에 풀렸다.
가히 극적인 반전이었다.
모든 시름을 훌훌 털고 약속했던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마침 시연을 주제로 한 방송까지 있어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였다.
소속 써전들의 능력과 실력이 가감 없이 방영됐다. 개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S 병원과 일반외과의 위상까지 드높이고 있었다.
“오창도 선생도 오고, 시연 방송도 깔끔하게 나오고 정말 좋다. 좋아. 날마다 이런 경사만 있었으면 좋겠다. 지훈아, 경석아, 현수야, 뭐 하니? 술 한 잔씩 안 따르고 뭐 해?”
각자 사부에게 한 잔씩 올렸다.
오창도는 환영의 술을 꽤 받아 마셨다.
“오 교수, 열심히 하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말에 오창도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대가와 모두가 인정하는 써전과 함께 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토록 가슴이 설레고, 벅찬 적은 없었다.
교수들이 먼저 일어났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가 술자리를 주도했다.
“오창도 선생님, 처음에는 서먹한 면이 있겠지만 금방 사라지니까 걱정할 거 없습니다. 지 교수, 안 그래?”
“선생님, 이미 다들 친해졌습니다. 술 한 잔 안 드셨는데 설마 술 냄새에 취하셨어요?”
“왜 이래? 나도 술 먹을 줄 알아.”
오고 가는 농담 속에 웃음꽃이 피었다.
밤늦도록 아무도 일어날 일이 없었다.
오창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밤은 조용하네요. 혹시?”
눈길을 받은 박승준 교수가 크게 웃었다.
“오창도 선생님, 오늘 당직이 접니다. 이런 날도 하루 이틀이지, 제법 눈치가 보여요. 가끔 나하고 당직 섭시다.”
“선생님, 제발 말씀 좀 놓으십시오. 김지훈 선생님까지 S 병원에서는 다 선배님이시고, 이제는 제가 막내일 수도 있는데 부담스럽습니다.”
이경석이 쓱 끼어들었다.
“막내요? 그럼 우리 아래신가요?”
“그럼요. 다들 먼저 일하셨고, 이경석 선생님은 저하고 나이도 비슷한데 당연하죠. 정식으로 임용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당직도 열심히 서겠습니다.”
근무 시작 전에 서로 나이, 선배, 경력부터 찾으면 정말 피곤해진다. 그런 면에서 자유롭기를 은근히 기대했고, 오창도의 말에 더욱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때문인지 진충기에게도 상당히 고마웠다.
‘시작은 우리였지만 끝은 진충기 선생님이었네.’
신현수도 그런 모양이었다. 눈가까지 오른 술기운 믿고 한마디 던졌다.
“오창도 선생님, 혹시 중간에 진충기 선생님 만나서 이상한 소리 나오면 바로 소송 들어갑니다.”
소송이란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오창도였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젓는 순간 김지훈이 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소송까지 갈 거 뭐 있어? 이판사판 공사판이지. 선생님,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말 아시죠?”
“그럼요. 둘 중 한 명은 살아야죠.”
이경석이 크게 웃었다.
“다 살려면 결국 뼈를 묻어야 하겠네요.”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자리가 이어졌다.
유쾌함이 끊이질 않았다.
2주간의 근무로 서로를 알게 된 덕일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임용 과정이 오히려 더욱 끈끈한 감정을 갖게 했는지도 몰랐다.
간만에 술자리를 즐긴 김지훈이 집으로 돌아가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곤히 자고 있는 고경아와 희연이를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 딸, 잘 자네. 앞으로 매일매일 아빠하고 얼굴 보며 놀자. 당직 날만 빼고.’
온갖 기대를 품고 오창도의 근무를 기다렸다.
마침내 첫 출근 날이 정해졌다.
마음이 가벼우면 몸이 더 건강해지는 모양이었다. 바쁜 일상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수의 근무가 곧 시작된다. 알게 모르게 준비할 일이 제법 많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가 찾았다.
