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해 온 만큼 되돌려 받는다 Ⅲ (1)
무뚝뚝한 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감도 모자라 강한 압박감까지 어깨를 올라탔다. 굳게 닫힌 입이 일단 열리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불평은커녕 도리어 각오를 다져야 했다.
대가의 존재는 강력한 힘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다양한 수술은 써전 개개인의 수준을 높이고,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초석이 분명했다.
‘이러니 수준이 다를 수밖에.’
오창도의 눈도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수술을 보고 있노라면 설명하기 힘든 뿌듯함에 행복감까지 밀려왔다. 같은 써전이라는 사실이, 한시적이나마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던 자부심까지 일깨웠다.
이대로만 가면 얼마나 좋을까?
쌓이고 쌓인 피로 앞에 장사 없었다. 하필이면 마지막 수술에서 세컨을 섰다. 약간의 단조로움 속에 깜빡하는 순간 무릎이 툭 꺾였다.
전문의가 수술 중에 졸다니!
결국 우려했던 초유의 불상사가 터졌다.
화들짝 놀라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늦었다. 기척만으로도 졸았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맺히고, 등짝이 서늘해졌다.
‘죽었다.’
한마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 듣는 편이 훨씬 편할 것이란 생각만 감돌았다. 전문의답지 않은 초조함 속에 정규 수술이 끝났다.
“오창도 선생, 열심히 하자.”
아! 단단히 착각했다.
열심히 하라는 말이 이렇게 파괴적인 위력을 지녔을지 몰랐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김지훈의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질 않았다.
“똑바로 하라는 말씀보단 백배 낫습니다.”
민망함에 그저 울고 싶었다.
전공의 때처럼 가슴만 울렁거렸다.
오후 회진을 앞두자 은근한 불안감이 다가왔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전공의 중 한 명이 급하게 달려오면 무조건 수술이다.
적절함을 기대했건만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얼굴 벌게진 송진우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한 손에 들린 컨설트 용지가 세 장이나 나부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살얼음이 폭삭 깨졌다. 퍼스트도 아닌 세컨을 서며 수술 세 개를 지켜보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 선생님, 혈관도 전담하시는 겁니까?”
“신기동 선생님이라고 주임 교수님이 계신데, 지금 연수 중이십니다. 그때까지만 제가 맡습니다.”
“언제 오시나요?”
“글쎄요. 빨라도 올해 말이나 돼야 오실 것 같습니다.”
‘김지훈 선생님 앞에선 피곤하다는 말도 못하겠네.’
오늘도 새벽에 나와 한밤에 퇴근했다.
너무 피곤해 말할 힘도 없었다. 예전에는 이 생각 저 생각에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었는데, 이젠 머리에 베개만 닿으면 세상모르고 잠에 빠졌다.
그 덕에 시간은 정말 빨리 갔다.
월, 화, 수, 목.
눈 감았다 뜨면 어느새 다음 날이었다.
어느새 짧다면 짧지만 지난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치열했던 4일이 지났다. 토요일은 수술이 없기에 사실상 금요일인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오창도의 얼굴이 비장했다.
‘시작만큼 중요한 것이 끝마무리다. 열심히 하자. 똑바로 하라는 말은 절대 듣지 말자.’
잠잘 때 빼고 하루 종일 붙어 있었던 덕에 이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김지훈과 친해졌다.
슬슬 욕심도 났다.
‘집도할 기회는 없는 걸까? 후우! 수술할 환자 진료를 안 했으면 대리 수술과 다를 바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쉽긴 하다.’
5일 만에 전공의와 똑같은 몰골로 변한 오창도가 진한 아쉬움을 담은 한마디를 건넸다.
“벌써 금요일이네요. 수술이 많아서 그런지 시간 참 빨리 갑니다. 오늘 첫 수술은 어디에 서면 될까요?”
김지훈이 비슷한 몰골로 대답했다.
