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해 온 만큼 되돌려 받는다 Ⅱ (2)
일이 힘들거나, 기대가 크거나,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면 알고 있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기 마련이다. 휴게실 벽에 걸린 일반외과 수술 스케줄 표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오늘 들어갈 수술이 6건이 맞는지 확인했다.
‘좋았어. 이런 기회는 다시없어.’
주먹을 불끈 쥐던 오창도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스케줄 표가 다양한 수술로 새까맸다.
각 파트 교수들의 수술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어제 수술실에서 보았던 신현수와 이경석의 수술까지 보였다. 비만과 조기 대장암 모두 복강경으로 예정된 상태였다.
‘후아! 다른 수술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정도면 라파로까지 복강경 센터보다 더 많이 하네. 의지만 있으면 정말 많은 수술을 배울 수 있겠어.’
감탄도 잠시,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긴장 그 자체였다. 거구나 무뚝뚝함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
매 수술 말 한마디로 끝이었다.
“이번 수술은 세컨 섭시다.”
3포트 수술이기에 수술만 지켜보면 되는데 도무지 힘이 빠지질 않았다. 허리 빳빳하게 세우고 오전 내내 참관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의미가 없을 수 없다.
‘김지훈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이준영 선생님의 수술은 뭔가 달라. 차이가 뭘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구내식당에 도착한 오창도가 반색했다. 오전 진료를 마친 김지훈과 딱 마주친 것이다. 둘 다 비슷한 몰골로 식사를 시작했다.
느긋함이 도리어 피로 가중이었다.
후루룩! 휘리릭!
이번 식사 역시 번갯불에 콩 구워 먹고, 마파람에 게 눈 감췄다. 동시에 숟갈 놓고, 제 갈 길 갔다. 휴게실 구석에서 눈 한 번 감고 떴는데 오후 수술 직전이었다.
허겁지겁, 부리나케.
“이번 수술부터 퍼스트 섭시다.”
눈가에 달라붙었던 졸음이 싹 달아났다. 보고 느낀 것을 상기하며 충실하게 퍼스트를 섰지만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뚝뚝함은 익히 알려진 이준영 교수의 트레이드마크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부담 그 자체였다.
적응 역시 별개 문제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수술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삭신이 쑤실 지경이었다.
‘후우! 퍼스트 서는 일이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었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대가의 수술을 숨소리까지 들어 가며 볼 수 있는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 덕에 간신히 극도의 긴장감을 피할 수 있었다.
눈 부릅뜨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잘했다? 못했다?
가타부타 말은 없었지만 전공의의 반응과 표정을 보니 특별한 실수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서 그간 쌓은 경력과 실력이 무용지물일 수도 없었다.
‘대가의 눈에는 집도가 아니라 퍼스트를 서는 것만으로도 실력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절대 방심하지 말자.’
자신감과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감히 판단조차 하기 힘들었다. 대가라 불리면서도 매 수술마다 자신의 모든 열정과 능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어느새 예정됐던 수술이 모두 끝났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됐지만 6시가 다 됐다.
고작 두 시간 자고 33시간을 버텼다.
‘후우! 힘들다. 그래도 기분은 정말 좋네. 이제 오후 회진만 돌면 끝인가? 빨리 밥 먹고 자자.’
팔다리는 무거웠고, 어깨와 허리는 뻐근하다 못해 뻑뻑할 지경이었다. 최선을 다해 하루 일과를 보낸 써전에겐 아주 익숙한 호소였다.
피곤을 넘어서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전공의 시절 온 병원을 휘젓고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실력 평가를 위한 자리가 아니어도 절대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수술실을 나가자마자 긴장의 끈이 한꺼번에 끊어졌다. 의지와는 달리 튀어나올 때만 기다리던 피곤이 아우성을 치며 온몸을 휘감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퇴근이다.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만큼 더없이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른한 기대를 머금고 회복실로 향하던 오창도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떡하니 수술실에 서 있는 김지훈이 보였다.
분명 진료 날인데 이미 수술 하나 한 모습이었다.
눈가를 비비며 아내라고 했던 간호사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여간 곤란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경아 씨,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요. 미안해요.”
“어쩔 수 없죠. 들어올 때 소리 안 나게 조심해요. 희연이 막 잠들었을 때 깨면 우리 둘 다 잠 못 자는 거 알죠?”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진료하는 날인데 왜 수술을 한 얼굴이지? 설마 또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어제 잠도 거의 못 잤는데 다른 교수님들께 부탁해도 되잖아. 진료가 빨리 끝나서 쉴 수 있었나?’
