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람은 왜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할까? Ⅱ (2)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선생님, 오창도 선생 임용 건을 재고해 주십시오.”
최인호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어떻게 알았지? 누가 입을 연 거야? 아니지.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고, 알아야 할 일이었어. 요새 분위기 묘하게 변했는데, 내 눈 밖에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지.’
진충기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입을 연 이상 확실한 결말이 나기 전까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 빤했다.
짐짓 모른 척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줬고, S 병원 일은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야. 그쪽 일을 왜 나한테 얘기해?”
“선생님!”
“허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오창도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기라도 하란 말이야? 내 마음에 쏙 들어도 힘든 판에 제 발로 나간 놈이다. 신경 끊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순순히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진충기로서는 물러설 구석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정식 면접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최인호 교수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정식 면접이란 소리를 했다면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도리어 괘씸한 일이었다.
‘내 뜻을 알고도 감히 재고해 달라는 말을 해?’
돌려 말할 때가 아니었다.
“알고 있다고? 면접 얘기까지 하는 걸 보니까 알고 있는 게 맞네. 진충기, 그럼 내 생각도 알아야지. 능력도 안 되는 놈을 그만큼 키워 줬으면 스스로 분수를 지켜야 하는 법이야. 내가 쫓아낸 놈을 S 병원에서 임용한다면 우리 꼴이 우습지 않겠어?”
진충기가 콧등을 찡그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창도 선생은 우리가 잡았어야 했습니다. 소송 건이 커진 것도 제 잘못입니다. 그동안 욕심을 앞세워 무리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잘못을 씻을 수 있도록 오창도 선생에 대한 마음을 바꿔 주십시오.”
최인호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충기가 말한 잘못은 자신의 잘못과 다름없었다.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교수들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하게 보여 줄 기회기도 했다.
목 위에 붙은 머리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면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을 모를 리 없다. 흔히 그렇듯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부정하면 도리어 화가 나는 법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지껄이는 거야? 무슨 잘못을 씻어? 문제는 오창도였고, 책임질 놈도 오창도야. 우리는 알고 있는 대로, 평가한 대로 알려 주면 끝나는 문제야. 그딴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찬바람을 날리며 등을 돌렸다.
벽에 부딪혔다.
여기서 대화를 중단한다면 언젠가 둘 중의 한 명은 반드시, 혹은 둘 다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추락이 더 두렵다.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대리 수술 문제까지 꺼내야 해. 어느 한 문제라도 먼저 해결돼야 다른 문제들까지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반면 정당한 일이 아니기에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다들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가장 많은 대리 수술을 요구한 최인호 교수에겐 치명적인 지적이었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어쩌면 수련 때처럼 주먹질과 발길질이 날아들지도 몰랐다. 창피함이나 수모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선생님,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나가라는 소리 못 들었어? 오창도 문제도 네 장래를 위해서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거 몰라? 물러 터지게 행동하면 그런 놈이 쉬지 않고 나오는 게 세상이야. 밑에 놈들한테 잡아먹히고 싶어? 다 널 위해 한 일이야.”
진충기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정말 자신을 위한 일일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엄중히 꾸짖고, 도리어 먼저 질책했어야 했다.
문득 김지훈에게 부센터장 자리를 제시하면서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 떠올랐다.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감수하겠습니다. 제자로서 스승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입을 다물거나 동조한다면 선생님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칩니다.’
죽자는 말이 아니라 살자는 말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을 뿐 성격까지 변한 것도 아니었다. 확실한 명분까지 있는 마당인데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들어 주십시오. 반드시 들으셔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대리 수술 문제를 근절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만에 하나 환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릅니다.”
대리 수술 문제를 꺼낼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최인호 교수가 입도 열지 못했다. 오창도의 소송 건을 빼면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래 교수들을 확실하게 잡으면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무슨 의도로 대리 수술 문제를 꺼낸 거지? 오창도 때문인가? 혹시 실적? 이 자식이 김지훈을 보더니 눈이 돌아간 거 아냐? 가만! 원칙대로 하면 내 실적을 뛰어넘을 테고, 결국 치고 올라오겠다는 소리네.’
