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Ⅲ (2)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눈빛이었다.
“진충기 선생의 평가서도 주시죠.”
“이건 소용이 없을 텐데요.”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병원 이사님들과 교수님들은 상당히 유연하신 분들입니다. 주임 교수의 평가서만 인정하는 것도 절대적인 원칙은 아닐 겁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오창도가 머뭇거렸다.
“원칙을 깨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더군요. 제 욕심을 앞세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원칙에 위배된다면 당연히 채택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탈락하면 폐가 될 일이 아예 없습니다. 임용되시고 나서 최선을 다해 주시지 않으면 그게 정말 폐가 되는 일입니다. 제가 아니라 우리 과 전체에 말입니다.”
이런 대화는 듣고만 있어도 즐겁다.
‘야! 오늘 진짜 멋있는 사람을 둘이나 보네. 오창도 선생님, 포기하지 마세요. 현수야, 파이팅이다.’
결과까지 좋다면 최상일 것이다.
김지훈이 책상 밑으로 엄지를 쭉 치켜들었다.
특별한 일 아니라는 듯 힐끗 눈길만 주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냉정함과 도도함이 정말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가히 폭발적인 멋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에이! 엄지 치켜드는 게 아니었어.’
쩝쩝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런 엉뚱한 생각이 도리어 오창도의 임용을 희망적으로 보게 했다. 신현수는 인사 위원들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간 후 자리를 끝냈다.
많은 생각이 드는 자리였다.
오창도만큼이나 진충기에게도 신경이 갔다.
“오창도 선생님, 진충기 선생이 정말 변하고 있다면 시연이 아니라 선생님 덕분일 겁니다. 저도 선생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창도가 멋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김지훈의 한결같은 모습과 신현수의 냉철하고 침착한 눈빛에 문득 한 줄기 희망이 다가왔다.
‘만에 하나 한 교수 말대로 임용되면 어떻게 하지?’
너무 때 이른 걱정에 피식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김칫국부터 마시면 가만 놔둬도 될 일이 안 되거나, 심각하게 꼬이는 법이다.
집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힘찼다.
‘결과를 떠나 정말 기분 좋은 시간이었어. 현수와 교수님들이 힘을 쓰면 함께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겠지? 됐으면 좋겠다.’
가슴이 무언가로 꽉 찼다.
상당히 묵직했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졌다. 고경아와 보고 싶은 딸의 빈자리는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추위였다.
계란에 파 송송 썰어 넣고 끓인 라면이 왜 이렇게 맛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뜨거운 국물에 최고로 어울리는 찬밥 말아 김치 척척 올려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이 난다.
울적한 기분과는 달리 국물 한 방울, 밥 한 톨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워진 냄비와 밥그릇을 보니 더더욱 서글퍼졌다.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말인가?
크윽! 잘 먹었다는 신호까지.
‘경아 씨, 잘 먹어야 경아 씨도 마음을 놓겠죠? 희연아, 아빠 원래 이런 사람 아니다.’
어느 틈엔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9월 밤바람이 살랑살랑 피곤한 몸을 어루만져 주었다.
***
드디어 휴가다!
부족한 인원에 몰려드는 환자와 밀린 수술.
오창도와 진충기 문제.
이때만은 모든 일을 뒤로하고 가족에게 신경 쓸 때였다. 휴가 때까지 직장 일을 집으로 끌고 들어오면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을 것이다.
깨끗하게 머리 비우고 원주로 향했다.
휴가 첫날이 주는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요일 점심 무렵.
고경아의 출산휴가 마지막 주말이자 몸조리를 끝내야 하는 날이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을 모시고 마블링이 화려하게 깔린 등심에 감사함과 죄스러움을 듬뿍 올려 대접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고경아와 함께 마주 보며 먹을 수가 없었다. 번갈아 희연이를 안고 식당 밖을 서성여야 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뵐게요.”
최문옥 여사가 한 걱정 했다.
“에이구! 우리 희연이 어떻게 하나. 김 서방, 아무리 아껴도 엄마 아빠만 한 손은 없어. 다른 사람에게 희연이 맡겼다고 마음 놓지 말고 최대한 일찍 들어와. 1분이라도 얼굴 더 봐야 돼. 그게 제일이야.”
고성문은 헛기침만 했다. 경목이라고 부를 뻔한 손녀를 보내려니 착잡한 모양이었다.
차에 타기 직전 희연이를 꼭 안아 주며 토닥일 뿐이었다.
“김 서방, 잘 키워. 조심해 가.”