김지훈의 무시무시한 일복을 알 리 없다.
당직이 아니라고 해도 날이 환하면 시간 비는 사람이 수술하기 마련이다. 마침 진료가 예정대로 끝났고, 다른 교수들은 일이 있었고, 이혁민 교수는 여느 때처럼 김지훈을 불렀을 뿐이었다.
회진 때 보았던, 일반외과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1년 차가 환자를 옮기고 있었다. 단발머리는 수술 모자 속에 잘 감췄지만, 까매진 눈매가 고스란히 보였다.
“오하석 선생 맞지? 혹시 지금 김지훈 선생님 수술이 있는 거야?”
“예.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한참 수술하는 중이라고 해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다. 모른 척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유혹이 다가왔지만, 한편으로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꿈틀 솟구치고 있었다.
‘농땡이 부리지 말고 바로 들어가자. 후우! 옛날 생각이 절로 나네. 이거 완전히 전공의 생활이야.’
부르르 진저리를 친 오창도가 새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우연히 눈이 간 스케줄을 보며 또 떨고 말았다. 수술실 번호를 생각해 보니 이제 막 이혁민 교수의 갑상선 수술이 끝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브레스트(Breast:유방) 두 건이 남은 건가?’
예감 적중했다.
그새 이혁민 교수가 집도의 자리에 서 있었고, 김지훈과 오하석 모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인기척에 힐끗 눈길을 준 김지훈이 써드 자리를 가리켰다. 졸지에 전문의가 가장 막내가 되고 말았다.
“오창도 선생, 할 만하나?”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틀도 안 돼서 맛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농담일까? 진담일까?
입 안이 까칠할 정도로 충분히 보고도 남았지만 입 벙긋할 때가 아니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써드를 서며 이혁민 교수의 첫 번째 수술과 김지훈의 두 번째 수술 집도를 지켜보았다.
‘브레스트 다루는 솜씨도 정말 대단하네. 어? 간담도 환자 수술도 잔뜩 밀려 있다면서 설마 혈관도 모자라 갑상선에 브레스트까지 맡고 있는 거야?’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방면에 걸쳐 실력을 쌓는다는 말이겠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업무량이었다. 이미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은 김지훈이기에 S 병원 교수들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시시콜콜 따지며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일단 당면한 상황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결국 9시가 훌쩍 넘어서야 회진을 돌았다.
짜증 낼 법도 하건만 온몸에 피로를 뒤집어쓴 김지훈이 웃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 듯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불과 한두 시간 자고 36시간이 넘도록 일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묵묵히 뒤를 따르던 오창도가 눈가를 좁혔다.
김지훈의 실력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시연을 보며 잠시나마 타고난 써전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완벽한 오판이었다. 김지훈은 지금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써전이었다.
생각과 달리 몸 곳곳에서 빨리 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인공 눈물이 필요할 정도로 눈이 뻑뻑했다.
‘다 좋은데 언제 쉬는 걸까?’
회진이 끝난 후 슬며시 물었다.
“송진우 선생, 김지훈 선생님 낮에 좀 쉬셨나?”
“외래 환자도 적지 않으십니다. 4시까지 쭉 진료하시고 바로 갑상선 수술 들어오셨습니다.”
“저렇게 일하다가는 며칠 못 버틸 텐데 언제 쉬셔?”
“시간 날 때마다 거의 죽은 것처럼 토막잠을 주무시긴 하는데, 사실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저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으시거든요. 어마어마한 일복까지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몇 년을 함께 일한 전공의도 놀랄 수밖에 없는지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 때문인지 오늘은 김지훈의 당직 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말았다.
이제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휴식 문제는 김지훈에게도 새로운 당면 과제가 되고 있었다. 예전에도 고경아가 없었다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과 집중을 외치며 쉴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쉰다는 모토 하나로 휴식을 취해 왔다.
아슬아슬하게 잘 버텨 왔건만, 조그만 생명 하나로 모든 것이 변했다. 잠투정 많은 딸 낳은 것이 죄라면 죄였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는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아이고! 예뻐라. 우리 딸 얼굴 보니까 피로가 싹 풀리네. 오늘은 울지 말고 잘 자야 한다.’
