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람은 왜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할까? Ⅰ (2)
진충기는 H 병원의 변화를 이끌 것이다. 광범위한 일일 수 있다는 말 덕분에 대리 수술에 대해 더 큰 경각심도 갖게 됐다.
“앞으로 대리 수술은 없다는 말이겠죠?”
“진충기가 부센터장이잖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없을 것으로 봐야겠지만 모르는 일이다. 뭐가 모자라서 대리 수술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후우! 문제 생기면 한두 사람 책임으로 끝날 일이 아닌데 걱정이다.”
이혁민 교수가 시름에 가까울 정도로 탄식했다.
자칫 H 병원은 쑥대밭으로 변하고, 일파만파로 커질 수 있었다. 다 같은 일반외과 의사에 누군가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했다.
이래저래 어려운 사안이었다.
문득 떠오른 정훈철과의 대화를 전하려던 신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거나 입이 빠르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었다. 가뜩이나 바쁜 이혁민 교수에게 무거운 짐을 또 얹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리 수술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나저나 오창도 선생님은 어떻게 하지?’
문건으로 말미암아 오창도가 여러모로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라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원로라면 모르지만 진충기 개인의 의견이 통하기에는 녹록지 않았다.
문건을 제시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극심한 인력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펠로우 보강도 중요하지만, 매일 매 순간 교수 자원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완강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몇몇 인사 위원과 이사들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의심되는 구석이 있었지만 직접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이혁민 교수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짐작되는 바가 없으십니까?”
“있긴 하지만 짐작만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내가 의심하는 일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함부로 꺼낼 말이 아니었다. 자칫 전체 일반외과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내부의 강력한 힘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이 과장, 오창도 선생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자.”
“이 과장, 아까운 인재다.”
모든 교수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원장님, 과장님, 항상 든든한 허리가 있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적절한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마저 강력한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오창도가 임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설득할 시간이 적지 않았다.
이혁민 교수가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신현수 역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인사 위원들을 만났다. 이사장 아들이라는 사실을 등에 업고 주제넘게 나선다는 삐딱한 시선이 있었기에 매 순간 열과 성의를 다했다.
진심은 결국 통하는 법이다. 진솔한 말과 호소에도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던 일부 위원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한두 명을 남기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사장님 아들이 아니라 앞으로 병원 운영을 책임질 사람으로 봐야겠어. 침착하면서도 명석해. 오창도 선생이 누군지 모르지만 다른 문제로 발목 잡을 일은 아닌 것 같군.’
누군가를 진심으로 인정하면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마음을 돌린 인사 위원 중 한 명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우리가 반대해서 서운했어?”
“솔직히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임용에 찬성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참 묘해. 한 번 틀어지면 모르는 것만 못할 수도 있어. 최인호 교수 알지? 소송부터 양 병원의 관계, 자신의 입장까지 내세우며 은밀하게 연락해 오고 있어. 자기가 쫓아낸 의사를 경쟁 병원에서 뽑는다는데 기분 좋을 리 없잖아?”
신현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던 의심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이해해야 돼. 나야 신현수 선생 때문에 마음을 바꿨지만, 최인호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엉뚱한 의사를 교수로 임용한 우리 입장도 곤란해져. 반대라면 최인호 교수도 능력 있는 의사를 확보하지 못한 꼴이 되잖아. 질책받을 수 있는 일이야. 앞으로 병원 경영을 하게 될 텐데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봐. 당장 교수 한 명 없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
“정말 그 때문입니까?”
“설마 그것뿐이겠어? 결격 사유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막말로 찬성했다가 문제 생기면 누가 책임져?”
신현수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사람 뽑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기에 많은 면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최인호 교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대를 표명한 인사 위원들이 보인 미묘한 기류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이게 의료계를 대표할 수 있는 병원의 일반외과를 책임진 교수가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은근한 분노를 머금고 김지훈과 상의했다.