특별히 찾을 일이 없기에 불현듯 오창도와 전임들과의 관계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가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앉아라. 현수하고 경석이는 수술 중이지?”
“예. 수술 중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웬일인지 손수 커피를 타 내밀었다.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김지훈이 살짝 의아함에 휩싸였다. 평소 못 보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거나, 혹은 곤란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오늘따라 이준영 교수의 표정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이혁민 교수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년에 선발할 펠로우 인원이 결정됐다. 대장, 간담도, 혈관 파트에 각각 한 명씩 모두 세 명이다. 그리고 오창도 선생 말고 교수 한 명이 더 충원될 거다.”
두 팔 들어 만세 부를 일의 연속이었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여덟 명을 요구했지만 내심 두세 명 정도 생각했다. 교수 한 명이 누구일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기대 이상의 충원이었다. 더구나 오창도에 펠로우 한 명이 가세하면 간담도 파트만 모두 네 명이다.
무려 두 배가 되는 것이다.
“혹시 생각한 사람이나 접촉한 사람 있나?”
왜 안 했겠는가!
“일석이는 말씀드릴 것도 없고, 서도진, 안호석이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교수 충원은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 명? 잘됐네. 빠른 시간 내에 만나 보자. 교수 충원은 최철한 선생이 위장관 파트로 오고, 유석재가 구미 과장을 맡게 된다. 그쪽도 한 명 더 뽑을 예정이다.”
최철한은 더없이 존경하는 선배다.
이렇게 좋은 일은 없었다.
‘도진이가 우리 파트로 오고, 대장과 위장관 파트를 두고 고민하던 호석이는 대장을 지원하면 딱이네. 오창도 선생님과 서도진이면 완전 삼각 편대야.’
아귀까지 착착 맞아떨어졌다.
벌써부터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입가를 찢던 김지훈이 힐끗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표정인데 왠지 불안했다.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오창도 선생 근무 시작이지?”
절대 모를 리 없었다.
“예. 혹시 변동 사항이 있습니까?”
“이제 와 그런 게 있겠나? 다만 근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이 많았다. 이준영 선생님과 많이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귀가 쫑긋 섰다.
펠로우와 교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펠로우 지원자 모두 전문의 딴 후 공백 기간이 3년에 달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 적응과 교육이 필요하다. 반면 교수는 임용 즉시 똑같이 일하게 된다.
정상적으로 외래 진료를 한다. 당연히 수술도 곧바로 해야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수술 방의 한계 때문에 일인당 정규 수술 수가 줄게 된다. 가장 힘든 당직 근무 역시 평일은 6일마다, 주말은 6주마다 서게 될 것이다.
업무 강도가 적정했다면 모를까, 너무 과도했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여유가 다가왔다.
단, 기대가 현실로 바뀌어야 한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며칠 지나면 벌써 11월이고, 펠로우는 세 명이나 선발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
“무슨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전문의라고 해도 군대 다녀왔거나, 개인 병원 경력이 다라면 추가 교육이 필요하지 않겠나?”
당연한 말이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삼 말을 꺼낸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교육시킬 교수가 많을수록 좋겠지. 그러려면 오창도 선생을 그 전까지 확실하게 우리 병원 교수로 만들어야 한다. H 병원 경험이 도움 되겠지만 체계가 달라 큰 기대는 할 수 없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창도 선생에겐 내가 말할 테니, 당분간 펠로우 교육 시킨다는 각오로 함께 일해라.”
억! 소리가 나오기 직전이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돼.’
“당분간이라면 얼마나?”
“그거야 오창도 선생과 네게 달린 일 아니겠나?”
“교육시킨다는 각오는 또 무슨 말씀인지?”
“말 그대로다. 설마 기본적인 진료와 수술만 담당하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최소한 라파로로 웬만한 수술은 안심하고 맡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라파로뿐일까?
“다른 수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혈관에 내 수술까지 계속 혼자 맡고 싶지 않으면 다른 수술 수준도 끌어 올려야 하겠지.”
마침내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창도 임용 자체가 새로운 일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