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해 온 만큼 되돌려 받는다 Ⅰ (2)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오창도 선생님, 다른 교수님들과 인사는 하셨습니까?”
“과장님, 이준영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만 봤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니 겸사겸사 잘됐다.
“그러시군요. 비록 일주일이지만 우리 과 교수로 근무하시는데 차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부터 아침 7시까지 응급실로 출근해 주세요. 이준영 선생님 수술을 들어가실 때 이외에는 제 일과에 전적으로 맞추시고, 퇴근도 같이 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오창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반외과 의사 생활인데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사실 출근 시간이 H 병원 때보다 30분 정도 빠를 뿐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S 병원 일과를 고스란히 보여 주려는 김지훈의 배려 아닌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각오 단단히 하고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자! 지금부터 김지훈과의 S 병원 생활 시작이다.
수술복을 갈아입던 중 이경석을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김지훈이 한 말을 꺼냈다. 이경석이 상당히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가는 거 아냐?’
“김지훈 선생과 똑같이 근무하신다고요? 당직은 이틀 서시고요. 흠! 고생하십시오.”
“고생은요. 저로서는 큰 기회입니다.”
이경석이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수술실로 향하던 오창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느 병원처럼 수술 준비로 부산했다. 익숙함과 동시에 편안함을 주는 모습이었지만, 보이는 모든 의료진이 다 낯선 사람들이었다.
타인일 수밖에 없는 오창도의 입장을 생각한 김지훈이 수술 팀을 일일이 소개했다.
“송진우 선생, 상황 들었지. 인사부터 해.”
“안녕하십니까? 송진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송진우 선생이 3년 차 치프입니다. 일주일 편하게 보내시려면 잘 보이셔야 할 겁니다.”
송진우는 여지없이 얼굴을 붉혔고, 오창도는 어색함을 웃음으로 넘겼다.
마취과 소속 간호사까지 모든 수술 팀과 인사를 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의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곧 환자가 옮겨질 것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잠시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오창도 선생님, 3포트 수술이라 간호사까지 셋이서 진행합니다. 분위기부터 아셔야 하니까 첫 수술 두 개는 세컨 서시고, 나머지 라파로에서 퍼스트 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복 수술은 어떤 식으로 하실 겁니까?”
“첫 번째는 송진우 선생과 하고, 두 번째는 선생님과 손을 맞출 생각입니다.”
집도의의 결정이다.
전문의라고 대우해 달라고 할 자리가 아니었다. 일단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월요일 첫 수술 환자가 옮겨졌다.
드디어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여느 수술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지만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김지훈에겐 휴가 후 첫 수술이었고, 송진우에겐 치프가 된 후 첫 수술이었고, 오창도에겐 실력을 평가받는 첫 수술이었다.
가벼운 긴장 속에 수술이 시작됐다.
78세 고령의 담석증 환자였다.
처컥! 처컥!
“진우야, 카메라 들어와.”
“보비, 수처, 타이, 클립.”
오창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화면으로 본 수술과 실제 곁에 서서 숨소리까지 공유해야 하는 수술은 확연히 달랐다. 집도의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과감한 손과 차분한 목소리, 오더에 따라 최선을 다해 카메라를 조작하는 전공의의 온몸에서 알 수 없는 생기와 열정이 전해졌다.
김지훈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고, 다행히 극도의 긴장 속에 진행해야 하는 고난도 수술도 아니었다. 세컨 자리가 주는 여유까지 겹쳐 살짝 물러서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위기 하나는 확실히 다르네.’
잠깐 딴생각을 했는데 수술이 끝났다.
김지훈이 환자가 확실하게 깼는지 확인한 후에 보호자를 만났다. 환자 곁에 붙어 안심이 될 때까지 송진우와 함께 상태를 살피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보통은 전공의가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수술이 이어졌다.
이번 역시 무척 빨리 끝났다.
‘걱정될 정도로 손이 빠른데 괜찮을까? 6건이나 있어서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고민도 잠시, 부지런히 김지훈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몸에 익은 것처럼 환자를 살핀 후 보호자를 만났고, 세 번째 수술을 곧바로 진행했다.
수술 사이에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다음 수술을 순조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불과 5분도 앉아 있지 못했다. 집도의가 가져야 할 여유를 유지하는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송진우까지 당연한 듯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수술이 많아서 그런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겠지?’
