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람은 왜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할까? Ⅱ (1)
진정 상상도 하지 못한 변화였다.
무엇이 계기인지 몰라도 시연 이후인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S 병원의 능력과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문득 눈이 시뻘게지도록 함께 수술한 김지훈이 떠올랐다.
진충기가 그랬었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지금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넘어 선도하는 위치가 됐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함께 발전한다면.’
S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어느 병원에도 남지 못한다고 한들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소태 씹는 것 같았던 밥이 유난히 달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떤 결정이 나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옛 동료들의 활기찬 웃음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불현듯 참을 수 없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S 병원이든 어디든 남고 싶다. 이런 써전들과 평생을 함께하며 목표를 이뤄 나가고 싶다.’
일반외과를 선택하며 가졌던 목표와 열망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갑자기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진충기가 입술을 모았다. 묘한 눈초리로 한동안 오창도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이렇게 나온다는 건 S 병원 교수님들이 모두 오창도를 탐내고 있다는 말이겠지? 난 왜 오창도가 얼마나 멋진 써전임을 미처 몰랐을까?’
늦었지만 올바른 길을 찾아가고 있다.
오창도에게 갚아야 할 빚도 남았다.
‘내게 그런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진한 아쉬움과 후회가 진충기의 눈가를 떠돌았다.
만나자고 한 사람이나 응한 사람이나 모두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하루 일과를 최대한 빨리 마치고 약속 장소에 모였지만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정말 어렵게 3명의 써전이 얼굴을 맞댔다.
시연 전에, 혹은 시연 중에 만남은 만남이라 할 수 없었다. 명실상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써전들이기에 진작 만들었어야 했다.
중요한 문제를 앞둔 지금이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아야 할 자리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양 병원 일반외과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갑자기 살가운 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술의 힘을 빌릴 자리도 아니었다.
어색함 속에 대화가 시작됐다.
오창도 임용이 지연되는 이유를 듣던 진충기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S 병원 내부의 반대는 좋은 기회였고, 원하던 바였다. 오창도의 긍정적인 반응까지 감안하면 상황이 급변하지 않는 한 유리한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오창도를 쫓아내려고 만든 핑계가 결격 사유가 되고, 이제는 도리어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 되다니 세상 참 묘하네. 임용이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최인호 선생님만 설득하면 되는 건가?’
최대 난관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진충기 자신에게서 비롯됐다. 진심으로 잘못을 구하면 최인호 교수도 복귀를 허락할 것이라 믿었다.
내심 반대가 더욱 심해지기를 바랐다.
달콤한 상상도 잠시.
단 한마디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진충기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최인호 선생님이 관여하고 있단 말입니까?”
“확실합니다. 해결하실 수 있겠습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표현조차 하기 힘든 감정에 입을 열지 못했다.
절대 거대 종합 병원 일반외과 과장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신의 스승이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실망감에 가슴이 꽉 막힌 진충기가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최인호 교수의 숨겨진 이면을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까지 일었다.
현실적으로 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충기가 도리어 물어 왔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원하는 바는 단 한 가지다.
“오창도 선생님 임용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가능하시겠습니까?”
“말씀은 드려 보겠지만…….”
말꼬리를 흐렸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엉클어진 탓이었다.
신현수가 재차 물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여전히 미진한 대답이었다.
곤란함을 모면하고자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선의로 정확한 실적을 보냈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진충기의 입장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흐릿하게 처리하면 만나지 않는 것만 못한 자리가 될 것이다.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변했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충기 선생님, 설마 이번 일이 최인호 선생님에게만 국한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무슨 말일까?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진충기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김지훈이 오창도와 있었던 일을 모를 리 없었다. 지난 일이 꼬리를 무는 순간 죄책감에 이어 왈칵 서늘함까지 다가왔다.
‘내가 시작한 일이야. 소송을 핑계로 껄끄러웠던 오창도를 쫓아내고, 다신 병원에 발을 못 붙이게 하려고 한 놈이 바로 나였어. 결코 최인호 선생님을 탓하며 책임을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잘못을 두고 유리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꼬인 매듭을 풀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진충기의 눈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책임지겠습니다.”
단 한마디였지만 진심이 들어 있었다.
열 마디 말보다 믿음이 갔다.
신현수도 같은 생각이 드는지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하면 역효과만 초래할 것이다.
단, 끝이 아니다.
부당함과 부당함이 꼬리를 물고 있다면 남김없이 깨 버려야 모든 일이 순리대로 굴러갈 것이다. H 병원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일반외과만이 아니라 의료계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의 눈길에 신현수가 강수를 꺼내 들었다. 이혁민 교수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문건을 본 김지훈의 눈빛은 더 단호했다.
대리 수술 문제다.
진충기가 크게 당황했다.
