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람은 왜 손에 잡은 것을 놓지 못할까? Ⅰ (1)
다음 날 아침, 7시.
오창도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지난밤 응급실 상황을 확인한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신현수 역시 눈만 껌벅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단연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일 당하면 훨씬 더 피곤한 법이다. 교수실에서 자고 있다는 박승준 교수에게 오늘의 사태는 아마도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어제 응급 수술이 세 건이나 있었네요.”
“환자 없을 거라고 장담을 하셨는데, 혹시 박승준 선생님이 두 분이신가요?”
의외로 진지한 물음에 할 말이 없었다.
불현듯 미묘하지만 평소보다 꽤 힘들게 느껴졌던 지난주가 생각났다. 잠투정 많은 딸과 휴가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원흉은 따로 있었을지도 몰랐다.
‘설마 오창도 선생님 일복도?’
입 밖으로 내면 상상이 현실로 변한다.
오늘 당직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감추고 어영부영 넘어갔다.
바쁜 하루 일과에 지워졌던 생각이 저녁 어스름부터 슬금슬금 뒤통수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오창도와 함께 응급실로 내려갔다.
본격적인 당직 시작이다.
전통의 강자 때문인지, 신흥 강자가 나타난 때문인지 하룻밤이 지나면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예뻐지는 딸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순식간에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출근한 송재덕 교수가 두리번두리번 누군가를 찾았다. 이준영 교수도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현수야, 교수야, 지훈이는 어디 갔니? 어디.”
“수술 중입니다.”
“수술? 요새 이런 적 없었잖아? 밤에 쉬었나 보구나. 밤에. 어디 보자. 어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인수인계를 하는 간호사의 눈가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까맣게 변해 있었다. 수술 방 간호사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응급실 보고가 끝날 무렵, 김지훈이 허겁지겁 응급실 문을 열었다. 뒤따라 들어서는 오창도의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둘 다 거의 정신이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다들 입맛만 쩝쩝 다셨다.
교수들이 외래로 올라가자 신현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창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오늘따라 김지훈의 모습 또한 난장판이었다.
“지훈아, 괜찮아?”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아무 말도 하지 마. 이건 결코 내 일복만이 아니야.”
놀아도 힘든데, 연 이틀 긴장의 연속인 수술로 밤을 샜다. 피 곤죽이 돼 후들후들 다리를 떨고 있는 오창도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오창도 선생님, 일복 많으시죠? 솔직히 말하세요.”
“솔직히 전공의 때는 제법 욕먹었습니다만, 전문의 돼서는 남들과 똑같았습니다. 이건 결코 제 일복이 아닙니다.”
박승준 교수 당직 날은 어떻게 설명할까?
극구 부인했지만 결과가 말해 주고 있었다.
끼리끼리 만나 똑같은 일을 하면 가공할 시너지 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김지훈의 일복이 숨겨져 있던 오창도의 일복을 깨웠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생님, 정식으로 임용되시면 당직 같이 서는 사태는 없겠죠? 혹시 초반에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선생님과 저는 쳐다보지도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그게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살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확신할 수 없고, 임용 전까지 확인할 방법도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이 없었다.
누가 진정한 강호인지는 다음 기회에!
또 한 번의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미친놈이라고 절규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건만.
‘이번 주는 집도한 적이 없으니까…….’
교수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 시기가 아니었다. 밤 꼴딱 새며 퍼스트 몇 번 섰다는 죄 아닌 죄로 살벌하게 탄 오창도가 혀를 빼물었다.
그래도 좋았다.
지난주 수술한 환자들 모두 무사히 퇴원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 역시 어느 정도 충족됐다. 정식 면접까지 확정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치열했던 2주간의 근무가 끝났다.
“다음 주 면접 보실 때 꼭 들르세요. 그날 식사 같이하기로 했으니까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그간 미뤄 왔던 식사 약속까지 잡았다. 모두들 기분 좋게 퇴근했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즐거운 주말이다.
토요일은 잠으로 시작해 잠으로 끝냈다.
일요일에는 집 당직을 섰다.
포동포동한 희연이를 보는 순간 돌연 소름이 돋았다. 키도 큰 것 같고, 어째 몸무게도 늘은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두 달이네. 전 주부터 이번 주까지 우리 딸 깨어 있는 걸 몇 번이나 봤지? 더 이상은 안 돼.’
외과 의사, 혹은 인원 부족으로 일에 지쳐 사는 의사들의 비애다. 일복 터지는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딸을 가진 일반외과 의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늘한 가슴을 안고 한 주를 새로 시작했다.
모닝커피 향에 취해 있던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절차적으로도, 근무 평가로도 아무 문제도 없었건만 갑자기 오창도의 면접 일정이 취소됐다.
주말을 기점으로 일부 인사 위원만이 아니라 이사 중 몇몇까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확실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 소송.
상이한 두 장의 근무 평가서.
부실하다고 해도 무방할 H 병원 실적.
갑작스럽지만 이해하지 못할 상황만은 아니었다.
내용을 상세하고 알고 있는 사람도 경우에 따라 문제 삼을 수 있는 일이 소송이었다. 더구나 인사 위원들은 교수 임용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기에 더욱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의료 과실에 관한 소송은 한 번 걸리면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당장은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도 막말로 수틀리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될 겁니다. 다른 병원에서 발생한 일로 우리가 피해를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상이한 평가는 결국 의사로서 갖춰야 할 실력이나 품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고작 2주간의 평가로 H 병원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몇 개월 후에 펠로우 선발이 있으니까 무리하지 맙시다.”
