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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887화 (887/1,329)

10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Ⅱ (2)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좋은 점은 딱 하나다.

특히 주말이 기다려질 때는 더욱 그렇다.

시간 하나만은 정말 빨리 간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갔다.

초보 아빠의 두 번째 주말이다.

첫 주말과 똑같은 마음으로 맞이했다.

희연이란 이름의 한자 이름도 받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 뒹굴뒹굴 구를 틈을 주지 않았다.

고개도 못 가누는 딸 안고 재우는 법, 목욕 시키는 법, 기저귀 갈고 옷 갈아입히는 법, 분유 먹이고 트림 시키는 법까지 하나하나 배워 갔다.

쉬운 일이 없었다.

특히 기저귀 갈 때는 다소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이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

“경아 씨, 냄새가 좀 심하지 않아요?”

“똥 냄새 나요? 난 하나도 안 나는데.”

역시 엄마는 위대하다!

배운 것 실행하다 보니 순식간에 주말이 지났다.

갈수록 예뻐지는 딸을 두고 가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육아로 점점 힘들어하는 고경아와 장모님 볼 면목이 없었지만 누군가는 열심히 벌어야 하기에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경아 씨, 다음 주말이 당직이네요. 휴가 때라 바꿀 수도 없고 미안해요.”

“엄마가 있으니까 내 걱정 말아요.”

“출산휴가 끝나면 어떻게 하죠?”

“언니가 주간에 아이 돌봐 줄 수 있는 곳 알아보고 있어요. 꽤 비싼데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루 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병원을 그만둬야 할까요?”

무척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고경아 말마따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면 한 아이의 엄마라고, 한 남자의 아내라고 해서 자신의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딸에게 미안하지만 김지훈 역시 남편으로서 아내의 결정을 응원하는 것이 마땅했다. 육아와 직업을 병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길 바랄 뿐이었다.

‘경아 씨도 희연이도 다 소중한데 갑갑하네.’

서울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9월 둘째 주.

휴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았던 미묘한 변화가 의외로 강하게 다가왔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환자 수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후! 힘들다. 왜 이렇게 환자가 많아지지? 아직도 시연 때문에 수술을 미룬 여파가 있나?’

일복은 지긋지긋하게 떨어지질 않았다.

거의 뜬눈으로 평일 당직 하루를 보내고 주말에는 전쟁을 치렀다. 다른 병원 응급실이 모두 폐쇄된 게 아니고서는 이럴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 번째 주를 맞이했을 때 확실하게 느끼고 말았다. 시연이 끝난 지 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갔다는 현실을 말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뉴스나 방송은 당연히 병원과 의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반면 시연은 의사에 국한된 행사일 뿐이었다. 아직 정훈철의 기획 방송은 방영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근거리, 원거리를 가리지 않고 타 병원의 환자 의뢰가 급증했다. 간단하거나 기본적인 수술을 의뢰했을 리 없었다.

“염증이 상당히 심합니다. 일단 입원해서 염증이 가라앉는 대로 즉시 수술하겠습니다. 중간에 끼어드는 꼴이라 스케줄이 잡혀도 오후 마지막 수술로 가능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급이거나 그에 준한 환자는 아무리 수술 예약이 많아도 수술 스케줄을 잡아야 했다. 문제는 심각한 질환을 가졌지만 당장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 환자들이었다.

“들으셨겠지만 간 절제만이 유일한 치료입니다. 그런데 수술 예약이 밀려서 이번 달 안에는 불가능합니다. 일단 다음 달 중 가장 빠른 날로 잡을 테니 저희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실지 결정해 주십시오.”

더구나 복강경만 수술이 아니다.

월, 수, 금 3일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라 예약 기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증이거나 급하지 않은 환자는 기다릴 여유라도 있지만 암처럼 중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야 했다.

‘이러다 예약 건수가 스승님하고 맞먹겠네.’

여기까지면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혈관 수술, 중증 외상 환자, 소아과 환자, 갑상선에 유방까지 별 보며 출근해 별 보며 퇴근해야 했다.

고경아가 몸조리 중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화, 목 이틀간의 진료도 문제였다.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꼬리를 물었는지 진료 예약이 크게 늘었다. 외래 환자가 적은 일반외과 특성까지 완전히 무시됐다. 수술한 환자들 진료만도 벅찬데, 몇 배의 시간을 요하는 신환들까지 몰려 진료가 끝나면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기기 일쑤였다.