차가 떠나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원주에서 돌아오는 길, 고경아가 희연이를 안고 뒷좌석에 앉았다. 항상 옆에 앉았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차 안이 불편했는지, 환경이 바뀐 탓인지 집에 도착해서도 칭얼거렸다.
부지런히 짐 정리를 했다.
고경아는 희연이를 가슴에 안고 달래느라 잠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아직 몸이 힘들 텐데 웃고 있었다. 칭얼거리던 희연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로의 온기에 편안함을 느끼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꽤 시간이 지나서야 희연이를 눕힌 고경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잘 볼 수 있겠어요?”
“희연이가 운다. 기저귀 확인한 후 축축하거나 똥 쌌으면 갈아 주고, 아니면 배고프다는 신호다. 20cc에 분유 한 숟갈 타서 먹이고, 가볍게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킨다. 잠투정이 있으니까 잠들 때까지 안아 준다.”
또 뭐가 있을까?
“목욕 시킬 때 목 잘 가누고, 내가 쓰는 비누나 샴푸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 끝나면 춥지 않도록 재빨리 닦아 준다. 옷은 마님께서 챙겨 주신 것을 순서대로 입힌다.”
한 달의 육아로 초보 엄마 딱지 뗀 고경아가 못 미더운 눈치를 보였다.
김지훈이 가슴 탕탕 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필요한 물품을 정리했다. 차곡차곡 잘 놓아두어야 필요할 때 빨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 고경아가 출산휴가 후 첫 출근을 할 때까지 귀가 닳도록 집중 교육을 받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 내가 안 받으면 언니한테 전화해야 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딸은 아빠가 지킨다. 알죠?”
큰소리 떵떵 치며 고경아를 배웅했다.
“경아 씨, 무리하지 말아요.”
“힘든 일 안 시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골목길 사이로 사라지는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아빠와 딸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어? 깜짝 놀란 것처럼 팔다리를 움직이네?
어? 지금 아빠 보고 웃는 거야?
배냇짓이겠지만 정말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빠 손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운다. 분유 잘 먹였다.
운다. 기저귀 확실하게 갈아 주었다.
잠들듯 하다가 운다.
배고플 시간도 아니고, 기저귀도 뽀송뽀송하다. 잠투정일 것이다. 품에 안고 어디선가 들었던 자장가를 불렀다. 잠들듯 말 듯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어후! 팔 아파. 희연아, 이제 자면 안 될까? 아빠가 지금 몹시 힘들고 덥단다.’
결국 고경아에게 응급 구조 요청을 해야 했다.
(얼마나 안아 줬는데요?)
“한 시간이 조금 안 됐어요.”
(그럼 더 안아 줘요.)
깔끔한 한마디는 시작일 뿐이었다.
설레고, 분주하고, 힘든 오전을 보냈다. 살짝 심적, 육체적 부담이 다가왔다.
‘우리 딸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인데 이 정도쯤이야. 말 못하는 우리 희연이는 더 힘들지? 아빠만 믿어.’
딸과 단둘만의 첫 식사다.
수저를 드는 순간 귀신처럼 알고 칭얼대 분유 먹은 시간, 기저귀 상태부터 확인했다. 자식 똥 냄새 향기롭다는데 다이어트하기 딱 좋은 상황에 몰렸다. 응급 수술을 앞두고 허겁지겁, 맛도 모르고 먹는 밥과 비슷했다.
청소도 해야 한다.
진공청소기 소음 때문에 방문을 꼭 닫으면 불안하고, 문 열면 딸이 울었다. 목이라도 가누면 업고서라도 청소 정도는 빠르게 할 텐데, 난감 그 자체였다.
익숙한 수술 중 이상하게 손이 꼬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술은 절대 포기할 수 없지만 청소는 포기다.
앗! 어느 틈에 희연이가 잔다.
팔베개하고 누워 딸의 얼굴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꿈을 꾸는지 살짝 놀라는 모습도, 새근새근 잠자는 모습도 천사였다.
“잘 자라, 우리 아기. 앞뜰과 뒷동산에…….”
누구를 위한 자장가였는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입 안에 넣은 사탕처럼 달콤함이 찾아오려는 순간 배고프다고 열심히 울어 댔다.
“우리 딸 배고프구나. 어후! 우리 딸 기저귀가 푹 젖었네. 잘 먹고 잘 싸야 무럭무럭 자라지.”
기저귀 갈고, 분유 먹이고, 트림 시킨 후 잠시 딸과 놀았다. 혼자 중얼거리며 마냥 딸 바라보는 놀이 말이다. 배냇짓 한 번 해 주면 충분히 재밌다.
아빠 마음은 그런데.
아빠의 품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보 아빠의 품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응애! 응애!
잠투정이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다.