점점 궁금한 점이 많아졌지만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계획대로 퍼스트를 설 차례였다. 숱하게 해 온 수술인데 상당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시작합니다. 메스!”
처컥! 처컥!
병원마다 다르지 않은 기계 소리가 오창도의 긴장감을 누그러트렸다.
카메라 조작에 무척 신경 썼지만 처음 호흡을 맞추는 수술이었다.
초반부터 집도의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최인호 교수나 진충기가 집도의였다면 욕을 한 바가지 이상 먹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집도도 아니고 퍼스트를 서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김지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오창도 선생님, 수술 스타일이 달라서 힘드시죠? 이 부분에서는 약간만 더 내려 주시면 됩니다. 이준영 선생님도 비슷한 방식으로 수술하시니까 기억하셔야 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스타일 때문이라며 내일 있을 수술까지 챙겼다. 퍼스트의 실수에 갑갑한 눈치 정도는 보일 줄 알았던 송진우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빛이었다.
이내 순조롭게 수술이 진행됐다.
김지훈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수라도 한 것일까?
절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오창도는 복강경 경험이 풍부한 전문의다. 집도의의 손을 따라 적절하게 호흡을 맞추는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다음 수술까지 무난하게 진행되면 퍼스트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스승님과 상의해야 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오겠어.’
어느덧 세 번째 수술이 끝났다.
힐끗 시계를 본 오창도가 흠칫 놀랐다. 이제 막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빠르네. 수술이 깔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
무사히 잘 끝났다고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복강경 수술 자체를 얼마 들어가지 못했을 3년 차 치프도 무난하게 퍼스트를 섰다. S 병원의 전체적인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 주는 확실한 지표 중 하나였다.
‘어느 자리에 서든 긴장해야겠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점심 식사를 마쳤다.
약간의 시간이 남자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가 오전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확인했다.
수술을 너무 빨리 끝낸 탓에 불안한 탓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웬만한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이 거의 다 지났다. 잠깐 숨 돌리고, 미처 소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오후 첫 수술이 이어졌다.
전과 다름없이 깔끔하고 빠르게 끝났다.
오창도가 콧등을 찡그렸다.
이제야 오전에 느끼지 못한 김지훈의 여유를 봤다. 눈으로는 빠르게 보이지만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집도의의 실력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곧바로 다음 수술이 이어졌다.
분명 숨 가쁜 일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착착 굴러갔다. 수술 팀 전원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란 의미였다.
‘누군가 짜증을 낼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이 없네. 다른 수술도 모두 이렇게 진행되고 있을까?’
의문을 풀 틈이 없었다.
개복 수술이다.
복강경 때 본 이상으로 손이 빨랐고, 무사히 깔끔하게 끝났다. 환자가 잘 깨어났는지 확인한 김지훈은 보호자와 만나고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건만 세컨을 선 오창도가 무척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경우든 수술받는 환자가 가장 중요하다. 퍼스트를 서 가며 의문을 해결하고, 적응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전공의라고 해도 반드시 물어봐야 했다.
“송진우 선생, 다음 수술도 이렇게 하시나?”
“예. 라파로가 불가능하거나 환자가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항상 미니콜레시스텍토미로 하십니다.”
이런 수술법도 있었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상당히 생소했다. 수술명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고, 담낭 절제술이라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작게 연다는 소리는 분명한데.’
절개 부위가 너무 작아 퍼스트를 어떻게 서야 할지 정확한 감을 잡기 힘들었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공간이 바로 수술실이다. 전문의와 전공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주의할 점을 물었다.
“전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여셨는데, 점점 작아져서 저희들도 꽤 힘듭니다. 특히 타이할 때 문제가 종종 발행하니까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설명하던 송진우가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설령 익숙하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오창도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오창도가 이내 갸웃거렸다.
‘창피한 사람은 난데 얼굴을 왜 이렇게 붉히지? 이런 수술 경험도 없냐는 눈빛은 절대 아닌데 이상하네.’
간만에 오후 5시가 다 되도록 수술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제법 피곤이 느껴졌지만 써전이라면 하루도 안 돼 적응될 상황이라 역시 가볍게 지나쳤다.