“토요일이라고 편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이 하루 같은 자리가 남았습니다.”
원하는 답은 주지 않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내일 무슨 일 있나?’
무럭무럭 의문이 치솟았지만, 때마침 송진우가 환자를 옮기고 있었다. 잡담은 여기까지다. 서둘러 수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김지훈이 손을 씻고 들어오길 기다리던 오창도가 흠칫 놀랐다. 얼굴만 봐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준영 교수가 스윽 수술실로 들어온 것이다.
진료 시간인데 무슨 일일까?
설마 열심히 하는지 보려고?
눈길 한 번 주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 무뚝뚝하신 선생님이야.’
김지훈이 들어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 환자분과 얘기 됐지?”
“예. 입원할 때 확실하게 설명하고 동의 받았습니다.”
“알았다. 준비해.”
거구의 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수술 덧 가운을 입으며 어느 자리에 서야 할지 묻던 오창도가 순간 멈칫했다.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 평가가 분명했다.
아니, 진정한 평가의 시작이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마구 뛰었다.
복강경 수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담낭 절제술이었지만 강한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이준영 교수에게 인사하고, 김지훈과 시선을 교환한 후 자리에 설 때까지도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창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내내 바랐지만 이런 기회가 실제로 주어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수술 전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평가를 위한 일이라지만, 수술 하나를 주기 위해 환자와 보호자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양해를 구했을까? 김지훈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눈가를 좁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집도 기회까지 준다는 것은 이준영 선생님께서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말이겠지만 방심하지 말자.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욕심내지 말자. 이준영 선생님, 결과를 떠나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과 눈빛을 교환했다.
‘빨리 시작하세요. 무척 기대됩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수없이 한 수술이었지만 가슴이 설렐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집도의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한 주 내내 쌓인 피로가 날아가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오창도가 시작을 알렸다.
“마취과 선생님,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오창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수없이 잡아 온 메스였다.
평가 5일째 되는 날, 드디어 잡게 된 메스의 느낌은 확연하게 달랐다. 마치 첫 집도를 할 때처럼 강한 긴장과 흥분, 설렘이 교차했다.
이 또한 잡생각이었다.
오창도가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집중하자.’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과 단둘이 하는 3포트 수술이다. 지난 4일간 맞춘 호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를 준 환자를 위해서라도 티끌만 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처컥! 처컥!
“보비! 수처! 타이! 클립!”
오창도는 화면과 손에만 집중했다.
김지훈의 눈빛은 전에 없이 매서웠다. 이준영 교수는 여느 때처럼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담낭이 박리되고, 담낭 동맥과 담낭관이 잘렸다. 나직한 기계 소리만 울리는 가운데 담낭이 제거됐다. 수술 부위 마무리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컷!”
마지막 피부 봉합이 끝났다.
무사히 환자가 깨어나는 것을 확인한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수술실을 나갔다. 가타부타 한마디도 없었고, 김지훈 역시 다음 수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오창도로서는 초조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답답한 일이었지만 대놓고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다섯 건의 정규 수술이 쭉쭉 이어졌다.
마지막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질 때까지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단 한 건의 집도였기에 불완전한 평가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마저 다가왔다.
오후 회진을 빠르게 돌았다.
가운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전공의가 없어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그 탓인지 몸이 달 정도로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내일 평가 결과를 알려 주시려나? 혹시 한 시간이 하루 같은 자리가 있다는 말이 날 보고 한 소리였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김지훈을 보며 슬며시 다가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준영 교수의 반응이 어땠는지 들어야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입을 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이상스럽게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첫 집도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김지훈이 당직이다.
모처럼 일찍, 그것도 불과 한두 시간 정도일 뿐인데 환자가 둘이었다. 노티를 받은 김지훈이 곧장 응급실로 향했고, 이미 환자들로 넘쳐났다.
‘일복이 이렇게 넘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차트를 확인하는 김지훈의 얼굴이 상당히 진지했다.
