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90화 (890/1,329)

2화. 해 온 만큼 되돌려 받는다 Ⅰ (1)

절대 가볍게 대처할 일이 아닐 것이다.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에 내심 마음을 놓았던 오창도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교수 재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실력입니다. 불행히도 오창도 선생의 실력을 입증할 자료가 상당히 부족해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해서 먼저 검증 절차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신현수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검증이라면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창도의 물음에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눈길을 주었다.

“다음 주 일주일간 내 수술과 김지훈 선생의 수술에 모두 참여하시면 됩니다.”

“퍼스트를 서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부분은 집도의가 결정할 겁니다.”

H 병원 교수였던 사람을 퍼스트, 혹은 세컨까지 세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함부로 메스를 넘기지 않는 이준영 교수의 성격을 생각하면 집도는 꿈도 못 꿀 수 있었다. 게다가 전임인 김지훈의 수술을 들어가라니 자존심까지 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현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간담도를 지원하시니까 지훈이 수술까지 들어가는 게 맞긴 하지만, 전임에게 평가를 받는 꼴이라 기분이 좋진 않을 텐데.’

오창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속마음을 잘 속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미세한 변화는 있기 마련이다. 불만스러운 눈치를 보인다면 교수들은 물론 신현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응급 수술까지 모두 들어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오창도의 눈빛과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불만이라기보다 마치 시험을 앞둔 사람의 긴장감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어떤 각오로 지원했는지 하나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식 직원이 아닌 제가 수술을 들어가도 됩니까? 죄송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들과 병원에 피해를 끼치게 될 겁니다.”

무작정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물지 않는 모습에서 오창도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준영 교수는 지금도 무표정 그 자체였다.

대비 없이 일을 추진할 교수들이 아니었다. 일반외과 과장에게 주어진 권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임시로 근무할 수 있도록 조치 취해 놨습니다. 신현수 선생, 함께 총무과에 가서 처리하면 된다. 우리 과 자체 평가 후에도 정식 면접까지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교수실에서 나온 오창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정식으로 진행된다니 기대조차 못한 결정이었다. 함께 나와 웃음을 보이는 신현수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신현수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선생님의 능력을 평가하는 부분은 교수님들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정식 면접까지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총무과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류를 내밀었다. 임시 계약서에 사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혁민 교수의 위상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병원을 나오던 오창도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일주일간 가진 실력을 모두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강한 압박감과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대가라 불리는 이준영 교수에게 받는 평가였다.

‘최선을 다하자.’

당연히 한 사람이 더 떠올랐다.

‘김지훈 선생에게도 평가를 받으라고? 정말 대단한 신뢰를 보이시네. 전임이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써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이준영 선생님에게 평가받는 것처럼 똑같이 긴장해야 돼.’

교수 지원에 관한 일이 아니더라도 S 병원에 올 때마다 이상하게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굳이 많은 것을 주고받지 않아도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었으니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 받은 것의 10분의 1도 돌려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뒤돌아서 힐끗 병원을 보던 오창도가 피식 웃었다.

‘신현수 선생과 이혁민 선생님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하네. 이준영 선생님은 소문대로 정말 압박감이 심했어. 수술실과 환자 앞에 선 김지훈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상념도 잠시,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말았다.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분명한 시험이다.

교수부터 전임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말 한번 섞지 않은 교수들까지 말이다.

시연 때 보인 S 병원의 힘과 능력은 대단했고, 그 기반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신현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엄청나게 바빴던 복강경 센터 근무도 무리 없이 해냈다. 굳이 H 병원 상황을 몰라도 잘 돌아가는 일반외과가 얼마나 힘든지 모를 신현수가 아니었다.

교수들 눈이 날카로우니 각오 단단히 하고, 열심히 해 달라는 의례적인 말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

일주일간의 전쟁이 서서히 끝을 보였다.

같은 생활의 반복이자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에 며칠이면 적응될 것이라 여겼다.

단단히 착각했다.