‘이 정도로 빠르게 수술하면 7시쯤이면 다 끝나겠지? 그럼 8시 정도에 일과가……. 어이구!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미니콜레시스텍토미라고? 생소한 만큼 긴장 풀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약간의 우려와 걱정 속에 마지막 정규 수술이 시작됐다. 시작부터 미니(Mini)라는 단어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절대 그럴 리 없건만 송진우가 퍼스트를 설 때보다 절개 창이 훨씬 작은 것처럼 보였다.
‘손 들어갈 틈도 없는 것 같은데, 전공의가 퍼스트를 무난하게 섰단 말이야?’
김지훈이 힐끗 오창도를 보았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생소한 수술은 누구나 조심스럽기 마련이었다.
수술 전 송진우에게 오창도의 질문이 있었다는 언질도 받았다. 퍼스트의 손에 어느 정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살짝 손이 느려졌다.
상당히 좁은 공간 속에서 시행하는 타이에 익숙해지도록 최대한 시야를 확보했다. 송진우 역시 리트랙터를 열심히 끌며 오창도의 손을 도왔다.
누구에게나 기우였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타이가 진행됐다.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닥치면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송진우와 할 때보다 훨씬 편할 수밖에 없었다.
오창도의 손을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평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과도했던 것이 분명했다. 성격을 떠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진충기와 수술 팀을 이뤘던 써전을 두고 말이다.
‘나보다 더 오래 교수를 하신 분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손이 빨라졌다.
사실상 직접적으로 호흡을 맞추는 첫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척척 맞았다. 담낭 동맥과 담낭관이 안전하게 확실히 처리됐고, 어느새 배까지 모두 닫았다.
고도로 숙련된 써전의 힘이었다.
송진우가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느 누구에게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수술 전 전공의에게 불안한 부분을 질문한 일과 수술 중 어떤 문제도 없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말았다.
김지훈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예정했던 대로 7시쯤에 정규 수술이 모두 끝났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오창도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진충기가 인정할 만하네. 최인호 선생님도 곧 땅을 치고 후회하게 생겼어.’
속마음일 뿐이었다.
회복실 앞에서 고경아를 만났다.
“경아 씨, 7시 다 됐는데 퇴근 안 했어요?”
“옷 갈아입고 바로 갈 거예요. 그런데 저 선생님은 처음 보는 분인데 누구예요?”
“말하면 길어요. 집에서 얘기해 줄게요. 아 참! 나 오늘 당직이에요. 혹시 모르니까 일단 먼저 식사해요. 희연이는 잘 잤는지 걱정되네.”
아직 회진도 못 돌았고, 고경아도 서둘러 퇴근해야 해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고개를 내밀고 있던 오창도가 송진우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송진우 선생, 김지훈 선생님은 간호사하고도 무척 친한 모양이야. 보통 써전이 저러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우리 병원은 대체로 모두 다 친합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보신 간호사는 김지훈 선생님 사모, 아니 형수님이세요.”
“김지훈 선생님 부인 되신다고? 그런데 형수님?”
“그렇게 안 부르면 뭐라고 하세요.”
별별 구석에서 다 차이가 느껴졌다. 전공의와 이 정도로 허물없이 지낸다면 일반외과 전체 분위기가 어떨지 말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정말 많이 다르네.’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한 후 병동으로 올라갔다.
천천히 옷 갈아입으며 잠시 여유를 부리던 오창도가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7시가 넘어서야 오후 회진을 돌았다.
뒤를 따르던 오창도가 콧등을 찡그렸다.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회진과 뭔가 달랐다.
걸음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반면 환자를 앞에 두면 충분한 시간을 할애했다. 한마디로 이동은 최대한 빠르게 하고, 환자는 최대한 천천히 본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배울 점이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잊고 있었어.’
회진이 거의 다 끝났다.
신현수도 이제야 회진을 끝냈는지 피곤한 얼굴로 전공의들과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오창도가 남몰래 기지개를 폈다.
첫날부터 하루 종일 6건의 수술을 들어가며 보람차게 보냈다. 실력 평가를 떠나 써전의 행복은 수술에서 나온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하루였다.
신현수가 다가왔다.
“오창도 선생님, 어떠셨습니까?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긴요. 복강경 센터에 근무할 때도 바쁠 때는 꽤 바빴습니다. 일도 다 끝났으니까 적절하게 쉬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급히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