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해 온 만큼 되돌려 받는다 Ⅲ (2)
김지훈의 당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방심하면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전화기에 눈길 주고, 행여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네. 응급 두 건 했으니까 쭉 조용했으면 좋겠다. 어이쿠! 벌써 2시가 다 됐네. 이젠 퇴근해도 되겠지?’
두 번째 당직 날이었다.
일복 터진 김지훈이라도 어느 정도 소진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믿고 싶었고,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만 해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땡! 1층 문이 열리는 순간.
왜애애앵! 왜애애앵! 삐뽀! 삐뽀!
돌연 온갖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급한 발소리, 간이침대 끄는 소리, 환자들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 고함을 치듯 오더를 내는 전공의들의 목소리까지.
단체 교통사고였다.
줄줄이 환자가 이어지면 일반외과 환자 한 명 정도는 꼭 있기 마련이었다. 오창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오늘의 당직 의사를 보았다.
‘이게 일복으로 설명되는 상황인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도대체 이번 주에 수술을 몇 개나 들어간 거지? 이준영 선생님만 12개에 김지훈 선생은?’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20건에 육박했다.
이틀간의 당직이 예외적이라고 했지만 한 달이면 무려 7~80건에 가깝다는 계산이 나왔다. 실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수술 수였다.
진충기가 한창 칼바람을 날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메이저 수술이 두 건이나 있었다. 만일 매주 췌장암이나 간암 등 메이저 수술 하나는 꼭 벌어진다면 경악에 가까운 수술 수였다.
가히 상상 초월이었다.
김지훈의 표정으로 봐서는 특별한 주가 아니었다.
최소 삼사 년 이상, 결국 교수가 된 이후 내내 이렇게 살아왔다는 말일 것이다. 살인적인 업무를 버텨 내는 김지훈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전공의 때까지 계산하면 도대체 몇 년이야?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다. 오늘 수술을 세 건이나 한 덕에 한결 덜 피곤했는데 다시 시작인가?’
김지훈도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몰라도 최근 들어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지? 왜 이렇게 환자가 계속 오지?’
미묘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경악스러운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퇴근한다!
꼴딱 날밤을 샐 판이었지만 오창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아울러 김지훈의 일복이 어느 정도인지 뼛속 깊이 실감했다.
응급실이 수술실까지 이어졌다.
예감대로 꼬박 밤을 새웠다.
어둠이 물러간 후에야 힘든 금요일 일과를 마쳤다. 당직을 선 의국원 전체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전공의들은 이미 아침 일과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고, 김지훈과 오창도에겐 불과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았다.
코를 골던 오창도가 마구 손을 내저으며 하얗게 질렸다. 치프도 아니고 전공의 막내인 1년 차 돼 온 병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창도, 아침 드레싱 했어? 회진 준비는? 오늘 수술할 환자 코 줄은 왜 아직 안 꼽았어? 일 똑바로 안 해?’
으아악!
군대 다시 가는 것만큼 무서운 꿈이었다.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너무 생생했다. 잠결에서마저 경기를 일으키고도 남을 일이었다. 비명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아침 7시를 알려 주는 전화벨 소리에 눈은 뜬 오창도가 진저리란 진저리는 다 떨었다. 찬물에 세수하고, 머리까지 감은 후에야 어기적어기적 김지훈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달콤한 휴식을 기대해야 할 토요일 아침, 근무 마지막 날까지 몽롱함 속에 구름 위를 걸어야 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을 보고서야 좁쌀만큼 정신을 차렸다.
진하게 하품하다 정면으로 딱 걸렸다. 눈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말았다.
‘힘내자. 오전만 버티면 잘 수 있다.’
월요일부터 쌓인 피로에 가해진 마지막 일격은 무시무시했다. 회진 도는 일조차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주말 집담회가 끝나고, 오후 회진만 버티면 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텼다.
‘김지훈 선생님, 회진 끝났는데 잠깐 좀 쉽시다.’
애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바로 집담회행이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전임과 전공의들 모두 한 주 동안 한 수술을 확인하며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까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S 병원 일반외과 의료진 중 한 명이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하고, 차가운 블랙커피 두 잔을 내리 마셨다.
