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88화 (888/1,329)

1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Ⅲ (1)

허탈한 웃음을 흘려야 했다.

‘내 욕심이 너무 컸어. 소송 걸리고, H 병원과 등 돌리는 순간 대학 병원 교수 길은 불가능해진 건데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써전으로서의 꿈이 허무하게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어떤 사유든 기존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의사를 영입할 병원은 없었다.

‘신현수 선생에게 전화해서 깔끔하게 정리하자. 대학 병원만 써전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닌데 실망하고 화낼 이유가 없어.’

애써 스스로 위안했다.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당당해지자.’

마음이 힘들다고 어깨까지 떨어트리면 더 힘든 법이다. 남들에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눈가에 바짝 힘주고, 어깨를 활짝 펴야 했다.

지그시 어금니 물고, 힘차게 한 발 내디디려는 순간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복도 한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진충기였다.

최인호 교수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피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진충기였다. 스스로 당당하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다.

가볍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대로 지나쳤다.

“오창도 선생.”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창도가 아니라 오창도 선생이었다. 껄끄러운 부탁을 할 때면 간간이 오 교수라고 부른 적은 있었다. 다른 병원 의사에게는 잘도 붙이던 선생이란 호칭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눈빛과 표정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오창도 선생,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하자.”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을 뿐, 목소리나 말투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간 보아 온 행동과 성격을 생각해 보면 달리 해석할 이유가 없었다.

‘미련 두지 말자.’

복강경 센터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는데 부드러운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의료 과실 문제를 키운 사람도, 지금 상황을 초래한 사람 역시 진충기였다.

최인호 교수와 만난 직후라 신경이 곤두서 있기도 했다.

“전 할 말 없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 소송 문제 때문이니까 잠깐만 시간 내.”

지나가는 길에 부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직접적으로 소송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결론이 날 때까지 관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빨리 끝나야 환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유리할 것이다.

마지못해 함께 자리를 했다.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한 교수?”

가장 친했고, 허물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한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리를 갖자고 했으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진충기가 직접 말하다니 의아한 일의 연속이었다.

“오 교수, 잘 지냈어? 앉아.”

따뜻한 커피 세 잔을 앞에 두었다.

한 교수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소송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몰라서 물어? 한 교수까지 대동한 걸 보면 병원 내에서도 문제가 제법 커진 모양이네.’

“어떤 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환자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잖아.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줘.”

꼿꼿한 자세와 날카로운 눈빛, 위압적으로 들리는 말투까지 부탁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 오창도의 눈에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원칙대로 하시면 됩니다. 내가 아니라 환자분을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진충기가 잠시 오창도를 바라보았다. 완강한 말에 속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내가 괜한 시간을 뺏은 것 같네. S 병원에 근무 평가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알고 있어. 최인호 선생님께 이미 받았겠지만, 한 장 더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가져가.”

무엇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진충기가 눈길 한 번 주고는 일어났다. 부탁하지도 않은 근무 평가서에 머릿속이 은근히 혼란해졌다.

옆에 앉아 묘한 콧소리를 내던 한 교수가 어깨를 툭 치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딘가 들뜬 것 같으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 교수, 보이는 건 똑같은데 태도가 좀 이상하지? 시연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건지 몰라도 일이 주 전부터 많이 달라졌어. 속단할 수 없지만 절대 나쁜 방향은 아니야.”

“무슨 소리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음 주에 간 전 절제술이 잡혀서 준비에 들어갔는데, 우리 의견을 십분 수용했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인지 뭔가 불안하고 부족하게 느껴졌던 예전과 달리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팍팍 드네.”

다른 병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복강경 센터 운영, 특히 진충기의 성격을 생각할 때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보일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소송 건도 이전과는 다르게 접근하는 것 같아.”

“어떻게?”

“말을 안 해서 잘 모르지만 툭하면 수술 기록지를 확인하면서 꽤 고민하는 눈치야. 뭔가 눈빛도 달라진 것 같고. 근무 평가서도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어.”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피해 없이 빠져나가려는 의도만 아니길 바랐다.

오창도만이 아니라 환자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때 진충기 자신에게 최선의 길이 열릴 것이다.

손에 쥔 근무 평가서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뜯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큰 실망감을 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효력이 있을까? 우호적일까?”

“나도 내용은 몰라. 공식 서류는 아니더라도 정확한 평가 내용이 들어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어쨌든 S 병원에서 꼭 근무하기를 바라. 다들 잘되길 바라고 있어.”

‘변했다 쳐도 최인호 교수는 변한 게 없던데, 진충기 선생이 거스를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소송 건만은 원만하게 해결됐으면 좋겠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한동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안고 병원을 나섰다.

십수 년 동안 근무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한 직장인데 다신 찾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복잡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던 오창도가 손에 들린 서류를 보았다.

두 장의 근무 평가서를 받았다.

한 장은 공식이고, 한 장은 비공식이다.

문서를 확인하던 오창도가 입술을 모은 채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의 내용에 당혹스러울 정도였지만, 평가는 단 한 장으로 이뤄질 것이다.

오직 공식적인 문서만이 유효하다.

S 병원도 예외를 두지 않을 사안이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길어지자 김지훈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짧은 시간 상념에 잠겼던 오창도가 실례했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일단 필요한 서류는 다 준비했습니다.”