진충기의 말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을 함께했지만 마음속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전해야 할 스승과 제자가 이해득실만을 따졌기 때문이었다.
최인호 교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책상 아래 놓인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배신감에 폭발하고도 남았지만 여기서 분노를 표출하면 고스란히 자신의 생각을 노출시키고, 잘못까지 인정하는 꼴이 된다.
치미는 화를 참아야 하는 탓에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진충기,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거의 모든 일에서 의견을 같이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수술보다 대외적인 활동에 더 치중한 최인호 교수였다. 자신이 보는 모든 환자를 직접 수술을 하게 되면 상당한 시간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라는 좋은 예가 있지만, 최인호 교수의 야심은 병원장이나 대가에만 있지 않은 탓이었다.
“절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우리 과 전체를 위한 일이고, 그것이 결국 선생님께도 큰 득이 될 겁니다.”
‘득? 무슨 득이 있어? 네놈 머릿속에 든 생각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내가 그동안 뱀 새끼를 키웠네.’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올랐지만 진충기 역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치명적인 약점인 대리 수술 문제를 꺼낸 이상 확실하게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내가 가져야 할 여유가 없어지면 우리 과에 도움이 될 일이 없어. 진충기 너도 오랜 기간 제자리를 맴돌아야 돼.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시간만 늦춰질 뿐입니다. 언젠가는 터지게 돼 있습니다. 그땐 우리 모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선생님, 지금 이 순간부터 원칙대로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적절한 때를 찾는다고 뒤로 미루면 결국 개선하지 못합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선생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최인호 교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미 원하는 자리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인 시연을 빼앗겼다. 성황리에 치러진 시연을 보며 치욕에 몸을 떨었고, 병원 이사들의 시선도 예전 같지 않았다. 만일 실적까지 감소한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차 목표인 병원장을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잡음까지 생기면 완전히 물먹는다. 그렇다고 무시했다가 터트리기라도 하면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당할 수 있어. 어떻게 해야 할까?’
노골적으로 나가면 격하게 반발할 진충기였다.
복강경 센터 교수 관리를 전적으로 맡겨 온 탓에 집단행동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결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속내와는 달리 겉으로는 일단 한발 물러서야 할 때였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대처하며 강한 압박을 가하면 진충기도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진충기, 오창도를 보면서 이딴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병원장으로 끝낼 거라면 모를까, 더 큰 자리를 보고 있는 이상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내 말을 듣든지,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거야. 널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
깊은 고민에 잠긴 것처럼 잠시 시간을 끌었다. 씨익 웃음까지 머금었다.
“진충기, 말 잘했다. 나도 사실은 찜찜했어. 네 말대로 시대가 변하고, 언제 문제가 될지 모르는데 고집할 이유가 없겠지. 나도 일정을 조정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일단 기다려.”
“그럼 결정하신 겁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단, 다른 교수들에겐 아직 말하지 마. 확실하게 정리하고 시행해야 불필요한 힘을 안 쓰는 법이야. 목소리 높일 문제가 아니었는데 오창도 때문에 흥분했다.”
내친김이었다.
“선생님, 오창도 선생 문제도 고려해 주십시오.”
못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말이 나왔고, 면접조차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쯧! 정히 그렇다면 해결해 주지. 네가 먼저 나선 탓에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고 있어. 명심해.”
의외로 쉽게 결말이 났다.
내심 반색하던 진충기가 콧등을 찡그렸다.
말끝에 붙은 단서에 최인호 교수가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아예 결정을 바꿀지도 몰랐다.
‘어쨌든 잘됐어.’
이렇게 하나둘 고쳐 나가면 복강경 센터가 가진 잠재력을 모두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연연했던 자리 욕심마저 버린 이상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만을 향해 달리는 일만 남았다.