하루하루가 첫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 번 잠투정이 시작되면 족히 한두 시간은 안아 달래야 했다. 급기야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안 하던 팔굽혀펴기 수백 번 한 것처럼 말이다.

콧바람 쐴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딸로 인한 일인데 당연히 긍정적이어야 한다.

‘이건 내 팔 힘을 키우기 위한 운동이야. 수술을 잘하려면 팔 힘이 좋아야 돼. 우리 딸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런데 왜 눈에서도 땀이 날까?

고경아가 퇴근하고 나서야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마음과는 달리 맥이 다 풀려 꼼짝도 하기 싫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고경아가 배 아파 낳은 딸만 아니었으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으름장을 놨을지도 몰랐다.

‘장모님과 경아 씨는 어떻게 달랬지? 차라리 하루 종일 수술하는 게 훨씬 편하겠다. 저렇게 팔이 가는데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그래도 가슴이 설레도록 참 예쁘다.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모습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보고 있노라면 너무 행복해 도리어 가슴이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친 고경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김지훈도 같은 얼굴인 모양인지 고경아 역시 똑같은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전쟁처럼 치열한 하루는 참 빨리도 가 어느새 휴가의 끝이 다가왔다.

여전히 하루 종일 먹고, 싸고, 우는 우리 딸!

아!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당직 선 것 같다.

토요일 오후,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고경아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지훈아, 애 보는 거 쉽지 않지? 다른 게 아니고 3년 차 치프 오늘 정해야 하는데, 병옥이하고 진우 중 누가 먼저 하는 게 낫겠어?)

갑작스러운 전화였지만 생각했던 문제였다.

“병옥이는 4년 차 치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렇지? 오케이! 이틀 남은 휴가 잘 보내. 하하하!)

마지막에 들린 웃음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아이 키워 본 선배의 불쌍하다는 웃음인지, 또 다른 의미가 담겼는지 알 길이 없었다.

궁금함도 잠시, 울음소리에 후다닥 달려가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경아가 퇴근해 한결 짐을 덜었다.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

지난 시간, 딸과의 시간을 무사히 보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만도 했지만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고경아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집에 갇혀 살았기 때문도, 다시 시작한 직장 생활이 힘들기 때문도, 부부 싸움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제 갓 한 달 지난 희연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시간이 불과 하룻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다행이에요.”

“우리 집에 와서 봐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아무리 늦어도 8시 반에는 나가야 하고, 퇴근하면 7시 가까이 되는데 거의 12시간이네요.”

“수술 있는 날은 제시간에 못 오니까 경아 씨가 고생 좀 해요. 나도 별일 없으면 곧바로 퇴근할게요.”

다행히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봐주기로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아이 키우는 일도 힘든데, 남의 자식 돌봐 줄 사람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여느 때와 똑같은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출근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희연이를 바라보았다.

딸과 보냈던 단둘만의 시간이 그리워질까?

그럴 것이다.

희연이가 눈에 밟히고, 돌봄 아주머니를 기다리는 고경아도 왠지 안쓰러워 보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이게 최선이야.’

이런저런 일로 일요일에 환자를 보지 못했다.

서둘러 발을 놀려 회진부터 돌았다. 마지막 휴가를 떠났던 전공의까지 모두 복귀했지만 그래야 3년 차까지였다. 정말 티도 나지 않을 만큼만 편해질 것이다.

송재덕 교수는 여전히 부지런했다.

벌써 회진까지 다 돌았다. 김지훈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손짓을 했다.

“지훈아, 교수야, 너 없어서 정말 힘들었다. 사람이 너무 없어. 사람이. 근데 넌 휴가 가서 뭘 했기에 눈이 토끼 눈이 됐니? 경아는 힘들게 일했는데 넌 딸하고 밤새 놀기만 했구나. 하긴 노는 것도 힘들다. 힘들어. 특히 애들하고 노는 건 정말 힘들다. 정말. 고생했다. 고생했어.”