팔다리, 어깨, 허리가 뻐근해지고, 등짝이 축축해질 정도가 돼서야 잠이 들었다. 자리에 눕혀야 할지, 이대로 안고 있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내려놨다가 또 울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과 불안 속에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혔다.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가만가만 방을 나왔다. 문 닫을 때는 긴장 그 자체였다.
후우! 딸과의 첫날인데 왜 자꾸 한숨이 나올까?
은근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피곤했다.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 인기척을 느꼈다.
“지훈 씨, 나 왔어요.”
감이 딱 왔는지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희연이는 자요?”
“깜빡 잠들었네. 오래간만에 출근했는데 피곤하지 않아요? 몸은 괜찮아요?”
딸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눈길 한 번 주고 살며시 문부터 열었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엄마 미소를 머금은 채 한참을 바라본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많이 했는데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었다.
‘몸은 훨씬 편한데 마음은 정말 불편했죠.’
“별일 없었죠? 저녁 먹어야죠?”
조심조심 찌개 끓이고, 반찬 몇 가지 내놓은 후 수저를 들었다.
역시 우리 딸이다. 밥 한 술 뜨기도 전에 칭얼거리는가 싶더니 우렁차게 울었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고경아가 딸을 안았다. 몇 번 손을 움직이자 울음을 그쳤고, 배냇짓까지 했다.
“우리 딸, 엄마 왔다고 울었어? 보고 싶었지? 나도 보고 싶었어.”
방긋 웃는 얼굴에 뽀뽀를 얼마나 해 대는지 딸 얼굴 닳는지 알았다.
애 보며, 밥 먹으며 할 일 다 했다.
그렇게 울어 댔던 딸이 혼자 잘도 놀았다.
역시 엄마는 위대하다.
‘희연아, 혹시 아빠가 미운 거니?’
한밤중에도 육아는 계속됐다.
다음 날 아침, 벌건 눈으로 고경아를 출근시킨 후 육아 두 번째 날을 맞이했다.
하루로는 초보 아빠 티 절대 못 벗는다. 허둥지둥, 허겁지겁 하루가 바삐 흘렀다.
발바닥에 땀난다.
일하는 것이 백배 쉬웠다.
이 땅의 엄마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김지훈이 젖병과 기저귀 들고 육아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일반외과 역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오창도 문제였다.
구비 서류를 확인한 이혁민 교수가 이준영 교수, 신현수와 함께 깊은 토론을 나누었다.
부진한 실적 부분이 무척 눈에 걸렸다.
새로운 교수를 선발하는 일을 두고 허술할 교수들이 아니었다. 서류가 무색할 정도로 소송 건부터 시작해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모든 사항을 고려한 후 합격점을 주었다.
첫 난관만 통과했을 뿐이었다.
두 장의 근무 평가서도 문제였다.
“이것 참 웃기는 상황입니다. 최인호 교수는 무슨 생각인지, 진충기는 또 무슨 생각으로 작성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정식 면접 전에 우리가 먼저 만나 보는 게 좋겠어.”
결국 병원 인사 위원회가 주관하는 정식 면접을 진행하기 전에 개별 면접을 먼저 가져야 했다.
생각도 못했는지 오창도의 긴장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긴 이준영 교수의 무뚝뚝함 속에 숨은 카리스마와 이혁민 교수의 칼 같은 논리 정연함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장의 근무 평가서가 상반된 내용인데, 우리가 어느 쪽을 취해야 합니까?”
“모두 다 제가 근무하는 것을 직접 본 선생님들의 평가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두 시각 모두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열심히 했다고 평가한 부분은 감사드리고, 부족하다는 평가는 따끔한 질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소송 건은 잘 해결되고 있습니까?”
“잘 해결되고 있습니다. 환자와 관련된 선생님들 모두 과실을 인정했습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합당한 보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환자분께서 빠르면 이번 주 내에 소송을 취하할 수도 있다는 의향까지 보이셨습니다.”
“다행이군요.”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진충기가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는 말이었다. 어느 정도 변화를 느끼고 있던 신현수는 물론 이준영 교수까지 살짝 놀라고 말았다.
이후로 많은 질문과 답이 오갔다.
날카로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오창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눈빛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밝혔다.
물론 온몸을 땀으로 도배한 지 오래였다.
한 시간이 넘는 면담 끝에 이혁민 교수가 잠시 이준영 교수와 상의한 후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사 위원회에 정식 면접을 요청하겠습니다. 오늘 보인 모습처럼 잘 대처하기 바랍니다. 단,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행히 교수 임용에 결격 사유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들은 넘어갔지만 단서가 붙었다.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