집에 도착하면 그대로 뻗었다. 일하다 토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힘들다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몰려드는 환자에 여유를 잃었다.

당연히 남은 교수들 역시 일에 치이기 시작했다.

송재덕 교수마저 병원 일을 뒤로하고, 예전처럼 수술을 해야 했다.

“다른 병원 문 닫았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요새 왜 이러니. 왜? 지훈아, 교수야, 이러다 나 죽겠다. 죽겠어. 보통 힘든 게 아니다. 네가 날 생각한다면 대장 해야 한다. 대장. 그 수밖에 없다. 대장 하자, 대장.”

휴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술 들어갈 인원이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 기본적 처치인 드레싱을 할 여력마저 사라졌다.

드르륵! 드르륵!

1년 차인 오하석과 함께 송진우, 강병옥, 차상수까지 이른 아침 드레싱 카를 끌었다. 그 시간에 응급 수술이라도 있으면 전임들마저 드레싱을 해야 했다.

교수가 돼서도 말이다.

“지훈아, 왜 네가 드레싱을 해?”

“현수야, 경석이 형 수술 중이다. 너도 늦지 않으려면 직접 하는 게 좋을 거야.”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퇴근할 때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퇴근이라도 빠르다면 모를까, 시간이 너무 늦어 4년 차들과 식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모두들 눈이 벌게진 채 하루를 보냈다.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이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러다 토끼 과 되겠다.”

단 한 명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급하다고 아무나 충원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능력과 실력이 확인된 오창도가 정말 기억나는 나날이었다.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고,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정말 간만에 시간이 나 당직인 신현수와 마주 앉았다. 별 보기 운동 중인데, 집에 기다리는 사람까지 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고! 힘들다. 현수야, 오창도 선생님한테 연락 없었어? 요즘 같아선 웬만하면 바로 들어오셨으면 좋겠다. 설마 근무 평가서도 못 받은 건 아니겠지?”

“며칠 전에 통화 한 번 했어. 이번 주말에 평가서 들고 온다고 하시네.”

“드디어 받았구나. 야! 다행이다. 정말 잘됐네.”

신현수가 입술을 모았다.

“근데 너 오창도 선생님이 간담도 파트인 건 알지?”

“당연히 알지.”

“이제 와 세부 전공을 바꿀 수 없을 텐데 괜찮겠어? 바로 위 직속 교수가 한 명 생기는 일이잖아.”

그런 일에 신경 쓰면 일 못한다. 나이나 경력을 볼 때 박승준 교수와 전임들 사이에 교수가 있어야 허리가 더욱 든든해지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신현수보다 과장만 빨리 되면 돼.”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속마음이나 빨리 털어놔.”

‘자식! 이빨도 안 들어가네. 뭐가 부족한 걸까?’

일단 진지 모드로 후퇴다.

“난 온몸으로 환영이야. 너도 많이 바쁘지만 이준영 선생님하고 나하고 둘이 유지하기에 너무 환자가 많아. 지금 같아서는 우리 파트만 네 명은 돼야 할 것 같아. 펠로우 몇 명 뽑을지 결정 안 됐어?”

“아직 미정이야. 왜?”

“빨리 결정돼야 확실하게 연락을 할 텐데 언제쯤 될까? 도진이하고 호석이가 지원할 것 같아. 우리 파트하고 대장 파트 나눠서 지원하라고 넌지시 압력을 가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살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바빠 죽겠다면서 언제 연락했어?”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렇게 일하다 죽을 것 같아. 도진이, 호석이는 말할 것도 없고, 오창도 선생님까지 잘돼서 빨리 같이 근무해야 다리 뻗고 살지. 와이프도 곧 온다.”

신현수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병원을 통틀어 김지훈만큼 일이 많은 전임은 없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고맙기만 했다. 그래서 더 오창도가 자격이 있기를 바랐다.

‘평가서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

당연히 써 줘야 할 서류를 지금까지 질질 끌었다. 누가 써 줬는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궁금증을 풀 시간이 왔다.

서류를 점검하고, 사전에 할 말도 있어 정식 지원 하루 전에 만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술과 환자에 완전히 녹초가 돼서 말이다.

오창도의 표정이 묘했다.

‘다들 정말 최선을 다하시네. 이런 열정과 노력 때문에 도저히 전임으로 볼 수 없는 실력을 쌓았겠지?’