‘말씀 들으니까 내가 고생을 한 것 같긴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우물쭈물 웃음으로 때우는 순간 이준영 교수가 올라왔다.

“휴가 잘 다녀왔어?”

웬일로 스승님이 안부를?

“예? 예. 잘 다녀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휴가 다녀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총각이었다면 휴가 내내 사방으로 쏘다니며 술만 펐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경아 잘 챙겨. 힘들어하더라. 희연이는 많이 컸지?”

“예. 많이 컸습니다. 잠투정이 좀 심해서 걱정입니다.”

“다 그렇게 큰다. 혁원이 저놈도 어렸을 적에……. 헛험!”

전에 없는 말까지 나올 뻔했다. 이제 자식까지 채운 가정을 이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스승의 관심은 항상 기쁜 일이었다.

찢어지려는 입을 슬며시 단속하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회진을 올라온 이혁민 교수와 신현수 옆에 오창도가 있었다. 이준영 교수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왜 여기 계시죠?”

“오늘부터 일주일간 수술실에 들어올 거다. 자세한 얘기는 신현수와 해.”

이혁민 교수가 손짓을 했다.

“휴가 잘 지냈나? 오늘부터 오창도 선생과 수술 같이 들어가라. 수술 팀은 예정대로 짜도 된다.”

간단하게 몇 마디 더한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았다.

어안이 벙벙했고, 신현수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에는 상당한 부담까지 느껴야 했다.

“내가 실력 평가를 해야 한다고?”

“화, 목은 이준영 선생님 수술을 들어가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나중에 네 의견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돼.”

일이 정말 엉뚱한 곳까지 흘렀다.

어쨌든 과장인 이혁민 교수의 오더다. 아무 문제도 없도록 철저히 이행하는 것이 마땅했다.

오창도를 만났다. 간단히 인사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절대 단순한 일이 아니기에 긴장감부터 감돌았다.

“오늘 제가 들어가야 할 수술이 뭡니까?”

“라파로 4건과 개복 2건이 있습니다.”

‘정규 수술이 끝난 후에 혈관 수술이 두 건 정도 더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도 꺼내기 전에 오창도가 살짝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김지훈 선생 수술만 6건이라고? 만만치 않네.’

“평소에도 이 정도 하십니까?”

“매번 그런 건 아닙니다. 시연에다 휴가까지 겹쳐서 일정이 밀린 탓에 조금 많네요.”

말과는 달리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눈치였다.

‘얼굴을 보니 수술하는 날마다 이 정도는 하는 것 같네. 일주일에 20건 가까이 된다면 진충기 선생보다 훨씬 많이 하는 꼴인데 역시 대단해. 언제 그 수술을 다 하지?’

“응급 수술까지 들어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게 말씀 들었습니다.”

김지훈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을 정확히 보려면 수술이 많아야 하는데, 일복 터지라고 할 수도 없고 곤란하네. 우리 딸 봐야 할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적당히 왔으면 좋겠다.’

“원래 일주일에 하루 정도 서는데, 하필이면 휴가 때문에 일정이 변해서 이번 주는 오늘하고 금요일에 당직입니다. 미리 일정 조정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오창도가 헛기침을 했다.

첫날부터 6건의 수술을 들어가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술실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김지훈의 눈치가 조금 이상했지만 응급 수술이야 일반외과 의사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기에 당연하게 넘겼다.

그보다 마음가짐이 우선이었다.

‘후우! 열심히 하자. 전임이어도 지금은 날 평가하는 사람이고, 결코 전임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의사가 김지훈 선생이다. 기회가 오면 결코 놓치지 말자.’

이것으로 된 것일까?

수술실로 향하려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실력을 평가한다고 했다.

써전이라고 해서 수술만 잘하면 기술자에 불과하다. 또한 실력에는 많은 요소가 포함된다. 결정적으로 임용을 위해 진행하는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말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도 안 되지만, 의미를 생각할 때 곧이곧대로 듣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왕이면 확실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맞아.’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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