정식 면접이 연기될 때부터 불만을 꾹꾹 눌러 참았던 김지훈이었다. 최인호 교수에 대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펄쩍 뛰며 얼굴을 붉혔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 사람을 봐야지, 사람을. 인사 위원인지 이사인지 몰라도, 그 사람들 말속에 오창도 선생님은 어디 갔어? 함께 일한 사람의 평가가 쏙 빠졌는데, 어떻게 임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거야?”
“흥분하지 마.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할 얘기가 더 있어? 뭔데?”
아예 난리가 났다.
얼굴이 시뻘게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복강경 센터를 맡고 있는 과장 맞아? 어떻게 자신의 체면을 위해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를 버릴 수 있지? 그런 사람 말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휘둘렸단 말이야? 말도 안 돼. 후우! 정말 화가 난다. 으아악!”
씩씩거리며 가슴을 텅텅 쳤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잠시도 앉아 있질 못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돌연 눈을 번쩍였다. 눈빛 자체가 변했다.
“예전에 H 병원 대리 수술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고 했지? 혹시 추가로 알아낸 사실 있어?”
아직 진충기가 보낸 서류의 존재를 모르는 김지훈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함구령도 풀리지 않았다. 말을 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은 신현수가 얼버무렸다.
“그건 별개의 문제 아닐까?”
김지훈이 강하게 손을 저었다.
“별개가 될 수 없어. 결국 최인호 교수를 중심으로 엮이고 엮인 일 아니야? 게다가 이제는 우리 일이기도 해. 다른 병원과의 관계를 생각한다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도 언젠가는 원칙을 버리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너하고 나하고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거야말로 우정과 별개의 문제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구구절절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오창도 임용을 위해서는 최인호 교수를 넘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대리 수술 건 이외에 다른 고리가 없었다.
만일 대리 수술 문제를 터트린다면?
최인호 교수만 관련된 일이 아니다. H 병원 복강경 센터가 쑥대밭이 되고도 남을 문제였다.
확실하게 변한 진충기, 진정한 일반외과 써전인 오창도, 윗사람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대리 수술을 한 의사들까지 피해가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의료계는 군대처럼 상명하복이 강한 사회다. 하라면 해야 하고, 반항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었다.
한 사람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주도적으로 저지른 일을 똑같은 무게로 책임지는 것 역시 옳은 방향이 아닐 수 있었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최인호 교수 잡고, 오창도 선생님과 함께 일해야지.”
김지훈의 눈빛이 으스스하게 변했다.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정말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기에 부탁할 각오가 섰다.
‘결국 최인호 교수가 핵심이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처리 방향이 있어야 돼. 최대한 피해 범위를 줄이려면?’
“현수야, 우리 처형네 형님이 검사인 거 알지?”
“서정호 검사님?”
“기억하고 있네. 훈철이 형님과도 친하셔. 두 분께 상황을 말씀드리면 해결책이 나올 거야.”
“너무 과한 거 아닐까? 진충기 선생도 변했는데 최인호 교수 역시 변할 수 있잖아?”
그럴 수도 있다.
최인호 교수 또한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똑같은 일을 당했을 테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똑같은 일을 강요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실력과 능력만을 놓고 보면 일반외과 중추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도의적인 문제가 남겠지만 변한다면, 최소한 개선할 의지를 보인다면 지난 잘못 이상으로 의료계에 큰 공헌을 할 사람이었다.
김지훈이 쓴 입맛을 다셨다.
“오창도 선생님 문제를 생각하면 솔직히 기대할 게 없지만,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형님들께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지. 먼저 진충기 선생부터 만나자.”
“진충기 선생을?”
“진충기 선생이 변한 건 인정할 수 있잖아. 현실적으로 최인호 교수와 말이 통할 유일한 사람이야. 어떻게든 주변에 피해 없이 일을 마무리하려면 진충기 선생이 나서야 돼.”
“가능할까?”
누구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최인호 교수가 내게 부센터장 자리까지 보장했어. 진충기 선생도 버릴 수 있다는 의미라면 아예 말이 안 통하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어쨌든 변하지 않으면 퇴출시키는 것이 맞아. 다른 병원 일인 만큼 우리는 그 근거를 확실하게 찾아야 돼.”