딸 곁에 누워 게슴츠레한 눈으로 미소 짓던 김지훈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방바닥에 이마 박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대신 희연이가 깜짝 놀랐다. 울음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는지 코까지 골았다.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우리 희연이 오늘도 아빠 얼굴 못 보네.’
고경아가 조용히 작은 방으로 건너갔다.
마침 젖 먹을 시간이 됐다. 힘차게 젖병 빠는 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트림을 시킨 후 토닥토닥 잠을 재웠다.
잠투정 끝이 약간, 아주 약간 짧아졌다.
엄마라고 봐주는 모양이었다.
그 시간, 오창도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양말도 벗지 못한 채 말이다.
불과 이틀도 안 돼 건장한 써전이 물먹은 솜처럼 완벽한 녹초가 됐다.
오창도의 아내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틀 만에 눈가가 까매졌네. 설마 매일 이렇게 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죽으라는 법은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그런 법 있었고, 구멍은 없었다.
수요일 정규 수술은 단 2건이었다. 이준영 교수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는 김지훈 수술에 당직 날도 아니었다. 얼핏 굉장히 편하게 보였지만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잠 몇 시간 더 잤다고 첫 수술부터 메이저 중의 메이저, 췌장암 수술이었다.
두 번째는 간암 환자였다. 우측 간에 발생한 암이라 복강경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수술이 너무 많은 탓에 전공의들도 고정적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당직 날 응급 수술을 같이했던 강병옥이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병옥 선생, 메이저를 오늘 몰아서 하는 이유가 있나? 금요일도 수술하시는 날이잖아.”
“환자분 사정이 결정적이지만, 금요일에도 라파로가 6건입니다. 한동안 예약이 꽉 차서 마이너라고 미룰 여유가 없으세요.”
깍듯이 대답을 했지만 무언가 경계하는 것처럼 강병옥의 눈이 번쩍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창도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퍼스트를 누가 설까?
오래 걸리는 수술일수록 세컨과 써드의 피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연일 강행군에다 이왕 들어온 수술이었다. 미안하지만 전공의 눈치까지 볼 수는 없었다.
집도가 아니라면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하는 퍼스트만이 살길이었다. 그래야 전문의가 수술 중 꾸벅꾸벅 조는 초유의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실력을 보일 기회기도 했다.
마취가 진행되는 동안 전문의와 전공의가 똑같은 생각으로 김지훈의 입만 바라보았다. 수술할 때 이상의 긴장이 감돌았다.
“췌장암은 오창도 선생님이 퍼스트 서 주시고, 간암은 병옥이 네가 서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창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전문의와 전공의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며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단 두 건의 수술로 점심도 못 먹고, 저녁 8시가 다 돼서야 수술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오창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비록 집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쌓였던 수술에 대한 갈증이 풀리고 있었다. 오랜 기간 함께해 왔던 것처럼 김지훈과의 호흡도 척척 맞았다. H 병원 근무 시절 툭하면 들어야 했던 큰 소리는커녕 짜증조차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없던 힘까지 날 판이었다.
‘엄청나게 피곤하지만 정말 좋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회진이 끝날 무렵,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를 보였던 오창도의 눈가가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송진우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나풀나풀 흔들리고 있었다.
“휴가 때문에 밀린 수술이 제법 많네요. 그래도 하나만 하면 되니까 다행입니다.”
‘간담도 전공이 아니라 혈관 전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네. 후우! 인력 부족은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너무 심해. 한두 명 보충해서는 티도 안 나겠어.’
결국 11시가 다 돼 퇴근했다.
3일 만에 출퇴근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촛농처럼 몸이 무너져 내렸다. 때 아닌 걱정까지 앞섰다.
‘정말 사람 잡는 일복이다. 내일은 진료만 하는 날인데 예정대로 지나갈까?’
김지훈도 꽤 힘든지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 딸 언제 보나?’
속마음을 누가 알까?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피로를 풀지 못한 오창도가 눈가를 비비며 회진 올라온 교수들을 보았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반도 되지 않았다. 전임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비슷한 연배인 지동훈 교수마저 눈가가 벌겠다.
‘어제 당직이셨구나. 다들 일복이 넘치는 걸까?’
S 병원만의 특수성일까?
이미 모든 병원이 미래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약간의 예외가 더해지며 절대적 인력 부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오창도에겐 불리한 일이 아니었다.
‘임용 가능성이 생각보다 더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수술실로 들어간 오창도가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준영 교수는 긴장 그 자체였다.
‘졸면 죽는다.’
전공의도 아닌데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