“실적 문제도 그렇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말씀하시지만 단기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장기간에 걸친 실적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H 병원에서 소송을 책임지지 않는 이유도 부실한 실적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반박하기 쉽지 않은 지적이었다. 그러나 오창도는 이미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고, 교수들은 꼭 필요한 인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였다. 이제 와 갑자기 입장이 돌변한 점도 석연치 않았다.
“지금까지 별말 없더니 주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건 아니다. 사람을 서류만으로 보려면 면접은 왜 해? 오창도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봤잖아. 최소한 기회는 줘야 돼. 인사 위원들 눈 똑바로 달려 있고, 정신 똑바로 박혀 있으면 면접 진행하고 임용시켜야 해. 이 과장,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힘써야 할 때다. 지금이.”
단단히 화가 난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과장, 놓치기 아까운 인재가 아니라 놓쳐서는 안 되는 인재야. 이 상태로는 우리 과 역시 버티지 못해. 우리에게도 절실한 일이야.”
이준영 교수 역시 말이 길어질 정도로 단호했다.
오창도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교수들, 특히 김지훈을 비롯해 전임들의 과도한 업무량을 덜지 못하면 필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눈빛을 보였다.
일반외과 전체의 뜻이 모였다.
월요일 저녁, 급박하게 소집된 인사 위원회에 참석한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강하게 반발했다. 상이한 의견이 충돌하며 확정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일부라도 반대를 굽히지 않는다면 임용은 불가능합니다만, 일반외과 교수님들의 의견은 절대 배제할 수 없습니다. 수요일에 회의를 재개하겠습니다.”
신상민 교수의 중재로 일말의 희망이 남았다.
상황은 우호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회의가 벌어질 때마다 격론이 오갔다. 무슨 이유인지 인사 위원들 몇몇이 도통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창도를 직접 만나야 했다.
정식 면담 날짜까지 받았건만 연기 통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말은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이혁민 교수의 얼굴은 난감 그 자체였다.
“오창도 선생, 상황이 많이 꼬였지만 우리는 임용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 딱 2주일만 기다려 주면 안 되겠나? 정말 미안하다.”
지원 전에 이미 자신의 결격 사유를 알고 있었던 오창도였다. 면접이 연기된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떤지 모를 수 없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하겠지만, 저 때문에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이 훌쩍 지나 어느새 10월 중순이다.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는데 상황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신동철 이사장 역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잡음이 심한 인사에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무산되는 것일까?
때론 인연만큼 안면이 주는 부담도 큰 법이다.
오창도는 짧은 기간 얼굴을 맞댄 외부 사람이다. 반면 인사 위원이나 재단 이사는 오랫동안 봐 왔고, 은퇴한 이후에도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환자 치료를 담당하기에 어느 조직보다 안정적으로 굴러가야 할 곳이 바로 병원 사회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내부 균열까지 초래될 수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적극적으로 오창도의 임용을 추진했던 신현수도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현수야, 이렇게까지 무리해 가면서 임용할 사안은 아니다. 내도 훌륭한 인재 놓치는 것 같아서 많이 아쉽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일주일 남았지만 연락해 주는 것이 좋겠다.”
“결격 사유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소송은 왜 해결이 안 되는 걸까? 진충기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 않았어?”
극도의 실망감을 드러낸 송재덕 교수마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일반외과 구성원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려는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진충기가 한 통의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누구 입을 통했는지 오창도의 교수 임용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장님, 그동안 제가 물의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창도 선생 문제도 제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우리 병원의 주축이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주제넘지만 교수 임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저뿐만이 아니라 함께 근무한 동료들 모두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진충기 선생, 마음은 고맙지만 늦었다. 소송이 확실하게 종결되고, 최인호 교수의 평가가 바뀐다고 해도 어려운 상황이야.”
(소송 문제는 책임지고 이번 주 안에 확실하게 해결하겠습니다. 화가 많이 나신 상태라 당장은 어렵지만 최인호 선생님께도 최대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있다. 뒤늦은 진충기의 연락이 이혁민 교수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그만둔 사람인데 이제 와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있을 때 잘해야지. 나도 입장이 보통 곤란한 것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제가 받아야지 절대 오창도 선생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진충기의 진심 어린 변화가 확연하게 전해지는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없었다. 통화 직후 답답한 한숨을 내뱉던 이혁민 교수 앞으로 몇 장의 서류가 전달됐다.
단단하게 밀봉된 서류 봉투 속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내용이 들어 있었다.
막연하게 들었던 의심이 실제로 확인되는 순간은 일종의 충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현수, 오창도 선생이 제출한 서류와 실적 부분에서 많이 다르지? 우리 생각보다 대리 수술이 많았던 모양이야. 진충기야? 최인호 교수야? 하여튼 이런 자료를 보낼 정도라면 진충기의 진심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한다. 어떻게 생각해?”
“정말 뜻밖입니다.”
일거에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도 있는 문건이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대리 수술은 오창도에 국한된 사안일 수가 없었다.
일반외과 학회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이혁민 교수였다. 문건에 담긴 거대한 폭발력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내도 그렇다. 마음은 알겠다만, H 병원 문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문건이라 인사 위원회에 제출은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자료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간수 잘해라. 우리 과 교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제출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일은 반드시 고쳐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만일 문건이 외부로 새어 나갈 경우 H 병원 일로만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 잘못된 일이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의료계 전체가 매도당할 수 있는 일이야. 막말로 우리 병원은 모든 과가 자유로울 것 같나? 진충기도 일이 확대되기를 원치는 않을 거다. 때론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무척 중요할 때가 있다. 고민 좀 해 보자.”
세상은 이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벌어지는 일이 이혁민 교수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젊음을 앞세운 신현수에겐 불만스러운 말이었지만, 막상 샅샅이 뒤지면 S 병원도 유사한 일들이 있을지 몰랐다. 무작정 뜻에 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