감탄만이 아니라 부러움까지 뒤섞였다. 써전을 선택해 써전으로 살아왔는데, 지난 몇 주 동안 칼 한번 못 잡았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피곤이 쌓인 상태였다. 서류 받고, 중요 내용만 전달한 후 빨리 자리를 끝내야 했다.

그런데 오창도가 생각에 잠긴 채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고민스럽게 보였다.

“오창도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서류를 제출하면 당락을 떠나 번복할 수 없겠죠?”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었다. 인력 충원은 현재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모르면 안 되는 문제였다.

“왜 그러시죠? 혹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오창도가 콧등을 찡그렸다.

지원하기 위해 서류까지 들고 왔다. 최소한 마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일에 갈등에 휩싸이고 있었다.

‘예의가 아닌데, 진충기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한 교수 때문일까?’

미운 정 고운 정이라고 했다.

한곳에서 같은 사람과 오랫동안 일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긴다. 누군가 학을 떼고 나가지 않는다면 서로에 대한 감정 골이 깊지 않다는 말일 테고, 결국 미운 정이라도 들기 마련이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에게는 그런 감정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근무 평가서를 받기 위해 H 병원에 갔을 때만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라 여겼다.

이번 일 이후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김지훈을 보는 순간 무슨 이유인지 H 병원 일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까지 말이다.

청춘을 불사르며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직장이 바로 H 병원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갑갑하고, 어색할 줄은 몰랐다.

최인호 교수에게서 전해지는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한 대로 찬바람을 일으키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만나 준 것만 해도 다행일지 몰랐다.

“왜 왔어?”

“말씀드린 대로 근무 평가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오창도, 진충기에게 말 못 들었어?”

“무슨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개도 들지 않고 오창도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칠 가치도 없다는 듯 이내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병원 나갔다고 상관없는 사람 취급하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일을 저질렀으면 깨끗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나가야 되는 거 아냐?”

“소송 문제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말로는 못하는 일이 없지. 너 하나 때문에 진충기까지 둘이나 걸려들었어. 그동안 쌓은 명성과 위신이 소송 하나로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죄송하다면 다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을 주고받는 일이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근무 평가서를 받긴 글렀다.

설혹 받는다고 해도 좋은 소리는 단 한 글자도 없을 것이다.

S 병원 역시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할 테고, 최인호 교수의 평가는 객관적인 지표 중 하나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한숨만 나왔다.

최인호 교수가 비릿한 콧소리를 냈다.

“그것도 모자라 S 병원에 지원한다고? 나와 이준영 교수의 관계가 어떤지 몰라? 내게 개망신 주려고 작정을 한 거지? 시연 직후라 타이밍도 딱 좋네.”

“아닙니다. 기회가 됐을 뿐입니다.”

“기회? 착각하지 마. 네가 써전으로 살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야. 내가 네 목줄을 잡고 있다고. 교수들이 찬성한다고 S 병원에서 널 뽑을 것 같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고, 쉬워 보여?”

목줄을 잡고 있다니 인격 모독에 가까운 말이었다. 원래 아랫사람에게 독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기가 차서 화도 안 나네. 수련 때부터 십 년 가까이 널 내 밑에 뒀다는 게 어이가 없어. 기껏 키워 놨더니 뒤통수를 쳐? 집에서 기르는 개도 그런 행동은 안 해. 예의도, 은혜도 모르는 놈.”

목소리 높여 항의해야 했지만, 몸에 익은 위계질서라는 것이 보통 무서운 놈이 아니었다. 최인호 교수 말대로 목줄을 잡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수치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최인호 교수가 서류 한 장을 던졌다.

“네가 원하는 근무 평가서야. 제출하는 건 네 자유지만, 좋은 소리 기대하지 마. 위아래 모르고, 자신이 속한 과까지 무시하는 의사는 어느 병원에서도 원하지 않아. 가 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때는 존경했고, 마음으로 따르던 교수였다.

‘후우! 애초에 잘못 선택한 내 탓이다.’

상대가 무시한다고 해서 예의까지 잃는다면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어쩌면 이런 때일수록 예의를 갖춰야 진정 강한 사람일 것이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왔다.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다. 받으나 마나 한 근무 평가서를 쥐고 보니 공연한 짓을 했다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익숙했던 공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의 공간일 뿐 오창도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어떤 면을 보았는지 모르지만 소송 중이라는 사실까지 무시하고 지원한 자신을 환영한 이들이 떠올랐다. 인연이랄 것도 없는 인연을 맺은 김지훈과 신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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