“실적 문건을 보낸 이유는 오로지 오창도 선생 때문입니다. 일이 확대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혁민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판단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혁민 선생님은 부분적인 공개조차 만류하셨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인호 교수님의 행동은 옳지 못합니다. 임용 방해가 시작이긴 하지만, 대리 수술 문제 역시 묵과할 수 없습니다. 우리 과만이 아니라 의료계 전체에 큰 피해를 초래할 겁니다. 솔직히 선생님도 실적 부풀리기를 위해 대리 수술을 자행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진충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김지훈이 한마디 더 보탰다.
“아직은 이혁민 선생님과 우리 둘까지 단 세 명만 알고 있습니다만, 최악의 경우 공론화시킬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진충기가 연거푸 답답한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들킨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도 없다. 그러나 생각이 변하는 순간 현실을 보고, 판단하는 눈도 변했다.
부당한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죄책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대리 수술은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문건을 보낼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일이 아니다. 우리를 궁지에 몰고 싶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 병원의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진충기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해결할 수 있다고 대답해도 될까?
김지훈을 보는 순간 스카우트 조건이 떠올랐다. 최인호 교수의 의도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영달과 명예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 복강경 센터 의사들을 모조리 물갈이할 수도 있었다. 칼자루를 쥐지 않은 이상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책임지는 사람은 나 혼자로 충분해.’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고 해도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목을 걸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인호 선생님과 말씀 나누겠습니다. 오창도 선생 일은 물론 대리 수술까지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고 확실하게 해결하겠습니다.”
“기한이 얼마 없다는 것은 아시죠?”
이혁민 교수가 요청한 기한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최인호 교수의 방해가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그 안에 어떻게든 설득해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김지훈과 신현수는 물러설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이 모든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최인호 선생님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는 게 맞겠지.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래야 내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번 일주일에 우리 운명이 달린 건가?’
과한 생각이 아니었다.
정식 면접조차 보지 못한다면 대리 수술 문제까지 터질 것이다.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충분했다.
이제 자리를 파할 시간이었다.
진충기가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한마디 툭 던졌다.
“진충기 선생님, 모든 문제를 다 떠나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얼마 전에 좌측 간 전 절제술을 성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주제넘은 소리지만 정말 이기고 싶은 써전이 한 명 더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진충기가 순간 걱정과 시름마저 잊고 피식 웃고 말았다. 같은 의사라고 해도 한참 후배에게 들은 말이건만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훈아, 어떻게 될 것 같아?”
김지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말을 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어려운 일 아니다. 최인호 교수 생각만 바뀌면 되는 일이야. 오창도 선생님 인정하고, 대리 수술 안 하는 게 힘든 결정이 아니잖아?”
신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잘못을 말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생각해 보니 무척 간단한 일일 수도 있었다.
***
S 병원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진충기와 나눈 대화를 들은 이혁민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지만, 신현수는 한 소리 단단히 들어야 했다.
“신현수, 분명 비공개라고 했는데 지훈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좋은 뜻을 가졌다고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조곤조곤 다져지는 모습을 보는 김지훈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럴 때는 우정이고 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신현수의 따가운 눈빛만 견디면 된다.
“오늘따라 이혁민 선생님이 상당히 잘게 다지시네. 많이 아팠겠다. 파스 사 줄까?”
위로와 함께.
임용 건만 숨을 고를 뿐 일상은 여전히 숨 가쁘기만 했다. 김지훈에겐 점점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있었다. 몸 힘든 것은 이겨 낼 수 있었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펠로우를 뽑아도 한동안 가르치느라 시간을 뺏길 게 분명해. 경아 씨 일 덜어 주고, 우리 딸 커 가는 걸 보기 위해서라도 오창도 선생님이 꼭 와야 돼.’
고경아와 희연이 얼굴이 시시각각 눈에 밟혔다.
H 병원도 숨 가쁘게 일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충기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모두 머리를 맞대면 좋겠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피해를 우려해 한 교수와 단둘이 상의했다.
그마저도 모른 척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고, 한 교수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최인호 선생님을 우리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나?’
진충기와 최인호 교수가 자리를 가졌다.
말도 꺼내기 전에 눈가부터 가늘어졌다. 듣기 좋은 말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변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문제가 되곤 하지. 내가 허용하는 선 안에서만 움직여.’
최근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는 일이 아니기에 지켜볼 뿐이었다. 진충기만 손에 꽉 잡고 있으면 문제 될 일도 없었다.
“진충기, 무슨 일이야?”
위압적인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를 잊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했던 진충기가 움찔거렸다.
복강경 센터의 전권을 움켜쥔 실력자이자 스승으로 모신 교수다. 자신도 그에 편승해 알량한 힘을 과시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간 저질러 온 잘못을 얘기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로서 말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죄책감, 자책감, 입조차 열기 힘든 어려움까지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강한 긴장 속에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낀 진충기가 훅! 숨을 내쉬며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다.’
최근 변화를 모를 최인호 교수가 아니었다. 빙빙 말 돌려 봐야 상황만 갑갑해진다.
진충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