“감사합니다.”
진충기의 목소리에 활기가 실렸다.
홀로 남은 최인호 교수의 표정이 백팔십도 변했다.
잠시 후, 의무 기록실로 가 자신이 수술한 환자 차트를 무작위로 뽑아 확인했다. 대리 수술의 증거가 될 만한 단어나 기록이 있는지 일일이 살폈다.
‘이런 일이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 미리 대처하길 잘했군.’
집도의는 오직 최인호 자신의 이름뿐이었다.
진충기를 비롯해 모든 써전들은 퍼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대리 수술을 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자신의 일이 아니다. 누구든 목까지 걸어 가며 나서지 못할 것이다.
‘진충기 감히 네가 반기를 들어? 오창도, 사실 넌 신경 쓸 이유도 없지만 덕분에 S 병원과도 끈이 단단해졌어. 어쨌든 손안에 있던 놈들이 너무 벗어나면 앞으로 편치 않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릿한 코웃음이 터졌다.
***
진충기를 만난 지 불과 사흘 만에 오창도의 정식 면접 날이 결정됐다. 뛸 듯이 기뻐하던 오창도가 한 통의 전화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과 함께 넷이 만나자고? 긴하게 할 말이 뭐지?’
빠르게 약속을 잡았지만 모두 일복 만만치 않은 써전들이다. 다들 피곤이 역력한 얼굴로 밤 11시가 넘어서야 볼 수 있었다.
전보다 더 늦었다.
모두들 이러저런 이유로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신현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진충기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오창도 선생 면접이 결정됐으니까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전에 말한 대로 모두 해결됐습니다. 대리 수술 문제까지요.”
김지훈이 반색했다.
올바르게 운영한다는 소리만큼 기쁜 말은 없었다. 아울러 마지막 방법인 서정호와 정훈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얼굴 마주 보면서 말하는 것도 좋겠지. 정말 잘됐다.’
“잘됐네요. 혹시 앞으로 또 뵐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척 피곤해 보이셔서 상당히 부담스럽네요.”
“하하하! 김지훈 선생이야말로 그럴 말씀을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은 아니죠?”
웃음소리가 정말 즐겁게 들렸다. 불쾌했던 예전 기억이 희미해지며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둘 다 학술 임원이다. 친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보다 발전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만 하려고 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충기가 이내 얼굴을 굳히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결심했다는 듯 곧바로 자리를 주선한 진짜 이유를 말했다.
“두 분 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창도 선생 임용 건에 관한 일입니다.”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문제가 또 있습니까?”
“우리에게 문제라면 문제가 분명합니다. 복강경 센터에 정말 필요한 인재가 다른 병원에 갈 판입니다. 내가 가진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일일 수도 있지만,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은근히 목이 말라 왔다.
“그래서요?”
“오창도 선생과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최인호 선생님도 반쯤 허락하셨습니다. 오창도 선생과 단둘이 만나 얘기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함께 얼굴 보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지훈이 멀뚱멀뚱 진충기를 보았다.
“그러니까 오창도 선생님을 다시 H 병원 교수로 임용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오창도 선생, 정말 면목 없지만 전에 말한 것처럼 돌아왔으면 좋겠다. 한 교수를 비롯해 모두들 오 교수를 기다리고 있어.”
아예 오 교수라고 불렀다.
신현수가 펄쩍 뛰었다.
“이제 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정식 면접 보시고 임용되시면 우리 병원에서 일하셔야 합니다. 이거야말로 도리가 아닙니다.”
김지훈이라고 다를까?
정말 함께 일하고 싶은 써전이었다. 더구나 가장 일손이 부족한 간담도 지원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위해서 반드시 잡아야 했다.
“진충기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되죠. 예의가 아닙니다. 오창도 선생님, 설마 흔들리시는 건 아니겠죠? 이준영 선생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