정신이 다소 나는 듯했다.
전문의가 된 이후 교수로 살아오는 동안 몰려오는 잠과 사투를 벌이는 날이 올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 처한 김지훈과 전공의들이 보이는 열정과 노력은 이 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전공의까지 저럴 수 있지?’
팍 삭은 파김치가 돼 주말 집담회에 참석했다. 시작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이 풀렸다. 아무리 졸려도 졸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쫙 펼쳐졌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빙빙 도는 망치, 도마 위에 한 명씩 올려놓고 잘근잘근 다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여전히 말수는 적었지만 입을 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가공할 불길, 비슷한 연배의 교수들이 날리는 강한 어퍼컷과 날카로운 잽까지.
전임, 전공의 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떨어졌다. 지금까지 이렇듯 살벌하게 진행되는 집담회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왠지 부러웠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하는 자리였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교수들의 애정이 실려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시연은 당연히 S 병원이 할 수밖에 없었네. 최고라고 자부했던 H 병원의 실상은 헛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상념도 잠시, 예외는 없었다.
부러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오창도 선생, 수술을 세 건이나 했네. 세 건이나. 보자, 보자. 라파로에 궤양까지. 아뻬 터진 걸 라파로로 했어? 잘했다, 잘했어.”
딱 첫마디만 부드러웠다.
송재덕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망치로 맞은 듯 머리가 띵해졌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눈길이 느껴지자 온몸에 열기와 한기가 동시에 돌았다.
퍽퍽! 화르륵! 화르륵! 다다다다다!
이미 임용이 된 것처럼 모든 화력이 집중됐다. 김지훈까지 다들 골고루 나눠 맞았는데, 혼자 모든 교수들의 집중 포화를 뒤집어써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집담회가 끝났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수술할 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얼굴도 모르지만 신기동 교수의 비수까지 있었다면 눈에서도 줄줄 흘렀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S 병원 일반외과에서 집담회 준비 안 하는 놈은 단연코 미친놈이다. 그놈이 바로 나다!’
이로써 오창도가 봐야 할 일, 느껴야 할 일, 알아야 할 일을 모두 맛봤다.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배우는 자리였다.
전공의들이 쏜살처럼 사라졌다. 교수들만의 간단한 커피 타임이 이어졌다.
김지훈을 비롯해 전임 모두 언제 탔냐는 듯 웃고 떠들었다. 피곤한 와중에 보이는 유쾌한 활기였다. 교수들 역시 힘든 한 주를 보낸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배움이자 가르침이었다.
문득 실행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한시 근무라고 해서 원칙을 방기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자리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임용을 위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기에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것이라 믿었다.
이혁민 교수가 깜짝 놀랐다.
“오창도 선생, 지금 무급이라도 좋으니까 일주일 더 근무하고 싶다고 했나?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야?”
“제가 수술한 환자분들이 무사히 퇴원할 때까지 직접 치료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김지훈 선생님과 함께 일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교수들 모두 의외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제아무리 교수 임용에 목을 맸다고 해도 이런 식의 접근은 듣도 보도 못했다.
더구나 세상의 일복을 모두 타고난 것 같은 김지훈과 일주일을 보냈다. 오창도의 진심이라는 말이었다.
송재덕 교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오창도 선생, 지원 파트가 간담도다. 간담도. 우리 김 교수하고 똑같이 일하며 배우고 싶다고?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 알고 말하는 거지? 전공의야, 전공의. 그런 생활 아무나 못한다. 아무나.”
몇 년을 그렇게 일해 온 김지훈이 있는데 일주일 더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힘든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었다.
“고작 일주일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행정적인 일에 참여하고 있는 신현수가 김지훈과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물었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없었다. 무조건 찬성이라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창도 선생, 다음 주 월요일에 전화할 테니 꼭 받아라. 갑작스러운 일이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오창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떠나 부정적 평가가 나온다면 전화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 꼭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다.
‘참 좋은 사람이다. 꼭 함께하고 싶은 써전이야.’
피곤함 속에서 한 줄기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이제 남은 커피를 비우고 한 주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밤을 꼬박 새운 날은 조금 일찍 퇴근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김지훈이 오창도와 함께 부지런히 회진을 돌았다.