멍하니 오더만 기다리는 일은 인턴, 혹은 학생 때도 한 소리 들을 일이었다. 진단명을 보며 수술 방법을 생각하던 오창도가 뜻밖의 말에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환자 보시고 수술 결정하세요.”
“제가요?”
한시적이지만 엄연히 의료진 중 한 명이다.
“예. 무슨 문제 있나요?”
기대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마지막 평가의 연속이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S 병원의 교수와 똑같은 입장에서 환자를 보고 결정해야 했다.
환자를 보려던 오창도가 훅 숨을 내뱉었다.
‘평가를 떠나 날 믿고 인정하지 않으면 환자를 맡길 리가 없어. 당연히 이준영 선생님의 허락이 있었겠지?’
불현듯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인정받았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가와 대가가 전적으로 믿는 의사가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표현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며 환자 진찰을 시작했다.
김지훈의 눈빛이 또다시 매서워졌다.
전공의들은 어떤 식으로 진찰하고, 설명하는지 보려는 듯 바짝 곁을 지켰다. 이젠 제법 친해진 송진우의 눈길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환자분, 지금으로서는 위궤양이 발생한 부분에 구멍이 난 것 같습니다. 바로 수술받으셔야 합니다. 여러 수술법이 있지만, 일단 수술실에서 직접 상태를 봐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환자분, 맹장이 터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가급적 빨리 수술하셔야 하는데, 먼저 수술해야 할 환자분이 계십니다. 수술 방법은 두 가지가 있고, 먼저 해야 할 수술이 끝나기 전에 결정해 주십시오.”
오창도가 차근차근 상세하게 설명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시간이 걸렸다.
일부 써전은 수술이 치료의 모든 것이라는 것처럼 간단하게 몇 마디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조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평가를 받고 있다는 입장 때문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역시 오창도 선생님이네.’
위궤양 천공 환자의 수술이 결정됐다.
김지훈이 양해를 구하는 오창도의 눈길을 외면했다.
도리어 전공의들에게 집도의가 오창도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이미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오창도였지만 또 한 번 환자와 수술을 되돌아봐야 했다.
첫 번째 응급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전문의라면 당연히 완벽하게 해야 하는 수술이었다. 궤양 천공을 앞에 두고 버벅거리면 면허증 반납하는 것이 마땅했다. 평가 대상으로는 부족했다.
두 번째 수술은 복강경으로 결정됐다.
아뻬지만 터졌다. 증상이 꽤 심한 것으로 보아 아뻬는 형체를 잃었을 테고, 배 속 여기저기에 고름까지 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력이 없다면 절대 복강경으로 시도해서는 안 되는 수술이었다. 자칫 개복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완벽한 기회였다.
오창도는 긴장과 동시에 자신감을 보였다.
기대한 대로 깔끔하게 해냈다.
거의 녹아 버린 아뻬도, 염증이 심하게 발생한 장간막 속에 묻힌 동맥도 안전하게 처리했다.
자신의 실력을 여실하게 드러낸 수술이었다.
8시에 시작해 날을 넘겨 1시가 돼서야 두 건의 수술이 끝났지만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실력 유무를 떠나 난이도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수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남았다.
수술을 끝낸 오창도가 병실로 올라가 환자 상태를 최종 확인했다. H 병원에서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S 병원이 요구하는 원칙 중 하나를 확실하게 지킨 것이다.
김지훈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일 스승님께 본 대로 보고하면 끝인가? 이만한 분도 없을 거야. 오창도 선생님이 꼭 임용됐으면 좋겠다.’
‘한마디 정도 할 줄 알았는데 입도 열 생각을 안 하시네. 내일 중에 평가 결과를 들을 수 있을까? 전문의 시험 볼 때보다 더 떨린다.’
은근한 초조함을 느끼던 오창도가 갑자기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왠지 너무 조용하고, 너무 평화로웠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이라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