때론 다혈질이면서, 때론 무척 논리정연하기도 한 김지훈이었다. 현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 선생, 둘은 지금 어떤 관계일까?’
의문도 잠시, 신현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내일 진충기 선생에게 연락할게. 네 말대로라면 누구보다 절박하니까 바로 약속 잡을 수 있을 거야. 정훈철 형님과 서정호 검사님은 상황 보고 만날지 결정하자.”
오창도 임용 문제가 의외의 곳으로 번지며 급박하게 변했다. 최인호 교수가 반드시 도려내야 할 썩은 살인지, 아니면 살릴 수 있는 살인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날 저녁.
진충기가 오창도를 만나고 있었다.
한 교수를 비롯해 복강경 센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들까지 모여 있었다.
“왜 절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임용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어?”
전과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오창도 역시 진충기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확실하게 파악된 실적을 이혁민 교수에게 보냈다는 말까지 들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고 있어?”
그것이 의문이었다.
이혁민 교수는 지금도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소송 문제는 물론 실적 부분까지 해명됐는데 무엇 때문에 면접조차 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진충기가 콧등을 찡그렸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거나 일단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오창도 선생, 이 시점에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우습겠지만 만일 S 병원 임용이 무산된다면 다시 돌아와.”
“복강경 센터로요?”
“그럼 어디겠어?”
변했다지만 쫓아냈을 때 이미 앙금이 쌓이기 마련이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이제 와 돌아오라니,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지 오창도가 입을 열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거야. 솔직히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모두 오창도 선생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어.”
“선생님까지 말입니까?”
“나도 바라.”
“이유가 뭡니까?”
진충기의 눈이 매서워졌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어.”
“언제나 하던 말 아닙니까?”
“그랬지. 그런데 이제야 올바른 방법을 찾았어. 나 혼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거지. 한 교수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함께 갈 때만 가능한 일이야.”
사람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 걸까?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오창도 선생, 이번에 좌측 간 전 절제술을 확실하게 해냈다. 수술 전 준비부터 함께했고, 수술 중 호흡이 척척 맞는 순간 깨달았어. 함께해야 할 사람 중 반드시 있어야 할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실력 있는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오창도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입니까? 결국 선생님의 욕심을 위한 말 아닙니까?”
“부인하지 못해. 난 아직도 야심이 있고, 기필코 김지훈을 이기고 싶어.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싶어서 잠도 못 잘 지경이야. 단, 예전처럼 혼자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진충기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오창도 선생에게 부탁을 하고 있어. 나와 함께 최고의 써전이 되자고, 김지훈과 S 병원을 누르고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자고 말하는 거야.”
한 교수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오 교수, 나도 예전처럼 함께 일하고 싶어. 우리 모두 오 교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제야 알았어. 고맙고 미안해.”
“선생님,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면접까지 못 보시는데 그냥 돌아오시죠. 요새 진충기 선생님과 정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정이란 놈은 무서웠다.
오창도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최인호 교수가 있는데 가능한 일일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최인호 선생님이 먼저 허락을 해야겠지만 우리 모두 요청한다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고민해 봐. 난 예전에도 지금도 진충기지만, 달라지려고 애쓰고 있어.”
돌연 진충기의 눈에 열망이 가득 찼다.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 단,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하면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은 약속할 수 있어.”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진충기만이 아니라 H 병원 복강경 센터가 변해 있었다.
그러나 감정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는 말에 동의했다면 그것 또한 약속이었다.
“S 병원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말만으로도 불같이 화냈을 진충기였다. 그런데 일말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웃고 있었다. 자신의 목표를 잃지 않으면서 동료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진정성이 보였다.
‘전공의 때 본 모습이야. 다시 돌아오신 것 같네.’
“고맙다. 기다린다. 내 잘못을 기억하고 언제든 쓴 말을 할 수 있는 오창도라는 의사가 꼭 필요해.”
오창도가 물끄러미 바닥을 보았다. 마지막 말에 무엇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