신현수가 서류가 모두 구비됐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내일 이혁민 선생님께 제출하겠습니다. 직접 제출하시는 것이 맞지만, 시간을 빼기 힘든 데다 제게 권한을 일부 위임하셨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류 심사에 문제가 없으면 며칠 내로 면접 날짜가 정해질 겁니다.”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번복을 말씀하셨는데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직한 한숨을 내쉰 오창도가 의외의 말을 했다.

“먼저 보시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면 근무 평가서를 봐주십시오.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입니다.”

“두 장이요?”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가서를 찾았다.

한 장의 서류를 꺼내는 순간 오창도가 품에서 또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근무 평가서가 왜 두 장이지? 희한하네.’

궁금증을 꾹 누르고 한 장씩 확인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일반외과 의사로서의 자질, 교수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자격이 뛰어나다 할 수 없지만 평균 내지는 일정 정도 상회한다고 할 수 있다. 단, 실적이 매우 부실하다. 이는 책임감 부재일 수 있다. 또한 의료 과실로 인한 소송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걸려 있는바 신상이 정리될 때까지 신중한 판단을 요한다. 그로 인해 발생한 대인 관계 문제 때문에 적절성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문맥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학 병원 교수 자원은 말 그대로 의료와 교육을 동시에 담당하기 때문에 신변 문제와 대인 관계 등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동료들과 원활하게 친화되지 못하면 환자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재원은 절대 아니란 말이었다.

<교수 직위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실적은 없다. 이는 병원 내 시스템으로 인한 문제일 뿐 개인적인 능력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주관적인 평가가 도리어 객관적일 수 있다.>

주관이 도리어 객관적이다?

<일반외과 의사가 갖춰야 할 기준은 충족하고도 남는다. 특히 환자와 동료에 대한 책임과 연대 의식이 강해 기존 구성원들과의 융합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최근 소송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는 오창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판단 기준을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대로 훌륭한 교수 재원임이 틀림없다.>

적극적이고 매우 호의적인 추천이었다.

교수 선발에 당락 이외의 중간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되는 평가서였다.

같은 병원에서 두 장의 평가서가 나온 것 이상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먼저 읽은 것은 최인호 선생님 평가고, 나중 것은 진충기 선생님 평가입니다.”

“진충기요?”

“저도 확인해 보고 내심 무척 놀랐습니다. 직접적으로 부딪치며 가장 많이 얼굴 붉힌 사람인데, 호의적인 평가서를 낼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일이 꼬였다.

신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겠지만 비공식 문건은 제출할 수 없습니다. 최인호 교수님께 받은 평가서만 유효합니다.”

차라리 모른 척하고 진충기의 평가서만 제출했다면 매의 눈이 아닌 이상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오창도였기에 도리어 안타까웠다.

“알고 있습니다. 최인호 선생님 눈에 제가 그렇게 보인 것 또한 사실일 겁니다. 지원서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하겠지만 선생님들 얼굴을 봐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씀대로라면 평가서를 다 보여 줄 이유가 없는데, 왜 보여 주신 겁니까?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 병원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만 진충기 선생님이 마음에 걸려서요.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치부를 가릴 가면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종이 한 장에 적힌 내용으로 사람이 변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전 병원에 찾아왔을 때도 뭔가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여전히 성급한 판단일 뿐이었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설마 평가서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대외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한 교수라고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한 동료가 있습니다. 평가서를 받던 날 한 교수와 따로 만났습니다. 그때 그러더군요.”

오창도가 목이 타는지 물 한 모금을 청했다.

“시연이 끝난 후 받은 수술 녹화 테이프를 매일 저녁 다른 교수들과 함께 수없이 보고 있답니다. 원래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선생님들의 수술을 평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더군요. 같은 수술 팀인 한 교수에게도 의견을 구하지 않았던 사람이 전공의에게까지 의견을 물어봤답니다.”

S 병원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H 병원에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인 모양이었다.

오창도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간 전 절제술을 보면서 우리는 왜 못하는지를 두고 심도 있는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결론을 들었을 때 정말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떤 결론을 내렸는데요?”

“개개인의 실력, 능력, 노력, 열정은 하나도 뒤질 것이 없지만 단 하나, 자신의 독단과 아집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며 자책했다고 합니다. 수술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는군요.”

남 욕 하기 바빴던 진충기가 정말 변한 것일까?

헛소문까지 퍼트리며 온갖 저질스런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진충기였기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입을 몇 번 거치면 없는 말도 생기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진충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불신은 깊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죠.”

“맞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 다 학회 일을 하시니까 앞으로 얼굴 볼 일이 자주 있을 겁니다. 변하고 있는지 잘 지켜봐 주시고, 변하고 있다면 응원해 주십시오. 한 교수를 비롯해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동료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었다.

참 선한 사람이었다.

오창도가 진충기의 평가서를 품에 넣었다.

“환자 때문에 갑작스럽게 보게 됐지만 덕분에 즐거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중에 얼굴 보면 반가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애써 웃고 있었다. 교수 자리는 완전히 포기한 얼굴이었다.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도 불미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소송과 최인호 교수의 평가서는 한 줌 기대조차 품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안타까움과 답답함만이 흘렀다.

김지훈도 눈가를 찌푸리는 일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눈가를 좁힌 채 생각에 잠겼던 신현수가 오창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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