마지막 순간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오창도가 교수와 전공의만이 아니라 병동, 응급실, 수술실 간호사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지 막상 김지훈을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오창도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꼭 우리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저도 살고 싶어서요.”
김지훈이 가벼운 농담으로 서운함을 달랬다.
“아! 다음 주 월요일에 또 뵐 텐데, 인사를 너무 빨리 한 거 아닌가요?”
미소를 머금던 오창도가 물었다.
“이런 생활을 어떻게 버티십니까?”
“다른 방법 있나요? 쉴 때 확실하게 쉬고, 오늘 같은 날은 까무러치는 거죠. 밥도 많이 먹어야 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빨리 퇴근하시죠. 다음에는 정식 교수님으로 뵙길 바랍니다.”
“저도 김지훈 선생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말씀 잘해 주세요. 가 보겠습니다.”
일주일간 쌓인 정이 적지 않았다.
많은 기억을 담았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다음 주에 다시 본다고 해도 단순한 연장일 뿐이기에 김지훈도 오창도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착잡한 기분도 잠시,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저녁 무렵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간신히 희연이 얼굴 보고, 고경아의 하해와 같은 은총 아래 내처 잤다.
일요일 아침이 돼서야 정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됐다.
우르르! 까꿍!
“경아 씨! 빨리 와 봐요, 빨리. 지금 희연이가 날 보고 웃었어요. 또 웃네, 또. 희연아, 아빠다, 아빠.”
“얼굴을 자주 봐야 아빤지 아닌지 알죠. 일주일 만인데 지나가는 사람하고 뭐가 달라요?”
배냇짓 보고 호들갑 떨었다 호되게 혼났다.
만회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점심으로 라면 끓이고, 설거지하고, 빨래 거들고, 시간 남으면 분유 타 먹이고, 기저귀 갈고, 잠투정 많은 딸 재우면 된다.
아! 일요일은 집 당직이다.
이번 주만 세 번을 섰다.
***
월요일 점심 무렵, 오창도가 말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전임들 모두 격하게 환영했고, 교수들은 흐뭇한 웃음을 전했다. 이번 주는 한 명의 교수로서 일하라는 이혁민 교수의 오더가 떨어졌다.
한층 더 높은 신뢰를 보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결과를 떠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직은 일복 최하위인 박승준 교수와 함께 서게 됐다.
대단한 배려였지만 비교도 안 되게 편할 것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오창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 좀 주무시겠습니다.”
수술한 환자만 봐도 되고, 집도 기회는 더더욱 없을 텐데 김지훈과 똑같이 일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 퇴근하는 모습에서 곧 원상복귀(?)할 것이란 확신을 전해 주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면 이런 노력이 오창도와 김지훈을 넘어 일반외과 전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순조롭게 정식 면담 날짜가 잡혔다.
심각한 인원 부족을 고려해 다음 주 내에 면담하기로 결정됐다. 오창도가 온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당직이 없던 덕에 오창도의 얼굴이 뽀송뽀송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김지훈과 함께하면 반드시 얻게 되는 피곤을 기본으로 깔긴 했지만 말이다.
어느새 목요일 일과가 시작됐다.
박승준 교수의 당직 날이었다.
“오창도 선생님, 내일이 김지훈 선생 당직인데 같이 서실 겁니까?”
“가급적이면 그러려고 합니다.”
“이번 주는 지훈이 당직이 한 번뿐이라 더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이 박승준 선생님 당직이니까 미리 충전 확실하게 해 두세요.”
이경석의 말에 오창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복 없는 사람 찾기 어려운 S 병원이었다.
“그렇게 환자가 없습니까?”
“정규 수술은 정말 많으신데 이상하게 응급은 없으십니다. 가물에 콩 나듯 가끔 수술하시니까 말 다 했죠.”
마침 얼굴을 보인 김지훈과 신현수도 격하게 공감했다. 이렇게 되면 거의 100퍼센트 기정사실이었다.
다들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일과를 마치고 퇴근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오창도가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쩌다 예외적인 날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일복이 없다고 해도 한 건 정도는 있겠지.’
박승준 교수도 간만에 환자가 왔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다들 당직 때마다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만 봤는데 잘된 일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